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바르셀로나의 홈경기장
나는 여느 여자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으로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 축구도 마찬가지였다. 월드컵도 예선은커녕 본선도 경기를 챙겨보는 일이 없고, 축구 선수 이름으로 열 손가락을 꼽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니 <캄프 누>라는 곳은 여행계획에서 고려조차 되어 보지 못 하고 일찌감치 제외되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언제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바르셀로나를 떠나기 전날 저녁, 아쉬운 마음에 바르셀로나를 다시 둘러보기 위해 투어버스를 탔다. 그런데 투어버스가 루트의 절반도 돌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엄청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건조해서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고? 진짜 장대비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투어버스들이 그렇듯 우리가 탄 투어버스의 2층도 지붕이 없었다. 투어버스 2층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재빨리 천막을 치긴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천막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워낙 허술해서 천막은 언제라도 내려앉기 일보직전이었다. 게다가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있어서 비가 그 틈으로 어찌나 세차게 들이치는지 비가 수평으로 내리는 것 같았다. 모두들 홀딱 젖어서 1층으로 피신했다.
친구와 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1층에서 창밖 구경은 엄두도 못 낸 채 이리저리 치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 결국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산도 없어서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정거장 이름은 <캄프 누>.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내리기에 호기심에 창밖을 보았더니 경기장 같은 것이 보였다. 순간, 내리고 싶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가려하는 곳이니 뭔가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때마침 비도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난 뾰로통한 친구를 설득해 버스에서 내렸다.
경기가 있다면 관람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다행히 경기가 없는 날에도 경기장과 라커룸,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는 투어 입장권이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있어야 느끼는 것도 있는 법. 아무리 유럽에서 수용인원이 10만여 명에 달하는 가장 큰 축구장이라고는 해도, 유명한 선수들이 쓰는 라커룸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커다란 경기장, 단순한 라커룸일 뿐이었다.
결국 대충 성의 없이 <캄프 누> 투어를 마치고 나온 우리가 향한 곳은 엄청난 규모의 기념품점이었다. 그곳에는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자주 보았던 파랑과 빨강 줄무늬의 유니폼, 즉 블라우그라나(Blaugrana, FC 바로셀로나 유니폼 애칭)가 가득했다. 블라우그라나는 푸른색(Blau)과 진홍색(Grana) 줄무늬인 FC 바르셀로나 유니폼의 까딸루냐어 명칭이다.
까딸루냐는 바르셀로나(Barcelona), 지로나(Gerona), 예이다(Lleida), 타라고나(Tarragona) 4개 주(州)로 이루어진 이베리아 반도(Península ibérica) 북동부를 말한다. 까딸루냐에서는 어디를 가든 고개만 돌리면 노란색 바탕에 붉은색 네 줄이 가로로 그려져 있는 깃발, 세녜라(senyera)를 볼 수 있다.
중세 아라곤 왕국의 왕의 표식이었던 세녜라는 까딸루냐의 깃발이다. 세녜라는 관공서는 물론이고, 상점 입구, 레스토랑의 벽면, 아파트의 발코니에까지도 걸려 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가끔 세녜라와 함께 FC 바르셀로나의 깃발도 자주 눈에 띈다.
처음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는 세녜라가 스페인 국기인 줄 알았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참 애국심이 강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완벽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애국심이 강하다. 단지, 그들이 사랑하는 나라가 스페인이 아니라 까딸루냐일 뿐이다.
스페인은 여러 소왕국으로 있다가 아라곤(Aragon, 스페인 북동부)의 페르난도 2세와 가스띠야(Castilla, 스페인 중부)의 이사벨 여왕이 결혼하면서 통일이 이루어졌다. 까딸루냐는 왕위계승 전쟁에서 펠리페 5세의 반대편에 섰다가 1714년 9월 11일, 스페인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항복하면서 완벽하게 스페인에 병합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독립운동을 하냐고? 물론이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9월 11일을 ‘까딸루냐 독립염원의 날’로 정하고 국경일로 선포할 정도이다.
스페인은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 역사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각 주의 자치권이 강한 편이고, 까딸루냐, 갈리시아(Galicia,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Vasco, 스페인 북부)는 고유 공식 언어까지 갖고 있다. 그런데도 까딸루냐는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독립을 외친다.
처음 스페인에 왔을 때, 엘 클라시코(El Clásico, ‘전통의 경기’라는 뜻으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더비 경기를 말한다)가 열리는 날에는 경기장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혹시라도 광분한 팬들이 벌인 난투극에 휘말리면 위험하다고 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실제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 오죽하면 엘 클라시코의 연관 검색어에 ‘난투극’이 같이 뜰까?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다니다간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들었다.
까딸루냐인들은 단순히 독립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마드리드를 포함한 까스띠야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어떤 나라든 지역감정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전라도와 경상도도 그렇고 미국의 남부와 북부, 동부와 서부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지역감정에 비교하기엔 그들은 너무 심각하다.
그들은 거의 적에 가깝다. 심지어 세녜랴도 까스띠야군과 싸우던 까딸루냐 왕이 죽으면서 적장이 입고 있던 황금색 갑옷에 자신의 피 묻은 손으로 4개의 줄을 그은 데서 유래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까스띠야와 까딸루냐는 서로를 적으로 생각했을까?
