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소설이 필요한 이유
미국의 유수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했고 2013년 인문학 분야 국가훈장을 받은 소설가이자 산문작가인 마릴린 로빈슨은 미국 문단에서 종교를 소설의 소재로 직접 다룬 몇 안 되는 작가이다. 2004년 목사가 주인공이며 종교적 신성의 경험을 덧없는 일상생활과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시각에서 진지하게 다룬 소설 『길리드(Gilead)』로 퓰리처상을 받은 이후 로빈슨은 『귀향(Home)』(2008)과 『릴라(Lila)』(2014)를 차례로 발표함으로써 3부작을 완성했다. 이 두 편의 소설은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 존 애임즈 목사의 친구 아들이자 목사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돌아온 탕자’ 존 애임즈 보우튼과, 목사의 젊은 아내 릴라를 각각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연작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자 로빈슨은 연작소설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첫 번째 소설 『길리드』를 쓰고 난 후 등장인물들이 그리워졌고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듯했다고 한다. 소설을 끝낸 후에도 강렬하게 남아있던 인물들을 불러내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소설 세 편을 읽어가는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일인칭 소설인 『길리드』는 목사 존 애임즈가 어린 아들에게 쓰는 긴 편지글이다. 존 애임즈 시선을 통해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므로 그의 시선과 성품을 나타내는 장치이겠지만, 동시에 소설 속 군소 인물들까지 따듯하게 감싸 안는 작가의 마음이 그 원천 인지도 모른다. 애임즈의 편지글에서 애임즈가 용서하지 못한 인물로 등장한 잭과, 사랑과 안타까움을 담아 묘사했던 그의 나이 어린 아내 릴라는 이어지는 연작에서 주인공이 되어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선사받게 된다.
첫 소설 『살림(Housekeeping)』(1980) 이후 20여 년 만에 출간한 이 연작 소설들은 1950년대 중반의 미국 중서부 아이오아주의 길리드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77세의 목사와 그의 각별한, 역시 목사인 친구의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펼쳐낸다. 존 애임스와 보우튼은 평생 가족처럼 지낸 친구이지만 존 애임즈는 조합 교회주의(congregationalist) 목사이고 보우튼은 장로교 목사로, 기독교 교리에 관해 이견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둘은 조화를 이루며 우정을 키워온 사이다. 간략히 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요약해본다.
존 애임즈는 소꿉친구와 결혼해서 딸을 낳기도 했지만 출산과정 중 부인이 죽고 갓 태어난 딸 역시 곧 죽는다. 그는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거의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목사가 된 존 애임즈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있었다. 형은 어려서부터 비범해서 모두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될 것이라고 믿었고 아버지 교회의 신도들이 모은 돈으로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무신론자로 돌아와 대학교수가 되었다. 믿었던 큰 아들의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한 부모는 큰아들을 파문시키고 남은 아들인 존을 목사로 키운다. 존은 형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적 철학사상을 한때 접하기도 하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 소설이 진행되는 현재 시점에서 존 애임즈는 심장이 좋지 않아 투병 중으로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며 자신이 죽은 뒤 남겨질 아내와 아들에 대한 애틋한 심정과 근심을 편지로 전한다.
그의 이웃 친구이자 오랜 벗이며, 연작의 두 번째 소설에서 중심축이 되는 또 한 사람의 목사 보우튼은 다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왔지만 오직 한 가지 근심거리를 갖고 있다. 바로 아들 잭의 무신론과 ‘방탕한’ 생활이다. 잭은 일찌감치 집을 떠나 20여 년이 넘도록 집에 오지 않았지만, 병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임종 직전 함께 지내기 위해 귀향을 한다. 그의 이름은 존 애임즈를 땄지만, 애칭으로 잭이라고 불린다. 잭이라는 인물은 존 애임즈의 형과 함께 연작소설에서 ‘돌아온 탕아’ 주제를 변주한다. 잭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소소한 악행과 불경한 짓을 일삼다가 대학시절 인근 빈곤지역의 십 대 소녀를 임신시킨다. 딸에 대한 책임을 거부한 잭 대신 그의 부모와 누이인 글로리가 소녀와 딸을 보살피려 애쓰지만 소녀의 가족이 도움받기를 거부해서 잭의 딸은 불결한 환경에서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해 삼 년이 지나 죽는다. 이 사건이 잭의 가족에 큰 고통과 어둠을 드리우게 된다.
