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가 잦아든 일요일 아침에 청평호가 보이는 카페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평소에 나는 원고지를 글쓰는 공간으로 삼는다기보다는, 수업 내용을 필기하거나 연구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용도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명백한 일탈 행위입니다. 아, 물론 떠오르는 생각들을 원고지 칸에 맞추어 끄적일 때도 있어요. 이럴 때는 원고지가 그 본질을 되찾게 되죠.
2주만에 찾아간 가평에 나는 원고지를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잠깐의 멈춤이 필요했습니다. 지나치게 강박적일 정도로 무언가에 전념하는 태도가 때로는 스스로를 구속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러하죠. 쉴 틈도 없이 읽고 생각해야 하는, 하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새싹 연구자의 삶은 금방 피폐해지기 마련입니다. 외로움에 맞서 싸워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내게 단 며칠만이라도 힘을 빼고 살아보라고, 그래야만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나 봅니다.
나의 원고지는 불특정한 글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 생각이 많은 탓일까요. 원고지가 눈앞에 있는 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적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습니다. 나의 원고지에는 알파벳과 한글, 그리고 기괴한 그림과 모식도들이 갈 길을 일은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원고지를 챙겨가지 않은 카페에서 오랜만에 자유를 느꼈습니다. 자유로움의 감정을 잊고 지낸 지 굉장히 오래 되었나 봅니다. 테이블에서 원고지와 샤프가 사라지고 나니 창밖의 풍경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호수를 바라보며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고 애써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여름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오고 있었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는 무성한 나뭇잎들이 새롭게 찾아온 계절을 숨기려 몸부림칩니다. 그들은 여름공기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름공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뭇잎보다 더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습니다. 망각의 공간인 바다를 찾아 헤매던 시간들을 털어내고 주변의 아름다운 존재들에게 웃음을 건네는 시간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2021년 5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