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프라이드 넘치는 퀴어 직장인 동료를 만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이번 글은 나에 대한 이야기 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 같이 프라이드 넘치는 30대 게이 동료 직장인을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물론 반쯤은 지 자랑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핵심은 뒤에 있으니 한국말은 끝까지 듣는 거랬다고 약간의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내가 모든 직장에서 커밍아웃을 하며 다닌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는데, 내 고용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는 굳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키엘 매장에서 수습으로 근무할 때였고, 두 번째는 사무직으로 이직하기 위해 광고 대행사에서 한 달 동안 인턴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마디로 정규직으로 채용이 된 경우가 아니었을 때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 2022년을 기준으로 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커밍아웃하지 않은 직장이 두 군데 더 생기긴 했는데, 이 부분은 복잡한 관계로 인해 글 한 편이 뚝딱 나오므로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아무튼 이걸 가지고 "야, 너무 비겁한 처세술 아니야?"라고 말할 계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국 땅에서 손에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계제가 된다 한들 그런 말을 할 사람도 있을 리 만무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한국에서 고용 상태가 정규직이 아닌 상태는 노동자로서 매우 불리한 조건일 수밖에 없다. 고용보장이 되지 않는 근무조건에서 일한다는 건 언제든 고용과 관계되지 않은 사유로 인해서도 해고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법적인 계약으로 묶여 있다 해도 말이다. 하물며 이렇게 호모포빅한 사회에서 성소수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라니. 갑을병정 중에 병 아니면 정에 해당하는 위치 정도 되지 않을까.
러쉬를 관두고 키엘에서 일할 때는 수습 기간이 연장되어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았고, 광고 대행사에서는 채용 전제형이 아닌 인턴으로 입사했었기 때문에 나의 근무 조건은 매우 불안정했고, 그런 상황에서 커밍아웃을 통한 리스크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 리스크는 상상 속의 리스크이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속의 리스크. 내가 러쉬에서 커밍아웃하며 지낼 수 있었던 건 특수한 환경이었기 때문이고 내가 운이 좋아서였지,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리란 보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계를 걸고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상상 속의 리스크라도 그 확률과 볼륨이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비정규직으로 다녔었던 직장에서도 커밍아웃을 하며 지냈으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했을까? 내가 당시에 느꼈던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이리저리 생각해본 결과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뽑아 볼 수 있었다.
첫째, 업무 능력은 핑계이고 사실 상급자가 호모포비아라서 성적 지향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
둘째, 사내 인간관계에서 성적 지향으로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셋째, 내가 불이익을 받더라도 그런 상황 속에서 날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피고용 상태에서 위기 대응 능력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면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디서, 어떻게,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도 성적 지향 때문에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해고당하거나, 비자발적 이유로 직장을 관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리소스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조력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는 케이스를 볼 수 있었다.
인권단체나 변호사 등을 통해 조력을 받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가령 업무 능력을 핑계 삼아 성적 지향 때문에 권고사직을 하는 경우에 권고사직의 이유가 성적 지향에 있음을 당사자가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증명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주변에 조력자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평소에 성소수자 직원에 대해 성적 지향에 대해서 험담을 한다는 걸 누군가 같이 들었다고 증언해주거나, 사내 분위기가 그 사람만 따돌리는 분위기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면 '우리 회사 사람들이 이 사람만 따돌리더래요~' 하는 증언 하나만으로도 피해 구제가 좀 더 수월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당신이 성소수자 동료의 눈에 띄는(?) 조력자가 되어야만 한다. 평소에도 당신의 동료가 '내가 커밍아웃을 해도 안전할 수 있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한 의사 표시는 다양한 각도에서 시도해볼 수 있다. 성소수자 의제에 대해서 긍정적인 발언을 한다든가, 연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캐묻지 않는다거나,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해서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남긴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요지는 당신의 동료에게 '이곳은 당신이 커밍아웃을 해도 안전한 직장이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나는 입사 때부터 커밍아웃을 했고, 모두에게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에 내 앞이나 뒤에서 함부로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들 내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만 직장에서 만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당신의 직장, 당신의 주변에도 성소수자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살아간다면 나 같이 커밍아웃을 하며 직장을 다니는 프라이드 가득한 사람이 또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노력도 중요한 일이지만 주변에서도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환경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이다. 앞서 언급한 첫째, 둘째, 셋째 모두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라. 성소수자 당사자가 직장에서 커밍아웃했을 때 두려워하는 상황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커밍아웃 때문에 업무 수행 능력이 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내 주변 사람이 날 지지해줄지, 내 주변 사람이 변하지 않을지, 그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줄 사람이 되자. 사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커밍아웃을 하든 말든 성소수자 당사자는 원래 당신이 알던 그 직장 동료다. 일을 잘했건 못했건 원래 당신이 알던 바로 그 사람이다. 다만 당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당신의 동료가 좀 더 프라이드 넘치는 성소수자 당사자가 될 수 있도록, 당당하게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나 같은 사람이 늘어나다 보면 어느샌가 직장에서 커밍아웃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30대 게이 직장인은 그렇게 모두의 한 발자국이 모여서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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