귀향한 잭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흑인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는 흑백 인종 간 결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때였고 흑인 여성의 가족으로부터 홀대와 거절을 당한 잭은 여자를 고향 길리드로 데려와서 살고 싶었다. 귀향의 목적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길리드의 공동체가 흑인 여성을 받아들일지를 알아보려는 것도 있었다. 아버지와 길리드 공동체와 끝내 화해를 하지 못한 잭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자신이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난다. 소설의 끝에 그의 연인이 테네시에서 차를 타고 아들을 데리고 잭을 찾아오지만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연작의 마지막 소설은 존 애임즈의 부인 릴라의 이야기이다. 릴라는 어려서 유괴되어 이주노동자들의 틈에서 자라난다. 그녀를 유괴했던 여자가 보호자의 역할을 하며 릴라를 키우지만, 유괴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정착하는 대신 시골마을을 전전하면서 유목적 생활을 한다. 정식 교육체계를 비롯한 주류적 삶에서 소외된 채 주변인의 삶을 살아온 릴라는 생명력이 강하고 자기 보호본능이 뛰어나며 직관과 감각이 발달되어 있지만, 박탈감과 소외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유괴범이자 보호자였던 여인이 릴라의 가족이라고 자처하는 남성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릴라는 무작정 길을 떠나 동가숙 서가식 생활을 시작한다. 우연히 들어선 마을 길리드 외곽의 버려진 오두막에서 지내며 날품팔이로 살아가던 중 릴라는 존 애임즈의 교회에 들어선다. 교회에서 세례 장면을 목격한 릴라는 그때부터 영혼의 구원에 관해 고민을 시작한다. 성경을 읽고 필사하며 자신의 영혼을 탐색하던 릴라는 목사 존에게 세례를 받고, 그에게 청혼함으로써 자신보다 수 십 년 더 나이 든 목사의 부인이 된다. 소설 『릴라』은 그녀가 존 애임즈의 아들을 낳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아들은 이미 첫 소설에서 존 애임즈가 쓰는 편지를 미래에 읽게 될 일곱 살짜리 소년이다.
이와 같이 연작소설은 존의 아들에서 시작해서 끝나고, 연작의 마지막에 태어난 아이가 시작점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는 구조로 구성되어있다. 이 원환 구조 가운데에 존 애임즈의 친구 보우 튼 가족의 이야기가 포함되어있으며, 잭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미국 사회의 인종갈등을 둘러싼 문화적 변화의 기운이 이 작고 외딴 마을 길리드에도 밀려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존 애임즈가 아들의 미래를 위해 유서처럼 남기는 편지글에는 그의 조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사가 담담히 서술되는데, 그 시간은 18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3대에 걸친, 거의 한 세기를 지나온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목사의 삶을 다루고 있는 연작소설을 창조해낸 로빈슨의 창작법은 깊은 사유와 직관에서 비롯한다. 그의 소설은 거의 모두 초고이며 수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빈슨에게는 ‘초고’란 말이 없다. 노트에 쓰는 첫 문장이 출간된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쓴다. 그렇게 쓰고 나면 교정을 보거나 수정하지 않는다. 책으로 나온 소설의 장면 구성은 로빈슨이 처음 노트에 쓸 때의 순서 그대로다. 여타의 작가들이 규칙적인 스케줄과 수정 원칙을 따르는 것과 달리 로빈슨은 등장인물이나 이야기가 마음속에서 생겨날 때만 집중해서 글을 쓴다. 마치 그녀 내면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따라가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언어를 따라가는 것 같은 비현실적 느낌은 로빈슨에겐 가장 진실되고 현실적이라고 한다.
