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S. 엘리엇의 <황무지>
T. S. 엘리엇의 <황무지>는 무녀 시빌에 관한 짧은 인용구로 시작한다.
내 눈으로 직접 우리에 갇혀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시빌을 봤다. 소년들이 시빌에게 물었다. “시빌, 당신은 원하는 게 있어요?”. 시빌이 대답했다. “죽고 싶어.”
라틴어로 쓰인 인용구의 내용은 시빌이라는 무녀가 죽어서도 죽지 못한 채 쪼그라진 몸으로 덧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소년들이 시빌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시빌이 죽고 싶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시빌은 영생을 기원했고 얻었으나, 늙어갈 뿐 절대 죽지 못한 상태에 처한다.
이 인용구는 『황무지』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 또는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상태에 처한 현대문명에 대한 비유이다. 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 살아있으나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목숨이 부지되는 상황을 엘리엇은 현대문명이 처한 정신과 심리적 상황이라고 본다. 특히 20세기는 신의 죽음이 선포된 시대였다. 바야흐로 현대인은 신이 없는 처지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담보하고 책임져야 했다. 신이 부재한 시대, ‘허무’가 세속적 현대인의 삶에 키워드가 되었다.
죽은 계절을 부활시키는 봄의 계절은 당연히 시빌처럼 허무적인 현대인에게 잔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불모의 땅에서
라일락을 꽃 피게 하고,
추억과 정욕을 뒤섞으며,
봄비로 무디어진 뿌리를 흔들어 잠 깨운다.
겨울은 따듯했다.
망각의 흰 눈으로 대지를 덮고
메마른 구근으로 작은 목숨을 연명하게 해 주었다.
여름이 난데없이 스탄베르거 호수를 건너온
소나기로 몰려왔다.
우리는 회랑에서 머물렀다가
햇볕을 만끽하며 걸어서 공원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한 시간 동안 애기했다
나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출신 순수한 독일인이에요.
어렸을 때는 사촌인 대공 집에서 지냈어요.
사촌이 날 썰매를 태워서 아주 무서웠어요.
사촌이 말했어요. 마리, 마리 꼭 붙들어
그리고 함께 미끄러져 내렸지요
산속에 있으면 느긋해져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에는 남쪽으로 가지요.
움켜진 것은 무슨 뿌린가 이 황무지에서
어떤 가지가 자라나는가? 사람의 아들이여
너는 말도 추측도 할 수 없다. 그저
부서진 우상더미밖에 모르기에 거기엔 해가 비치고
마른나무는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귀뚜라미도 울지 않는다.
메마른 돌에는 물소리조차 없다, 다만
이 붉은 바위 밑에 그림자가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오라)
그리하면 나는 아침에 네 등 뒤로 좇아오는 네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마중하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
(...)
비현실적인 이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무리가 런던 다리 위로 몰려든다.
죽음이 이렇듯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켰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제각기 발끝을 지켜보고 있었다.
-- 『황무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황무지』는 매우 긴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있다. 모더니즘 시의 대가인 에즈라 파운드와 엘리엇은 많은 장시(長詩)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파운드는 한 권짜리 시를 쓰기도 했다. 엘리엇 역시 파운드 못지않게 여러 편의 장시를 썼다.
시가 책 한 권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절 시는 시대정신을 담는 언어적 사유였다. 『황무지』는 엘리엇의 여타 장편 시들에 비하면 짧은 편이지만, 짧고 읽기 쉬운 시가 대세인 요즘의 시들에 비하면 길다. 긴 호흡의 시를 읽는 경험이 아쉬운 시대, 100년 전 모더니즘 시의 절정에서 우리 문명의 죽음과 부활을 모색한 이 시를 소환하고 싶다.
앞에 인용된 부분은 시의 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발췌한 것이다. 『황무지』의 반복된 모티브는 죽음이다. 엘리엇은 현대문명을 죽은 상태로 판단했기 때문에 겨울과 추위, 어둠은 모두 죽은 현대문명을 상징한다. 그렇게 죽은 상태는 차라리 편하고 안락해 보인다.
첫 행에서 7행까지가 현대문명의 정신적 죽음을 묘사한 대목이라면 이어지는 11행은 귀족계층에 속하는 실존인물의 일기에서 발췌 인용한 것으로 1차 대전 전후의 구대륙, 즉 서유럽의 문화적 병폐를 전한다. 여기서 이 시에서 중요한 ‘비’의 모티브가 등장한다.
여름이 난데없이 스탄베르거 호수를 건너온
소나기로 몰려왔다.
이미 4월이 잔인하다는 대목에서부터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정신적 불모의 문명은 자연의 순환과정으로 불가피하게 잠에서 깨어나 봄을 맞아야 하기 때문에, 불모의 상태는 곧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로 바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생명을 북돋우는 요소는 비이다. 봄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듯이, 불모의 정신에도 ‘비’, 즉 물을 통한 정화의 과정이 기다린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성경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정신적 불모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한다. 물이 없는 상태,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메마른 대지에 쌓인 조각난 우상들과 죽은 나무들의 이미지가 병렬되는 과정에서 신은 “한 줌의 먼지”에서 두려움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이 붉은 바위 밑에 그림자가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오라)
그리하면 나는 아침에 네 등 뒤로 좇아오는 네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마중하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
“먼지”는 인간의 존재를 의미하고, 이것의 두려움이란 곧 실재적인 죽음의 공포를 말한다. 그런데 마중을 나오는 “그림자”가 있다. 이 그림자는 예수 혹은 구원자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엘리엇은 가톨릭 정교도였던 터라 종교적 경향은 어쩔 수 없으리라. 우리의 세속적인 시대, 이 '구원'은 종교적 차원 이상의 울림을 준다.
"등 뒤로 좇아오는 네 그림자" , "저녁에 너를 마중하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 외의 다른 그 무엇 - 내 그림자 옆에 뒤에 따라올 붉은 바위 밑 그림자, 메마른 불모의 문명사회 병든 광채를 피할 서늘한 그늘의 그림자는 상투적 구원의 이미지 너머 형언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다름 그 자체로서의 구원이다. 구원이 메시아 일 필요가 없다. 구원을 어떤 존재에 몽땅 바칠 이유는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베케트의 인물이 되기보다는, 바위 밑 그림자에서도 구원을 발견할 지혜의 사유가 필요할지 모른다.
이 문제적인 1부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면서 현대 유럽 문명 속 인간 군상들이 시달리고 있는 정신적 불모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비현실적인 이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무리가 런던 다리 위로 몰려든다.
이 시를 되뇌며, 2021년이 시작된 지금 우리가 이 황무지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 있는지 묻고 싶어 진다.
시는 1922년 첫 출간되었다.
*<시론 포에티카>에서 리뷰하는 영미시는 모두 직접 번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