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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Apr 05. 2019

너와 나 -가끔은 아주 낯선 '사이'

너와 나의 정체성에 담긴 비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노르망디의 소도시 한 해변가에서 시작된다. 

연인 장 마르크보다 하루 먼저 호텔에 도착한 샹탈은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해변 가를 거닌다.


 같은 시간 장 마르크는 병석의 친구를 방문한다. 병들어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에 우울해진 장 마르크는 충동적으로 예정보다 일찍 샹탈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한다. 


이후 이 소설은 장 마르크가 샹탈에게 가짜 연애편지를 쓰게 되고 그로 인해 두 연인 사이에 복잡한 감정과 오해가 쌓이는 과정을 서술한다. 


소설의 원제인 “아이덴티티”는 소설에서 ‘정체’와 ‘정체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변주된다. 연애편지를 보낸 사람의 정체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샹탈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한편 장 마르크가 사랑하는 연인의 정체성에 관해 겪게 되는 곤혹스러운 경험들이 그로 하여금 일련의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노르망디 해변가에 도착한 장 마르크는 샹탈을 찾아다니다가 샹탈이라고 여긴 한 여인이 자신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는 샹탈처럼 보인 여인에게서 “늙고 못생기고 딱할 정도로 남”인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대목에서 사용된 동사는 존재를 의미하는 ‘이다(be)’ 가 아니라 ‘되다(become)’이다(여기서 사용한 소설 텍스트는 1997년에 하퍼콜린스에서 출간된 린다 애셔의 영역본이다). 그 낯선 여인이 “남이었다”라고 하는 대신 “남이 되었다”로 서술된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샹탈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은 늙고 못생겼고 딱할 정도로 남이 되었다”. 


  여기서 ‘되었다’는 동사는 이 상황의 모호함을 가중시킨다. 장 마르크가 익명의 여성을 샹탈로 착각했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여성이 샹탈인데 그 순간만큼 장 마르크가 몰라볼 정도로 샹탈이 낯설어 보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앞선 장면에서 묘사된 대로 샹탈은 당시 그 해안가에 있었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샹탈과 장 마르크가 호텔방에서 마침내 재회했을 때 장 마르크는 막 잠에서 깬 샹탈이 “완전히 변했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샹탈은 장 마르크에게 놀랍게도 자신이 나이 들어서 남자들이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전체적 이야기의 흐름과 소설의 주제에 충실하게 읽는다면 장 마르크와 샹탈은 각기 시간차를 두고 도착한 낯선 해변가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 가족, 각별한 친구나 동료를 어느 순간 알아보지 못하는 경험은 일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종 일어난다. 착각이나 실수로 상대를 못 알아보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아는데도 때로는 낯설게 여겨지거나 진정 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때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흔치 않아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낯 섬의 경험(프로이트식 표현으로는 낯선 친숙함 Uncanny이다)은 당연한 듯 한 서로의 정체 혹은 정체성이 실제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체험적 인식을 담고 있다. 


나는 나이지만 때로는 내가 나인지 확실하지 않고 또 타인에게 보이는 나도 예전의 나와 달라 보이기도 한다. 혹시 오늘 “너 왜 그래?”, “너 오늘 좀 달라 보여”라는 말을 당신이 듣게 된다면 당신의 ‘나’가 지금 당신에게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확인해보라.

   

  정체성은 ‘나’라는 인식인 동시에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성장기를 거치면서 누구나 이 ‘나’라는 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도록 기대받는다. 정체성을 갖는 것은 자아의 입장에서 뿐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필수적이다. 


타인을 만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한다. 그의 정체는 성별, 나이, 국적, 학력, 가족 배경 등의 생물학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제반 요건들로 구성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식별되지 않은 상대는 이상하고 불편하며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장 마르크와 샹탈의 이야기처럼 어제까지 낯익고 나와 내밀한 관계를 맺던 상대가 내가 알고 있던 그의 정체성과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은 얼마나 기이하며 불안한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정체성의 공식에 나 자신과 타인을 맞추어 살고 있다.  


정신분석이론을 위시한 현대철학 및 이론은 ‘나’라는 인식이 어떤 시기를 거치고 나면 깔끔하게 구성되는 의식이나 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나’라는 정체성에는 타자와 맞서는 다양한 관계들, 또 과정으로서의 시간성을 띠며 그에 따른 변화와 반복이라는 요소들이 작동한다. 