가령 이 연작소설이 시작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그녀의 창작법이 갖는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어느 겨울날 로빈슨은 매사추세츠의 프로빈스타운에 있는 한적한 호텔에서 홀로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던 아들들의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겨 계획보다 그들의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 텅 빈 듯 적요한 호텔방에 앉아있던 로빈슨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서 근처 앰허스트 태생인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기척을 느끼고 멀리서 들려오는 대서양의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중 존 애임즈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옆에 놓인 공책을 열고 로빈슨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말해주는 대로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앉아서 약 30페이지를 쓴 뒤 로빈슨은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냈다. 편집자의 출간 결정이 내려지자 로빈슨은 마치 연재소설을 쓰듯 30페이지씩 써서 출판사로 보내기를 반복해서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로빈슨은 물론 다른 주요 인물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에세이를 쓸 때도 목소리를 듣는다. 로빈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문장을 만들 때까지 머릿속에서 작업한다. 로빈슨의 산문적 글쓰기는 소설이든 에세이든 마치 작곡가가 악상을 떠올리며 적어가는 악보와 같다. 언어가 말이 될 때 들리는 소리를 적어가는 것이다. 또 로빈슨은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자신의 소설을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한다. 노트를 앞에 두고 손에 펜을 들고 앉아서 쓰려고 할 때 비로소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쓰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관성에 빠진다고 한다.
로빈슨은 일상적 삶에 필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정신작용을 밀어내고 표면적 정신 너머 심층의 마음에 집중해야 독창적이고 고유한 언어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것은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들일 수 있어서 때로 자기 자신조차 놀라게 하고 또 그것이 선호하는 어휘가 따로 있다. 로빈슨은 이런 정신의 부름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단 작가만의 일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 부름에 따를 때야만 자기만의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심층의 정신적 공간이 바로 진정한 내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로빈슨의 작업방식과 창작에 대한 신념은 그녀의 종교적 철학과 상통한다. 로빈슨의 소설 창작법은 고유하고 매우 사적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종교적 신앙심과 믿음, 가치관과도 밀접하다. 이것이 로빈슨을 현시대 미국 문학에서 종교적 성격을 대표하는 작가로 만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문학과 종교, 혹은 종교적 문학이나 문학 속에서의 종교 등에 관한 얘기를 꺼낼 때 예상할 수 있는 종교적 내용과 로빈슨이 전하려는 것이 사뭇 다름을 예감할 수 있다
21세기의 시점에서 지난 20세기의 문학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수식어 하나를 꼽는다면 ‘세속적’이 아닐까 한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의미와 달리 문학을 논의할 때 ‘세속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세계와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서양 역사와 문화가 시작되었을 때 세상은 성령이 가득한 곳이었다. 고대의 벽화와 중세시대가 남긴 문헌들과 고딕 예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즘과 근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유럽인들은 신성의 베일이 벗겨진 세상, 인간이 중심인 우주관을 발전시킨다. 이런 변화를 혹자는 인간이 ‘마술에서 풀려났다’(disenchantment)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의 경험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세속화’ 과정은 아시아계를 비롯한 유럽 외부에서도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화 혹은 현대화 과정은 바로 세상 곳곳에 스며든 신성, 혹은 영성을 걷어내는 것, 다시 말해 ‘세속화’되는 과정이었다. 곰이 동굴 속에 며칠 째 들어앉아 마늘만 먹고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믿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이야기는 이제 한 집단의 본능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 태고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하늘이 컴컴해지고 천둥번개가 치면 하늘신이 노했다고 생각하는 대신 현대인은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의 변화를 떠올린다. 현대인에게 신성이나 영성은 종교라는 이름의 제도적 구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와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영적 효력에서 풀려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는 더 번성하는 듯하고 그와 함께 역설적으로 신성은 종교의 이름에 붙들려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문학은 종교와 점점 무관해진다. 문학에서 종교를 다루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고, 종교적 내용은 문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는 경향이 우세하다. 근대적 세속화 과정은 인간의 세련된 지성과 감성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종교적 소재를 다루는 것은 세련된 감성에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종교적인 경험이나 신앙 고백 같은 것이 비과학적 마술에 사로잡힌 전근대적 내용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우리가 현대성의 경험으로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또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 가령 까뮈의 『이방인』을 보라. 종교적 색채가 강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문학에서는 헤밍웨이의 소설이나 재즈시대를 거쳐 비트 세대의 문학으로 이어지는 양차 대전 전후의 환멸을 표현하는 문학들이 한 예이다.
