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할머니와 나 (5)

by 박진영



우연찮게 할머니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가 나오는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더 생각해 보니 사실 나는 할머니와 인연이 깊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했다. 적어도 사람들이 할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하는 친할머니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할아버지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 죽어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모두 막내인 탓이다. 할머니에 대한 옅은 기억조차도 유년에 머물러서 흐린 잔상만 있을 뿐 거기에서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었는지, 할머니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다. 그나마 친할머니 정도만 조금씩 기억이 있지만, 진도에 사셨던 탓에 명절에 잠깐 뵀던 것 말고는 기억이 없다. 할머니와 이렇다 할 대화 같은 걸 해본 기억도 없다. 그 시절의 내가 할머니와 대화를 하려고 했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한 번씩 할머니가 나에게 뭐라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 기억조차 희미하다. 할머니는 구십 살에 돌아가셨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있었던 적이 없고(그전에 모두 죽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반추할만한 기억이 없다.(만난 일이 적고, 대화해 본 적도 없으니)


할머니와의 인연이 깊다고 생각한 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 때문이다. 나는 업무 특성상 하루에 한 번씩 각 지에 있는 할머니들을 1:1로 만난다. 가끔은 수백 명의 할머니들과 마주하는 일도 있다. 그전에는 구청에서 어르신들 자서전 출판 사업을 하느라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만났다. 최근엔 518 당시 활동과 트라우마가 있는 장 모 작가와 만나 협업해 전시를 하기도 했다.(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손녀가 있었으니 그는 할아버지가 맞다) 대학원생 시절에 고인돌을 소재로 동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고창의 할아버지와 만나 작업을 한 적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할머니(할아버지)들과 인연이 깊다고 생각한 건 나의 친족이 아닌 선에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다. 내가 할머니와의 인연이 옅다고 생각한 건 내 친족인 할머니들과는 기억도, 나눈 대화도, 감상도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로는 그들에 대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 이유로는 그들에 대해 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에 대해 쓸 수는 있을 테지만, 과연 내가 할머니에 대해 잘 아는가? 하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 초, 중, 고를 함께 나온 친구를 만났다. 일이나 동선이 겹치지 않았던 탓에 자주 만나거나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일 년에 한 번, 새해에 ‘새해 복 많이 받아라’하고 한 마디씩만 주고받으며 생존신고를 해왔던 친구였다. 그렇다고 친하지 않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꺼낼 이야기도 없고, 만나야 할 이유가 없어서 연락도 안 하고 만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친하다는 걸 알았다. 그 정도의 관계가 나는 편했다. 하여튼 올 초에도 우리는 그 정도의 연락을 했었는데, 문득 ‘얘가 지금 만나고 있는 애랑 십 년쯤 되었고, 남자 쪽은 몰라도 여자 쪽이라고 한다면 사회통념상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텐데, 얘가 결혼을 했나 안 했나, 왜 소식이 없나.’하는 생각이 들어 결혼은 언제 하냐고 넌지시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이놈이 올해 오월에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냐, 하니 연락을 평소에 하던 사이가 아니라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내기 미안했단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는 거의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긴 해서 납득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는 보내야 하지 않겠냐며 날짜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게 이제 이번 주 토요일이다. 이달 초에 만나 밥도 먹었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굳이 찾자면 피부에 노화가 진행되었다는 건데, 소위 말하는 영혼? 내면? 이런 건 고등학교 때 그대로였고 그냥 거기에 사회생활을 하며 생긴 경험치 정도가 더해져 대화의 소재가 조금 바뀌었다 뿐이지 모두 그대로였다.