정체성과 자기 동일화라는 문제 설정은 나라는 존재와 의식은 ‘타자’를 동일자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에세이 「동일화」에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서 동일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유대에 대한 최초의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안정되고 깔끔한 ‘나’란 어쩌면 불가능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 랭보는 “나는 타자”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어 원문 "Je est un autre" 에는 주어와 동사 일치를 파격적으로 무시하며 ‘나’에 3인칭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배반과 불복종의 전율을 담고 있다. 

  

스마트폰 이용자가 늘어나고 소셜 네트워크와 유튜브 등의 플랫폼을 통해 확산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고전적 질문은 자기 노출과 현시의 무대 뒤에 어른거린다. “나는 나”라고 외치는 그 무수한 셀피 속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믿는 그 ‘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낯선 이미지일 뿐인가. 셀피를 찍는 ‘나’와 찍히는 ‘나’, 셀피 문화 자체가 ‘나’의 분리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또 이처럼 증식되는 ‘나’들은 각각의 ‘나’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지. 


지젝을 위시한 라깡주의 정신분석 이론가들은 단지 차이를 인정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관용하고 수용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의 정치 등 미국과 서유럽의 다원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정치적 기획이 현실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번번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노정된 모순과 역설을 탐색하지 않고는 차이의 문제는 손쉽게 무지개 색으로 칠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지젝은 정신분석의 목적이 ‘주체의 결핍’을 겪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조금 친숙한 표현으로 이것을 풀어 보면 주체 내부의 상처와 마주하기, 미완성의 나, 실패가 불가피한 ‘나’를 만나는 것이다. 분석은 증상을 해소하거나 치료하지 않는다. 트라우마, 혹은 상처는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분석은 치유의 과정일 뿐이다.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다. 주체는 세상에 던져진 그 순간부터 상처 입고 실패하게 되어있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라고 개념화된 사회질서 속으로 진입해서 사회화를 거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주체는 사회적 정체성이라는 틀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맞추어야 한다. 개별 주체에게 주어진 ‘하나뿐인 인생’은 이 과정에서 입은 상처와 실패를 치유해가는 여정이다.   


 정체성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한 일종의 가면과도 같은 것이라면, 주체란 그 가면 뒤의 ‘나’라는 어떤 실체이며, 그 실체의 본질은 ‘틈’이다. 이 주체의 틈으로부터 지젝이 개념화한 ‘윤리적 행위’가 빛을 발하고 나온다.  정신분석이론의 핵심은 상징질서에 균열을 내는 행위자는 다름 아닌 주체라는 것, 쉽게 말하면 중요한 것은 사람이자 개개인으로서의 우리라는 것이다. 


지젝은 주체의 윤리적 행위에 가해지는 궁극적인 배신은 어떤 형태의 악행이 아니라, 기적과도 같은 윤리적 행위가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며 자신을 상징질서의 유한한 감옥에 갇힌 채 근근이 버티고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로 국한시켜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네가 나를 낯설어하는 순간, 내가 '나'인 것이 불편하고 생경해질 때, '나'라는 주체 안의 틈새가 벌어진다. 그것은 소외이며 결핍이자 결여이며, 서늘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컴컴한 심연이나 빙하의 크레바스처럼 차디찬 공간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주체가 완결되어있지 않다는 것, 내가 완전히 내가 될 수 없다는 그 진실에서부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기적은 종교의 소유물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기적은 일어난다. 이를 지젝은 평상시 대로라면 전혀 선행을 할 것 같지 않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선을 행하고 나서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령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가 대표적 예이고, 영화 <피아니스트>의 배경이 된 실제 나치 장교의 선택이 그것이며,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 미디어물에서 한 예를 고르자면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이 죽는 장면이다. 그녀는 트럭이 달려오지만 자신의 차를 피하지 않는다. 자신이 피하면 유치원 아이들이 다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은탁은 내가 미첬나보다 나 뭐 하는 거야 지금, 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렇게 기적은 만들어진다. 의식적인 선행이 아니라 무의식적이며 충동적으로, 순간의 결단으로. 드라마에선 이걸 희생이라고 불렀지만, 정신분석에선 무의식적 윤리이다. 우리, 너와 나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 이 글은 역자 서문으로 썼던 글 중 쿤데라의 소설과 지젝의 윤리에 관한 부분을 일부 수정하고 내용을 보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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