이처럼 현대문학의 ‘세속화’ 혹은 ‘탈종교화’가 대세인 상황에서 로빈슨은 자신의 창작활동에서 종교, 특히 (그녀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빈슨은 기독교가 미국적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현재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정치적 우파에게 전용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로빈슨의 비판과 반발로 인해 더 굳건해진다. 로빈슨이 기대고 있는 기독교 전통은 군사 민족주의와 상위 1%의 물질주의에 침윤된 보수주의적 성향과 달리 사물에 대한 경외감, 인간의 근원적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 등에 토대한 신앙심이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녀가 생각하는 종교 또는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해준다.
“나는 내가 종교적 작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유롭게 의문을 갖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는 자유롭다. 내가 주장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향하고 있지 않다.”
아이오와대학 문예창작 프로그램 교수로 재직하다 최근 은퇴한 로빈슨은 아이다호의 농가에서 자랐다.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첫 소설을 출간했다. 로빈슨의 소설에는 에머슨과 소로우로 대표되는 미국 초절주의의 영향이 기독교의 조합 교회주의자 전통과 함께 강하게 나타난다. 로빈슨은 설교자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녀가 소속된 아이오아 시티의 조합 교회주의 통합 예수교회(Concreational United Church of Christ)의 목사가 출장을 갈 때는 그녀가 설교를 맡기도 한다.
그녀는 자라온 환경 탓에 어려서부터 자연의 풍경 속에서 신비한 친화감을 느꼈다. “숲에서 지내본 사람이라면 무엇인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로빈슨에게 그 바라보는 ‘무엇’이 어떤 존재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신이다. 여기서 ‘신’의 영어 표현은 ‘divine’이며, 이 신은 ‘God’하고는 다르다. 앞의 인용문에서 그녀가 “아무것도 향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을 때 어떤 절대적 실체로서의 일자, 유일신을 향해있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대신 로빈슨은 이 신성을 “뭔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타자’”로 표현한다. 고요한 숲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내게 말을 거는 존재를 느끼듯이, 나 아닌 타자의 존재를 구체적 실체나 절대적 관념이 아닌 직관적인 경험으로 확인한다. 숲에 들어가 본 사람은 숲이 고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무를 비롯한 식물과 생명체로서의 동물뿐 아니라 정령과 기운 같은 것들로 숲은 분주하고 시끄럽다. 숲 속 깊이 들어가서 듣게 되는 소리, 그것은 아마도 로빈슨의 창작을 이끌어내는 내면의 소리와 조응하는 것일
터이다.
로빈슨이 종교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존 제도 종교에서 설파하는 것과는 달리 모든 인간은 신의 이미지로 빚어졌기 때문에 모두가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런 믿음은 종교적인 것뿐 아니라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정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보고 마주한 것만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만나지 못했거나 보지 못한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거나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 전부를 알게 될 거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가정이 인간의 오류가 낳는다.
이런 철학적 영향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령 『귀향』에서 잭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려고 귀향한다. 그의 아버지 보우튼은 매우 덕망 있는 장로교 목사이지만 인종문제에 있어선 편협하다. 그는 끝내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걱정한다고 말하는 아들 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흑인을 향한 차별적 태도 탓에 잭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존 에임즈는 매우 직관적이고 인내심이 있으며 정서적으로도 섬세하지만 그의 아내 릴라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릴라 역시 태생적으로 건강한 지력을 가졌고 영적으로 성숙한 여자임에도 남편에 대해선 ‘무지’하며 자신이 살아온 생의 이력을 진솔하게 나누지 못한다. 연작의 마지막 소설을 끝내는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에게 말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첫 소설을 읽은 독자는 존이 투병 중이고 이생에서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 소설 『길리드』는 이미 첫 문장에서 그 사실을 알려준다.