올해 초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사람의 내면은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춘다. 내면이 노화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면, 성격, 굳이 따지자면 영혼이랄 것에 살면서 생기는 경험치만 쌓일 뿐 그 작동 원리나 형태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거기에서 몸이 노화하고, 목소리가 좀 중후해지고, 나이와 위치가 있으니 응당 해야할 젠체를 하는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40을 먹든 60을 먹든, 80을 먹든 다른 게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집은 더 세질 수 있지만 웬만한 사람은 이십 대 중반의 성격에 머문다. 그냥 거기에서 나이만 먹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 건, 겉으로는 나이가 많아 보여도 생각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 성격이 스물 중반 정도의 사람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늙었다, 고 생각하는 건 아마 그 시대의 정서가 달랐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X세대의 감각은 그 시절에는 새로운 것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감각을 가지고 40대가 되고, 60대가 될 것이다. 그 감각, 정서가 변하지 않았더라도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까 그들의 정서는 늙은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MZ세대의 감각 또한 지금은 새로운 것일지 몰라도, 20년 후, 40년 후가 되면 고루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점은, 그 세대의 성격, 내면이 크게 변하지 않은 채로 세월이 흘러가고, 세월이 흘러간 탓에 그들이 늙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들은 하나도 늙지 않았고, 그대로라는 것이다. 외적으로 보았을 때 몸(외부)이 늙고 변했을 뿐, 성격(내부)은 스무 살 언저리의 어느쯤에서 성장을 멈춰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 멈춘 시기가 더 이전일 수도 있고, 조금이나마 성장해 조금 더 이후일 수도 있다. 다만 조금이나마 성장을 한 사람들은 정말 각고의 노력을 했거나 삶을 뒤흔들만한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또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앞서 있었던 행위 혹은 사건을 겪지 않으면 그대로 멈춘다. 그러니까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내면 안에 어떤 영혼이 있다면, 그것이 일정 부분 성장을 마쳤다면 그것은 몸이 늙어 스러지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만약 그 영혼이 죽을 수 있다면 그 영혼은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낡은 몸은 그대로겠지만, 변한다. 그 변모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또한 어느 시기에 성장을 멈춘 사람들이다. 외부는 늙었지만 그 내부까지 늙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된다. 다만 그 내부가, 어떤 시기를 지나와, 어쩌면 낯선 시공간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해 보는 건 가능할 것 같다. 몸은 시간을 따라 풍화되고 ‘이곳’에 왔지만, 영혼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며 풍화되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시대에 맞춰 변화하지도 못한 채,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한 사실이지만, 몸이 철저히 유물이라면, 영혼(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쓴다)은 철저히 관념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시대 또한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내가 그들의 시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삶 안에서 어떤 사건의 연속 밖에 있는 비경험세대일 뿐이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그들에 대해 내가 ‘쓸’ 수 있냐고 한다면 그러기 어렵겠지만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문학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면, (친애하는 나의 지도교수님은 광학도구,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써나가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에 대해 쓰겠다, 는 단순히 작은 욕구가 아니라 중요한 작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걸 내 일생의 목표로 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갈래일 뿐, 크게 봤을 때는 일생의 작업이 맞다. 대상이 계속 바뀔 뿐 나는 그런 작업들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할머니,라는 존재는 사실 나에게 그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존재다. 할머니의 형태 또한 사회와 시대가 바뀐 만큼 바뀌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과거에 가족 안에서 우리가 할머니를 만났다면, 우리는 사회에서 ‘할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또 숙고해보아야 한다. 이건 어쩌면 필연이기도 한 게, 우리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고 이후에 우리가 만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할아버지거나 할머니일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과 반목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인간의 절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반목하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내가 알고 만나온 수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 다만 나에게는 친족이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없다. 있었지만 이제는 없고, 대화해 본 적도, 또 대화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 엄마는 할머니가 되고 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고 있다. 위에서 내가 펼친 논리에 맞추자면 엄마와 아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이곳’에 있고, ‘저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시대는 그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다. 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노화는 대체로 모두에게 평등하며, 죽음이라는 사건을 제외한다면 시간은 대체로 연착륙한다. 물론 관념적으로 그 시간을 갑자기 뒤로 후퇴시키거나 멈추거나 앞당겨버리는 사건들이 우리 삶에는 있지만, 유물론의 세계에서는 우선 그렇다고 말해두고 싶다. 여하튼 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해보려 한 적이 있다고 자문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있느냐 하면, 오래 반추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화를 시작한다면, 그들에 대해 오래 숙고해 본다면 나는 어쩌면 할머니(할아버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나’를 이해하는 과정일 것이고, 미래의 ‘나’를 미리 생각해 보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말하려 해도 온전히 말할 수 없는 게 언어의 한계이겠지만, 쓰지 못한 말이 많다. 소설로 만들어 함께 읽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설과 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