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하나의 성전이다(2)

태극권을 시작하고, 지속하게 된 이유

by 메아리

물리치료과에 다니던 시절, 저는 태극권을 처음 만났습니다. 단순한 무술이라기보다 움직이는 명상이라는 설명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제 몸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호흡의 리듬을 되찾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수련을 거듭할수록 몸이 “부분”이 아니라 “하나”로 움직일 때 비로소 힘이 빠지고 균형이 살아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어깨만, 팔꿈치만, 무릎만 따로 움직이던 것이 발·골반·흉곽·머리가 한 줄기 흐름으로 이어지는 감각으로 넓어졌습니다. 밀면 흘려보내고, 당기면 비워내는 법. 억지로 세우지 않아도 정렬이 스스로 자리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감각은 실습 병동에서도 제 손을 이끌었습니다. 뇌졸중으로 왼팔을 거의 쓰지 못하던 환자분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와 같았습니다. 기둥에 달린 스탠딩 프레임에 팔을 살짝 걸치고, 바닥의 링을 집어 들어 위쪽에 가지처럼 가로로 뻗은 작은 막대기에 끼우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각도가 맞지 않아 여러 번 헛손질을 하셨습니다. 저는 태극권에서 익힌 ‘걸고 기울이는’ 원리를 떠올리며 발의 방향, 골반의 기울기, 흉곽의 회전, 시선의 높이를 차례로 맞춰 드렸습니다. “손목, 팔꿈치, 어깨 이만큼만 살짝 구부려 보실래요?” 자세가 맞는 순간, 환자분은 “어?” 하며 놀라운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얼굴이 편안해졌고, 링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막대기에 걸렸습니다. 억지로 팔을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경로를 열어 주었을 뿐이었던 같습니다.



그날 이후 제 안에는 두 갈래의 관점이 열렸습니다. 하나는 휴리스틱한 시점이었습니다. 태극권의 원리를 임상 동작에 직관적으로 대입해, 환자에게 가장 적은 힘으로 가장 안전한 경로를 찾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로보틱스의 시점이었습니다. 만약 이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기술한다면 토크·관성·제약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모델링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이었습니다. 두 길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했지만, 그 질문들 덕분에 임상에서 저는 “자세를 교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로를 열어 주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근육 하나하나를 단속하는 대신, 몸의 지능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조건을 설계하는 쪽으로 관심이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태극권은 더 이상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물리치료라는 커리큘럼과 함께, 매일의 몸을 다듬는 두 번째 커리큘럼이 되었습니다. 수련은 제 몸을, 임상은 타인의 몸을 비췄습니다. 두 거울이 마주 서 있을 때, 저는 몸을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성전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기둥이 기둥을 떠받치듯, 작은 각도와 호흡 하나가 전신을 지탱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분명해졌습니다. 몸이 풀리면 마음도 풀리고, 몸이 굳으면 마음도 굳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말입니다.



이제 제 관심은 자연스레 한 지점으로 모였습니다. 몸을 통해 마음을 돌보는 일. 이것은 물리치료와 태극권이 함께 일깨워 준 가장 큰 가르침이었고, 제가 앞으로 계속 탐구해야 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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