“어제밤 내가 말했지, 아빠는 언젠가 떠난다고. 너는 어디로 가는데?라고 물었지. 내가 선한 신
곁에 있으려고 했더니 넌 왜? 했단다. 내가 말했지. 아빠는 너무 늙었기 때문이야.”
로빈슨이 소설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문제라면 바로 이 미스터리, 즉 인간 삶의 신비한 수수께끼 -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도 아는 것이 적다는 사실, 그리고 필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매우 특수하고 고유한 창조에 모두 속해 있으며,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순 없으나 사랑할 수는 있는 타자들과 살아간다. 로빈슨의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숲 속이나 광대한 벌판을 마주하고 어떤 거대한 존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력한지를 깨닫는 부분들이 자주 나온다. 이런 장면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경험은 흔한 범신론과 다르다. 세상이 살아있고 뭔가 형언할 방법이 없는 어떤 경험의 심오함 같은 것인데, 만일 그것을 묘사할 어휘가 있다면 ‘종교적’이라는 것이 제일 적절할지 모른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종교를 다룬 그의 몇 안 되는 저서 중 하나에서 “대양과도 같은 감정”을 종교적 경험의 묘사로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종교란 어떤 경험적 차원을 일컫는 말이지 제도적 종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길리드』 삼부작이 문단의 관심을 받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어쩌면 독서 대중이 종교적인 것을 경원시한다거나 문학에 종교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식의 불문율이 사실은 고정된 원칙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문학이 종교를 맘대로 사용해도 된다거나 종교적 색채를 일부러 드러내야 성공한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쓰는가이다. 즉 얼마나 소설이 잘 만들어졌는가의 여부이다. 종교를 드러내 놓고 다루었느냐와 무관하게 잘 쓴 소설은, 즉 감동적인 소설은 독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소설 쓰기의 기본 원칙이 로빈슨의 삼부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를 드러낸다고 교회 목사의 설교처럼 쓰거나 간증 기록처럼 쓴다면 그것은 종교적 교조주의(dogmatism)에 문학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로빈슨의 소설은 목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전체적 주제와 분위기가 신성의 진리(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의 창시자인 캘빈의 사상)를 담고 있지만 설교를 하지 않고 간증하지 않으며 세속화된 세상을 악마 화하지도 않으며 전도를 하지도 않는다.
로빈슨의 소설은 소위 대중적인 인기나 유행의 축과는 정반대에 있고, 흔히 베스트셀러에 경도된 트렌드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경직되고 천편일률적인 종교소설은 독자에게 외면받지만 로빈슨의 소설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소설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관습적 사고, 반복적 일상에서 나오는 그럴 것이라는 가정에 도전하는 예술형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빈슨은 탁월한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공공연히 종교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 읽어보자.
“비가 퍼붓고 나자 태양이 눈부시게 떠올랐지. 나무들이 찬란히 빛났고 축축하게 젖어있었어. 내 생각엔 아마도 어떤 충동이나 순전한 환희 때문인 것 같은데, 사내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당겼지. 영롱하게 빛나는 빗물이 우두둑 두 사람 위로 떨어져 내렸단다. 그들은 크게 웃으며 달려가기 시작했어. 여자는 머리카락과 원피스를 흔들며 물을 털어내었는데, 그 몸짓이 어쩐지 약간 성이 난 듯했지만 사실 그녀는 화가 난 게 아니었어. 그들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단다.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 같았어. 지금 왜 그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구나. 다만 아마도 그런 순간에는 물이 무엇보다 축복을 위한 것이고 야채를 기르거나 세수하는 건 둘째라는 사실을 믿기 쉬워지는 것 같구나. 그런 순간들에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혹성은 참 흥미로운 곳이란다. 네가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지.”
어느 날 아침 교회로 가는 길목에서 존 애임즈가 목격한 한 커플을 떠올리며 아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 물이 먹거리나 위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커플의 유쾌한 모습과 사랑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존 애임즈의 사색은 세상 속의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문장 하나하나는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잘 어울릴 만큼 단순하면서도 자의식이 없는 커플의 모습을 닮아있다. 세상을 보는 애임즈의 순간적 통찰과 직관을 표현해주며 일상적 장면에서 신성을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예들이 로빈슨의 작가적 재능이 종교적 메시지와 잘 어우러져 독자에게 생의 순간에 담긴 영적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해 준다.
