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아침에 일어나면 홍차를 한 잔씩 한다. 새해가 되고나서부터 6시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였는데, 가끔 5시나 4시 30분에 일어나기도 한다. 일전에는 일찍 일어난다고 해서 바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책상에서 졸다가 다시 자기 일쑤였기 때문에 몇 번 시도했다가 굳이 하지 않았다. 근데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면 쉽게 다시 잠들지 않는다. 나이가 이제 서른하나라고, 생체리듬이 조금 바뀌었는지 아니면 작년 가을 무렵부터 먹기 시작한 콘서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중에 조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11시에 자려고 누우면 십 분 내에 잠든다. 긍정적인 변화인 것 같다.
다만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해서 바로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공복을 좀 유지하고 싶어서 밥을 바로 먹지는 않는다. 8시에 같이 사는 사람을 깨워서 아침을 먹고 10시쯤에는 운동을 가기 때문에 굳이 아침에 샤워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6시에 일어나면 공복에 씻지도 않은 상태로 두 시간 정도를 보낸다. 일곱 시부터는 책을 읽는다거나 하루 일정을 정리하고 뭔가 끄적이는 등 그래도 그럴듯한 것을 한다. 같이 사는 사람을 깨우기 전에 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6시에서 7시, 길면 5시에서 7시까지는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주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데, 유튜브는 봐도 봐도 시간만 사라지고 허무한 느낌이라 주로 게임을 한다. 프로스트펑크나 와우, 스타듀밸리 같은 것들인데 지금은 주로 와우를 한다. 한 시간 정도하고 깔끔하게 끄는 건 나 스스로 뿌듯한 일이다. 어른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른이 된 기분. 작년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이제 게임 그만해’라고 장난스럽게 얘기했었는데, 괜히 앙탈을 부린 적이 있었다. ‘어른이 돼도 내 맘대로 게임도 못하고!’ (뭐 그냥 그랬다…)
그래도 5시, 6시에 일어나려고 하는 건 7시에 일어나든 8시에 일어나든, 첫 한 시간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책을 펼치거나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난 사람이다. 혹은 독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이거나 위험한 사람이거나… 여튼.
다른 장점도 있는데, 업무 특성상 출근 시간이 들쭉날쭉이기 때문에 어떤 날은 재택이라 출근을 안 하고, 또 어떤 날은 멀리 운전을 해야 해서 8시에 출근하거나, 또 어떤 날은 가까운 곳이라서, 혹은 참관 일정이 늦은 시간이라서, 10시에 출발하거나 12시에 출발하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행사가 있어서 5시에 일어나야 하거나… 뭐 그런 일들의 반복인데 문제는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날들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겠지만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일정이 있으면 묘한 압박감이 사람을 짓누른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그냥 항상 6시에 일어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꽤 좋다. 특히 겨울에는 해가 늦게 떠서 해가 뜨는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다.
뭐랄까, 내가 다가오는 하루를 온전히 맞이하는 느낌. 닥쳐오는 하루를 내가 미리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
여튼 다시 홍차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아침에 좀 좋은 루틴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아침에 게임을 하는 건 일찍 일어날 동기를 주는 것이기도 해서 좋은 것 같지만(5시에 알림이 울렸는데, 눈을 뜨고 책상에 가면 일이 있는 것과, 아제로스와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건 좀 다르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잠시 쉬고 난 후에, 조금은 정처 없어지는 기분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생일 선물 같은 건 받기에 부담스럽기도 하고, 받으면 돌려줘야 할 것 같고, 나는 그런 걸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닌지라 카톡에 알림도 꺼놓고 아무에게도 생일을 알리지 않으려던 참이었다. (물론 그 계획은 동거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무너졌지만) 친동생은 그래도 생일을 기억하고 뭐 갖고 싶은 거 있는지 물었는데, 없다고 답했었다. 그러다 아, 홍차를 아침마다 마셔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동생에게 홍차 티팟을 하나 선물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찻잔을 두 개 샀고, 홍차에 대한 공부를 좀 했다.
지금까지 이론적으로 배운 건 이 정도다.
홍차가 어떤 것인지는 다들 알 것이고 그걸 설명하는 데에는 흥미가 없기 때문에 조금 건너뛰겠다. 가향 홍차를 제외하고 진짜 홍차(나는 이걸 진짜 홍차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 순수 홍차? 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아쌈과 다즐링, 실론이 그것이다.
