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
오늘도 유튜브에 '슬픈 음악'을 검색하면 나오는 수많은 플레이리스트들 중 하나를 재생합니다. 슬픈 노래들을 모아 듣는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바닥까지 내몰린 감정을 더욱 바닥으로 끌어내려 산산조각내는 효과가 있지요. 익숙한 노래 속에는 옛시절의 슬픔이 섞여있기 마련입니다. 그 슬픔이라는 것이, 특정 사건이나 대상에 관한 슬픔이라면 오히려 낫겠지만, 과거 어느 시간 속의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에 관한 슬픔이라면 도무지 치유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노래 가사나 멜로디가 주는 슬픔이 아니라, 노래에 얽힌 시간과 이야기가 문득 머리를 스칠 때의 그 공허함과 두려움이 고통스럽습니다.
내게 그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은 글을 쓰는 것뿐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마주하는 일입니다. 정확히는 나의 시간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나는 나의 글에 나의 시간을 담아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자 나의 글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흔 시간 앞둔 그 마지막 하굣길에 K는, 나를 언덕의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집앞에는 우리가 흔히 ‘절벽’이라 부르던 급경사면이 있었다. 평소에는 자동차들이 유유히 그곳을 오르내리다가도 눈 내리는 겨울이면 노끈에 걸쳐진 폐쇄 푯말이 두려워 되돌아가는 을씨년스러운 언덕길이었다. 11월. 그날은 한없이 방황하고 싶었다. 함께 하교하던 K는, 나를 절벽 아래로, 언덕의 반대편으로 끌고 가서, 불안감에 휩싸인 가냘픈 영혼에 이름 모를 생기를 툭 던져주고 길을 떠났다.
- "245번 게이트" 중에서
글쓰는 행위를 몇 개월 중단하였습니다. 글을 쓰면 내가 더 고통스러워질 것만 같아서, 그래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나의 이야기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깊숙한 어딘가에 숨겨놓게 되었지요. 이제는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나는 그저 글을 쓰고 싶을 뿐입니다.
삶의 일정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임의의 방향으로 튕기는, 조금의 충격에도 그것이 어디로 튀어나갈지 알 수 없는 순간, 불안정함을 밟고 머나먼 세계로 뻗어나가야만 하는데, 나는 그저 방황하는 이끼가 되어버릴 것인가? 드리워진 잿빛 안개 사이로 멀리 날아가는 자유로운 갈매기 떼가 석양으로 물들어진 남해 바다 위를 질주하는 동안, 나는 아름다움을 되찾아야만 한다는 신호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 "청사포에서" 중에서
나는 글을 쓸 때 진정 '나'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