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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Apr 05. 2022

허무의 미학

영화 <하나비>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에는 폭력의 미학이라는 수식이 붙는데,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원래 의미란 게 그럴싸한 구라와 같아서 부여하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지만, 가학의 미학은 아름다운 폭력처럼 모순적인 단어로 들린다. 뭐 그럼 둘 중에 하나인 셈이다. 그의 미학을 이해할 정도로 수준이 높지 않거나, 내 미학에는 가학이 없거나. 후자에 좀 더 넉넉하게 값을 매기고 싶다.     


미학은 잘 모르겠지만, 기 선생님의 영화에 등장하는 의외성을 좋아한다. 물론 뇌를 번쩍이게 하는 서사적 반전은 없다. 다만 그의 영화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의 의외성을 좋아한다. 법과 도덕의 경계를 무시하고 휘청거리는 주인공들의 취미 총질 아니면 칼질이라는 게 참 아쉽지만, 동시에 그들은 사포의 뒷면처럼 그냥 흘겨 넘길 수 없는 고유한 심성의 결을 갖고 있다.     


영화 하나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인 형사 니시는 죽어가는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은행을 털고, 아픈 아내를 위해서 슬픈 낯을 감추고 오히려 그녀를 웃게 하려고 애쓴다. 불의의 사고로 평생 휠체어를 타게 된 절친 동료가 행여나 화가란 꿈을 놓고 살까 봐 늘 물감과 스케치북을 살뜰히 보내주고, 죽은 부하의 아내를 가끔 찾아가서 보살펴준다. 적을 향한 총질에는 거침이 없지만,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없이 다정하다. 니시는 말로 하는 싸구려 위로가 아닌, 마음으로 전하는 토닥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불꽃을 뜻하는 하나비는 하나(꽃)와 비(불)의 합성어인데, 이 영화에서는 삶과 죽음으로 대변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크게 세 가지다.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죽음을 실행하고 싶거나, 죽고 싶을 만큼 괴롭거나. 식당에서는 매운맛의 단계를 고를 수 있지만, 삶에서 죽음의 단계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초콜릿 상자 속 초콜릿처럼 어떤 고통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총구의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는 죽음의 유형처럼, 각자의 선택에 따라 고통의 방향이 달라진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인물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찰나의 순간 사라지는 것. 삶과 죽음은 불꽃놀이처럼 아주 강렬한 찰나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떼어낼 수 없다. 삶은 죽음을 위한 여정이며, 멀리 돌아갈지라도 삶의 결과는 죽음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허무한 결말을 알고 보는 드라마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텅 빈 하늘 속에서 울리는 두 발의 총성은 긴 여운을 남겼다. 허무한 삶에 대한 독백처럼. 가학의 미학이 아니라 허무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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