에밀리 디킨슨
에밀리 디킨슨 (1830-1886)의 시 465번은 죽음에 관한 시이다.
파리가 붕붕 대는 소리를 들었다 - 내가 죽었을 때 -
방안을 가득 메운 고요
몰아치는 폭풍 사이 -
숨죽인 대기의 적막함 -
주변의 눈들 – 울다 지쳐 말라버렸다 -
굳건한 태세를 갖춘 숨결
마지막 결전을 – 왕께서 납실 때 –
대비하고 있었다 - 방 안에서 -
유품은 이미 정리했고 – 서명까지 했다
내 몫에서 나눠줄 것들은
처분되었다 -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
푸르스름하고 – 불확실하게 비틀거리는 붕붕 거림
빛과 – 나 - 사이
곧 창문이 흐려지고 – 그 뒤엔
보려 해도 볼 수 없었다
19세기 중반에 55해를 살다 간 시인의 이 시는 특이하게 모던하다. 생전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고독하게 은둔하며 살아온 디킨슨의 시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를 모던하게 만들어 주는 모티브는 바로 ‘파리’다.
흔히 인용되는 디킨슨 시가 실존적 고독을 다루거나 희망과 절망의 역설에 관한 것인 반면, 이 시는 독자에게 특히 더 개인적 울림을 갖고 다가오는 작품이다. 마치 요사이 유행하는 장르소설이나 영상물에서나 나올법한 임종 시 화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그린다. 죽어가는 자 또는 죽은 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한다는 아이디어만큼 모던한 것이 있을까.
이제 곧 닥칠 죽음 직전 죽어가는 이가 누워있는 방안은 고요와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치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에서 눈가에 마른 눈물을 붙인 채 지인들은 숨죽이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 조풍의 청교도 문화에서는 관례적으로 누군가 죽음을 맞을 때 가족 친지가 모여 죽음의 순간을 지켜준다고 한다.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음은 시에서 표현되듯 “왕”(신)의 왕림이기 때문에 죽는 이와 함께 그 순간을 목격하고 맞이하기 위해서 목소리도 낮추고 경건하게 밤을 새운다.
여기서 죽음은 더 이상 현세 인간의 것이 아니라 내세의 신이 관장하는 이벤트가 된다. 시 전체를 지배하는 적요한 분위기는 임종이 가까워왔다는 신호이고, 죽어가는 화자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파리 한 마리가 이 엄숙하고 고요한 장면에 날아든다. 그것도 붕붕 소리를 내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불확실하게” 날아다닌다. 신이 왕림할 순간 등장한 파리는 내세와 현세 사이에 끼어든 불순물 같다. 대개 파리가 방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내쫓거나 잡으려 든다. 파리는 병균을 옮기는 매개체라서 더러움, 부패, 쓰레기와 질병을 의미한다. 파리의 등장이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이 시에서 파리는 통상적인 의미보다 더 복합적인 상징성을 띤다. 시에서 파리가 “빛”과 나 사이에서 날아다닌다고 했다. 이 빛은 ‘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내세의 ‘빛’으로 볼 여지도 있다. 빛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파리는 생의 인연을 끊어낼 죽음의 전령사가 되고, 혹은 내세로 진입하는 임종의 순간을 방해하는 현세의 ‘찌꺼기’, 현세에 남은 미련과 아쉬움을 담은 시적 매개물이 될 수도 있다.
첫 행에서 붕붕 대는 파리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화자는 이미 죽었다. “내가 죽었을 때”라고 한 이후의 시행들은 모두 유령의 말이다. 이 유령 화자는 3연 마지막 행에서 파리의 등장을 언급하기까지 자신의 임종 장면을 담담히 서술하다가, 파리의 등장 이후 이어진 마지막 연의 네 행에서 그는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다. “창문”(눈)이 흐려진 뒤엔 ‘보려고 애써도 볼 수 없는’ 상태, 즉 죽음의 순간을 담은 이 마지막 행은 시인이 더 나아갈 수 없는 궁극의 한계 지점이다. 시인은 아마도 누군가의 임종을 지켜본 지인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 적막하고 경건한 철야의 와중에서 죽어가는 이와 감정이입을 한 시인은 유령의 입을 빌어 죽음의 순간을 그려낸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할 수는 있어도 죽음을 겪어보지는 못했으니, 그 누구도 죽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볼 수 없는 상황’ 즉 완전한 블랙아웃만이 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죽음 이리라.
자신의 종교적 믿음에 의지해서 내세를 상상하는 대신, 파리 한 마리를 등장시켜 경건한 분위기를 어지럽히게 만듦으로써 디킨슨은 죽음이라는 한계 경험을 증폭시키면서, 동시에 죽음을 앞두고 떠오르는 삶의 회환, 미련과 애써 감추고 잊어온 삶의 불순물을 모두 표면화시켜서, 죽음이 절대 ‘편안한 잠’은 아닐 것임을 암시해준다. 파리의 붕붕 거림처럼 시 곳곳에 놓인 저 무의미한 댓쉬(-)들의 어수선함에서 독자는 이미 이 점을 간파했으리라.
지난여름 어느 날 도심 산책길에서 쓰레기통 위로 모여들어 붕붕 대는 파리 무리를 봤다. 놈들을 피해 에둘러 걸었다. 하지만 안다, 파리의 저 냄새나는 소란조차 아쉽고 소중한 생의 한 순간을 알리는 성가신 신호가 될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사실을.
*2020년 모 문예지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