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 본래면목 - 이름, 내 검의 본모습

by 메아리

오랫동안 함부로 베어내고 찌르며

이젠 주방칼만도 못하지만

여전히 적을 베고 다니는

닳고 무뎌진 나의 검, 이름



문득 적 없이 고요한 시간에

녹을 벗겨내고 갈아내어,

다시 빛을 내보았습니다.

저런 뜻이었을 줄 주인인 저도 몰라

이름에게 미안해졌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갈아내어 뜻만 조금 더 캐내었지만

녹슨 글자들을 살짝 갈아보았더니 빛이 났습니다.

내 심장의 일부분은

새벽의 어둑하지만 붉은

미명微明이 스며들었습니다.



내 검, 이름을 한참 썼을 때를 생각합니다.

갈아놓지도 않은 이름이 잘 베어 지지 않는다고 던지고

다른 것들이 더 잘 날카롭다고 내팽개쳤습니다.

그러다 필요할 때는 우악스럽게 들어

유려한 검술이 아닌 패도적인 도끼질만 했습니다.

그렇게 쓰일 것이 아닌데도.



생각을 더 돌려, 이름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를 생각합니다.

사상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겉멋만 들어 휘둘렀지만

숙명(宿命)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검이 부러질 것 같았는데

갈아내어 매끈해지며 살며시 빛나는 미명(微明)을 보자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명(未命)임을 알게 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이제야 안 것에 대해

사죄하는 만큼 정성스레 숫돌질을 할 때

나의, 이름은 차분한 소리로 검명(劍鳴)하고

무명천으로 닦아낸 이름을 세우자

뜰 앞의 잣나무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8.18)<연작, 이름 1 - 본래 면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