아쌈은 몰트 한 맛이 나는, 뭐 인도 아쌈에서 키워지는 홍차다. 묵직하고 진한 맛이 난다고 한다. 내가 홍차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 립톤의 옐로라벨티였는데, 그거랑 맛이 비슷하더라. 지금은 트와이닝의 아쌈 잎차를 마시고 있다. 처음부터 너무 고급을 마시려 하면 돈도 돈이거니와 내가 그 맛을 온전히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가볍게 시작했다. 안 좋은 걸 마셔봐야 좋은 게 좋았던 걸 아는 것처럼, 아래에서부터 밟아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지금은 아쌈만 가지고 있다. 매일 아침 티팟에 1L 정도 우려서 절반은 보온병에, 절반은 찻잔에 따라서 마신다. 마시면 속이 따듯해진다. 머리에 카페인이 돈다.
두 번째는 다즐링인데, 이 다즐링은 아직 안 마셔봐서 모르겠지만 가향이 아님에도 꽃향이 난다고 한다. 아쌈이 좀 묵직하다면 다즐링은 좀 더 섬세하다고 한다. 다즐링은 아쌈처럼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수확 시기에 따라 네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봄과 초여름, 여름 장마철과 가을이다. 각각 퍼스트 플러시, 세컨드 플러시, 몬순 플러시, 오텀널 플러시라고 한다. 아까 꽃향기가 난다고 했는데, 그건 봄에 나온 찻잎이고, 가을에 나온 찻잎의 경우에는 견과류 향이 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 아직 안 마셔봤으니 모르겠지만. 여튼 조만간 퍼스트 플러시를 사서 마셔볼 예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론이다. 실론은 수확 시기보다는 제배 고도에 따라 구분된다고 한다. 저지대냐, 중간지대냐, 고지대냐에 따라 종류가 구분되고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아쌈과 다즐링, 실론 모두 인도의 지역 이름이다.
아쌈을 데일리로 두고, 도장 깨기처럼 계절이 흘러가는 것에 따라 다즐링을 마셔보고, 사이사이 실론도 도전해 볼 예정이다. 역시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가면서…
동거인은 나에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했다. 취미가 너무 고급이라는 것이다. 취미가 고급. 사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것보다야 싼 취미이지만 일전에는 칵테일을 취미로 했었다. 카페에 살다시피 했던 적도 있고. 일전에 누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매일 카페 커피 한잔에, 담배 한 갑이면 그것만 해도 매일 만원씩이라며 참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친구라고 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취미에 자주 빠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오랜 생각 끝에 그 이유는 다양한 이름을 가졌었는데, 최근에 드는 생각은 그게 내 수치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아비투스, 거기에서 나오는 내 자신의 움직임들이 간혹 부끄러운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게 더 심했다. 아니, 어렸을 때는 그런 수치심을 몰랐다고 해야겠다. 십대 후반을 지나면서 그런 수치심은 내 안에서 튀어나와 이십 대 시절 전반을 지배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니다. 조금의 부끄러움은 있어도 수치심까지는 없다. 어느 정도 극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일정 부분 인정하고 또 그런 내 속성들을 긍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고급 취미들에 관심을 갖는 건 역시 내가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근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이런 취미나 문화들을 도외시하든 거기에 심취하든 말하기에 따라 여전히 나는 거기에 묶여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욕구 정도로 포장을 해도 될 테지만, 누군가 나에게 ‘그건 니 아비투스 때문이야’라고 말해버리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포장을 해도 포장을 벗기려들면 그 안에 고졸 부모님과 농촌 사회에서 자란 ‘나’가 꿈틀거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와 나’라는 방식으로 여러 번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백화점과 나, 칵테일과 나, 같은 것들이다. 브런치에 적는 것들이 점점 두서 없어지는데 상관없다. 첫 글이 그렇듯, 나에게는 백지가 필요하고, 또 나 자신과의 대화의 장이 필요할 뿐이니까. 글이 길어질수록 타인은 읽으려는 시도를 잘하지 못할 테니 오히려 좋다. 그런데도 왜 누군가 볼 수 있는 플랫폼에 글을 쓰는가. 그냥 혼자 쓰고 지우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혼잣말도 소리내어 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