로빈슨의 소설은 현재 미국 사회에 팽배한 온갖 문화적 종교적 편협함에 대한 대응으로 읽을 수 있다. 미국의 주류문화에는 현재 종교와 종교적 사유가 부재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론조사나 기타 통계를 보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내세우는 비율은 언제나 높은 편이다. 물론 미국에는 기독교외에도 다양한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이 많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사유의 부재는 비단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종교적 어휘의 부재이다. 신앙심 여부와 무관하게 종교적 형이상학과 비유들은 매우 강력하며 진실하다. 특히 서양문화의 근간이 이러한 종교적 형상과 비유 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에서 이것이 매우 교조적이며 편협한 기독교의 제한적 모습과 혼동되어있다. 즉 풍부한 문화적 유산이 제도적 기독교의 체계 안에 제한되어있다. 게다가 유대 종교에 이어 무슬림에 이르는 종교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더욱 종교를 편협한 현실정치의 도구로만 여기도록 조장한다. 로빈슨의 소설은 이런 상황에서 종교적 사유를 위한 언어와 비유, 문학적 표현을 제공해준 것이다. 로빈슨 소설의 언어는 포용적이며, 울림이 강하고 기독교적 사유와 그 추상적 관념을 최상의 형태로 그려낸다.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인간적인 정신이 그의 소설에선 위엄과 영예를 얻도록 다루어지고 있다. 소설을 읽은 누구나 그것을 알게 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이라고 하면, 찰스 디킨스의 연재소설이 나올 때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런던의 독자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소설이 실린 잡지가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읽고는 다음 연재가 나올 때까지 목을 빼고 기다렸다고 한다. 마치 오늘날의 티브이 연속극을 기다리는 시청자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소설 독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티브이와 영화, 최근에는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영상물이 소설을 비롯한 문학 독자들을 흡수해간다고 한다. 이야기와 내러티브를 소비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설보다는 다채롭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영상물을 더 찾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찰스 디킨즈 독자들의 후손 자리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73세인 로빈슨은 여전히 은퇴하지 않는 작가이다. 최근에는 에세이집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The Givenness of Things)』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청교도 사상의 선조인 캘빈을 심도 있게 다룬다. 로빈슨은 캘빈을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인본주의의 전통에서 해석하면서 청교도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중적 이미지 이면의 청교도의 열린 마음과 즐길 줄 아는 태도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것으로 소개한다. 데뷔작 이후 두 번째 소설을 출간하기까지 20년간 소설가로서의 공백 기간 동안 로빈슨은 산문집을 여러 권 출간했다. 그녀의 산문집 중 『모국(Mother Country)』 는 뛰어난 고발문학의 예로 꼽힌다. 로빈슨의 산문은 소설가에 머물지 않고 산문작가 나아가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기독교도나 기독교 성직자라기보다는 종교 사상가라고 해도 좋을 로빈슨은 소설가로서 소설 쓰기의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면서 소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지성의 수준도 함께 높여주는 몇 안 되는 지적인 소설가이다.
로빈슨의 허구적 자아라고 해도 좋을 존 애임즈가 아들에게 종교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다음의 대목으로 이 글을 끝맺으려고 한다. 존 애임즈의 정의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종교의 의미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기성 종교들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나아가 과거에 종교가 담당했던 영혼의 탐색과 구원의 일을 이제 문학이, 특히 소설이 감당하고 있고 또 그래야 하며,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아닐지 조심스레 결론지어본다. 이 결론은 소설에서 종교를 다루느냐 마느냐라는 협소한 문제가 아니라, 애임즈가 말하는 종교의 자리에 소설을 대입할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종교란] 너에게 요구되고 또 네가 아마도 무시해버릴지 모를 것들이 기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란다.”
* 이 글은 모 문예지에 미국 문학 기획연재의 일부로 수록된 것으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부분 수정해서 여기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