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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Mar 17. 2019

알래스카에도 일상은 있다

어둠 속 스쿨버스

 8월이면 이미 해가 부쩍 짧아지고 때로는 눈이 오는 곳.

알래스카에 처음 살기 시작한 그 해 8월 말 함박눈이 내렸다. 그리고 곧 어둠이 들어섰다 - 거의 매일 해는 잘해봐야 두서너 시간 비출 뿐 그마저도 구름이 잔뜩 낀 날에는 햇살 한 줄 내리쬐지 않는 곳.


어둠이 꽉 들어찬 24시간을 살아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빛의 소중함, 아침이면 당연히 솟아오르는 해가 하루의 선물 같은 것임을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될 무렵이었다. 아침 8시인데도 마치 한밤중인듯한 바깥 풍경을 외면하다가 어느 날인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대기에 하얗게 덮인 눈길 위로 불빛이 깜박였다. 어둠을 밝히는 건 가로등만이 아니었다. 뭔가 큰 기계의 엔진 소리 같은 것이 척척, 거리는가 싶었는데 눈에 익은 노란 등교버스가 집 앞 거리에 서있었다. 어디에 있었나 싶게 가방을 메고 모자와 장갑 목도리와 겨울 장화를 신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 옆에, 또는 멀지 감치 떨어진 곳에는 엄마와 아빠들이 서있었다.


아직 밤이니까 일어나지 않아도 돼, 마치 몸속 세포들이 시계의 기계적 시간보다 해 뜨고 지는, 빛과 어둠의 자연적 사이클이 더 진실된 시간이라는 듯이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시간은  무시한 채 자꾸 자라고, 일어나지 말라고 몸을 내리누르는, 그렇게 아침을 잃어가는 겨울날 여전히 세상의 어느 곳이든 평일 아침이면 으례 그렇듯이 이곳의 아이들도 등교를 하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 아이들이 등교하기 위해 대략 몇 시쯤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겨 나왔을지를 상상했다. 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그들의 부모는 몇 시쯤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커피를 끓였을지도 상상했다.


이곳에 산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아침 등교시간에 눈을 떠본 적이 없었다. 늘 캄캄한 아침에 눌려있었다. 시계는 아침인데 밖은 밤인 그 이상한 시간 침대 맡 노란 불빛은 더더욱 잠을 불러왔었다. 그러니, 그날 아침의 어둠 속에서 발견한 스쿨버스와 아이들은 새삼스러운 풍경이었다. 아, 여기도 일상이 진행되고 있었지, 하는 뒤늦은 깨달음.


곧이어 일상의 신기함은 불가피함을 경험할 때의 아득함으로 바뀌었다. 어디에서도 어느 때에도 이 지구 상의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등교를 하고 있다는 당연한 일상과의 낯선 마주침. 그건 어떤 불가피한 삶의 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과 통했다.


아침이면 일어나고 저녁이면 귀가해서 씻고 저녁식사를 한 뒤 한두 시간 보내다 잠자리에 들고 다시 아침이면 정해진 곳으로, 학교와 직장으로 나가는, 그 일상생활의 사이클은 알래스카에서도 엄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아침이란 시계 속에만 있고 겨울이면 어둠이 지배하는 이곳인데도 말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활을 꾸려가는 것과는 다르다는 걸 이곳에 살다 보면 불현듯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알래스카에 대한 어떤 상상과 환상을 한다고 해도, 이 불가피하고 엄연하게 움직이는 일상생활의 바퀴가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알래스카의 툰드라와 빙하의 야생은  저 멀리서 거친 자연의 모습으로, 인간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비인간적 힘으로 버티고 있지만, 인간은 일상의 이름으로 그 야생을 버텨내고 있다.


그날 아침 어둠 속 스쿨버스의 에피파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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