일단 통일 이후, 까스띠야에 비해 까딸루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면서 해묵은 감정이 폭발한다.
까딸루냐는 섬유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일찌감치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 지금도 까딸루냐는 스페인 경제생산의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부는 지주와 귀족, 교회를 위해 노동자들을 희생하는 정책만을 강요했다. 결국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까딸루냐 지방의 노동자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이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 사회혁명이 되어 스페인 전국에 퍼져나갔다. 이는 곧 국왕을 중심으로 한 까스띠야 지방과 공화정을 원하는 까딸루냐 지방의 대결로 번졌다. 지금도 까딸루냐 사람들은 왕정 폐지를 요구한다.
마침내 1931년 총선거에서 왕정을 폐지하고, 1936년 총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며 까딸루냐는 승리한다. 하지만 얼마 후, 까스띠야 지방의 세력을 등에 업은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까딸루냐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정부군을 도와 반란군에 대항했다.
전쟁은 스페인 전역으로 번져갔다. 3년의 시간 동안 까딸루냐도, 까스띠야도 피로 물들어갔다. 전 세계의 지성들이 시민이 선택한 정부를 돕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언제나 정의가 승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프랑코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공화국 정부군을 무찌르고 정권을 잡게 된다.
그리고 까딸루냐에 대한 프랑코의 탄압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3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까딸루냐어를 사용하는 것도 까딸루냐 깃발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60여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망명했다. 물론 피카소, 카잘스(Pablo Casals, 스페인의 첼로 연주가, 1876~1973)를 포함한 유명인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이 선택한 나라는 프랑코가 정복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들의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계속 저항했다. 당시 금지된 까딸루냐 깃발 대신 사람들이 사용한 것이 블라우그라나로 된 깃발이었다. 그래서 FC 바르셀로나는 오랫동안 유니폼에 스폰서 명을 넣지 않았다. 연간 수백 억 원의 스폰서 제의가 들어와도 거절했던 이유는 블라우그라나가 그들의 국기였고, 그들의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왕당파와 프랑코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마크에도 ‘왕관’을 사용하고, ‘레알(왕립)’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는 그렇게 서로의 적이 되었다.
아마 엘 클라시코는 까딸루냐인들에게 기관총 대신 축구공으로 벌이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FC 바르셀로나가 골을 넣을 때마다 구겨지는 프랑코의 얼굴을 보며 까딸루냐인들은 환호했다. 그랬기에 FC 바르셀로나는 시민들의 힘만으로 운영되는 구단이 될 수 있었다.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물으면 까딸루냐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까딸루냐어로만 방송하는 채널을 보고, 전국에 방송되는 TV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까딸루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그들이 베란다에 내건 까딸루냐 깃발과 블라우그라나 깃발은 그들의 나라에 대한 사랑이었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다.
언제나 희생자의 감정은 더 격렬하고,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보다는 FC 바르셀로나의 팬들이 더 열광적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Santiago Bernabéu Stadium)>에도 경기장 투어와 기념품점이 있지만 그 열기는 사뭇 다르다.
<캄프 누>의 쇼핑몰은 한눈에도 여느 쇼핑몰과는 달리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많았다. 지루한 듯이 앉아 쉬고 있는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눈을 빛내며 쇼핑몰 안을 휘젓고 다녔다. 여느 쇼핑몰과는 완벽하게 정반대인 그 색다른 상황이 신기하고 우스웠다.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수많은 남자들의 쇼핑에 대한 열망이 어찌나 강하게 느껴지던지, 그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친구는 갑자기 조카들에게 줄 선물로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사 갈 결심을 했다. 친구가 유니폼을 고르는 동안 나는 축구공, 물병, 깃발 등의 다양한 기념품을 둘러보며 어슬렁거렸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진열대의 수많은 유니폼을 보고 있자니 친구 한 명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가 스페인 여행을 간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녀석은 기념품으로 FC 바로셀로나 소속의 세계적인 골잡이인 메시(Lionel Messi, 아르헨티나 출신의 축구선수, 1987〜)의 유니폼을 사다 달라고 졸랐었다. 축구팬들이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난 그날 메시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하지만 사이즈가 맞을지도 걱정이었고, 다른 친구에게 주지 않는 기념품을 그 아이에게만 사다줄 수 없었기에, 난 안 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래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스페인에 도착하고서도 녀석은 메신저를 이용해 끈질기게 메시를 부르짖고 있었다.
진열된 유니폼에는 선수들의 이름과 등번호가 새겨져 있었는데 과반수 이상이 메시의 이름이었다. 정말 유명한 선수이긴 한 모양이군. 그렇게 소원이라는데 한 벌 사다 줘야겠다, 라는 결심에 진열대로 다가갔다. 대충 사이즈를 골라들고 가격표를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나왔다. 나는 유니폼을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친구에 대한 나의 얕은 우정은 슬프게도 돈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나는 유니폼 대신 메시의 유니폼으로 가득한 진열대 사진을 예쁘게 찍어서 친구에게 전송해주었다. 친구는 약이 잔뜩 올라서 밤새도록 메신저로 날 괴롭혔다. 물론 나는 메신저 도착 알림음을 무음으로 설정한 뒤 푹 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