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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근 Jun 22. 2022

시작도 끝도 창대했으면 하는 직장인 게이의 썰풀이

살아온 궤적을 다시 그려볼 필요도 없이 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적어도 내가 정규직으로 다녔던 직장에서는 늘 커밍아웃을 하고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후일 이야기할) 군대에서의 경험을 겪고 나서 나는 평생 커밍아웃을 하며 살아야 되는 사람임을 깨달았고, 그 이전까지는 유리벽장이었던 삶에서 완벽히 오픈리 게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운 좋은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겪었던 딱 한 번의 차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당시 나는 영어 방과 후 교사를 맡고 있었고, 교재는 있었지만 내 재량대로 수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핫했던 유튜브 단편 영화 중에 하나인 'Love is all you need?(사랑만 있으면 되나요?)'를 딕테이션 교재로 활용했었다. 청소년 영화이다 보니 단어 사용이 간결했고 발음도 깔끔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는 게 딕테이션 교재 선정의 목적이었지만, 사실 내용이 주는 다양성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성애가 비정상이고 동성애가 정상인 사회에서, 주인공이 이성애자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학교 친구로부터 차별과 폭력, 이별을 겪게 되면서 생기는 아픔을 그린 영화였다. 나는 내가 속한 학교가 내 중고생 시절에 그렇게 이반검열로 날렸던 학교였는지 몰랐던 상태였기 때문에 단지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딕테이션 교재로 삼았다.


(영상 출처: 유튜브, '사랑만 있으면 돼?')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내가 보여준 영상에 대해 부모님께 이야기를 했고(아마도 저녁 식사 소재거리로 나왔으리라.), 그 내용을 들은 일부 학부모들은 당시 방과 후 교사들을 책임지던 부장 선생님께 항의를 했다. 사태가 심각한 상황까지 갔다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부장 선생님께서 얼마 안 가 나를 호출했으니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대학생 때 일이니 그게 다 기억날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부장 선생님의 이 말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상근 선생님의 오른쪽 귀걸이는 선생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인가요?"



내가 소위 말하는 '이상적으로 패싱 되는 정상적인 모습'의 애티튜드를 가진 남학생이었다면 이런 질문은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한 번의 경고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 영화를 딕테이션 교재로 쓴 다음 주에 나는 해고됐고, 나는 교재로 삼았던 영화의 소재가 문제가 아니라 내 정체성 때문에 잘렸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학교가 이반검열로 유명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이 상황에 분기탱천하며 주변의 인권활동가들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였다.


그 이후로 방과 후 교사는 한 적이 없다. 모 유명 재단에서 대학생 교사를 모집해서 파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문제 교사로서 낙인찍혔고 두 번 다시 다른 학교로 배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정규직 직장을 다닐 때는 늘 내가 게이라는 것을 커밍아웃하며 살아왔다. 시리즈의 시작이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야기로 시작되기는 하지만, 30대 오픈리 게이인 직장인이 될 때까지 어떤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풀어나가는 것은 분명 중요한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별 다른 이야기가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 말고 많은 누군가들은 직장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사는 대부분의 오픈리 게이는 내가 알고 있다고 살아가고 있다는 자만 넘치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더 넓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글을 보는 누군가에게는, 직장은 커녕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커밍아웃하지 못한 누군가에게는 영감이 되어줄 글이 되리라 믿는다. 10대 때 정체성을 깨닫고 20대를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바치고 20대 후반-30대를 오픈리 게이 직장인으로 사는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한 자 한 자 힘 있게 글을 적어 내려 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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