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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OME NIGHTS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나오면

HELLO, UK

by 알버트




홈스테이 아주머니의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흐리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 경험 상 오늘은 비가 오지 않을 하늘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좋다.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굳이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니 망설이던 시간도 잊은 채 가볍게 길을 나섰다. '여행책자 만을 너무 믿지는 않는 게 맞는 거지, 암.......' 하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내려 웨스트민스터 역 3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많은 것들이 너무 한꺼번에 덮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상황과 준비 안된 마음에 갑자기 들이닥친 시커멓게 흐린 하늘과 온퉁 무채색으로 등장한 광경. 간단하게 말하면 비 흩뿌리는 궂은 날씨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바람은 이리저리 불었고, 비는 내리고, 당연히 우산은 없고.......


춥고 낯설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제 길을 따라갔다. 이미 이런 날씨에 익숙한 사람들처럼 당황한 기색도 없다. 나도 그 비와 바람에 추워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추워~!"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도 모르게, 멋져 보이겠노라 쓴 모자는 벗어버리고 머리야 어떻게 되든 말든 방수가 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꽁꽁 싸매기, 그게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처음 내가 한 일이었다. 비가 계속 내렸다. 우산 없이 맞기엔 내리는 양이 적지 않다.


정신을 차리고 한 바퀴 돌아 빅벤이나 주변 정경을 눈에 담으며, 아주머니의 말은 아주머니 동네에서만 유효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아니 이게 뭐야, 비가 안 내린다더니.......'라는 짧은 원망이 스쳤지만 이미 거긴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있지 않았고,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리 한 가운데서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에 우산 없이 서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이 배낭도 방수가 되겠지 라는, 희망 담긴 추측을 해 볼 뿐이었다.


사실, 우린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말을 듣는 듯 하지만, 실은 내가 바라던 정보를 선택적으로 흡수해 무의식적으로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오늘 아침 내가 신발 신을 때 아주머니가 했던 말을 좋아라 하면서 우산을 두고 나온 것처럼 그렇게....... 그러니 여행 중 특히 런던, 이런 궂은 날씨로 대변되는 도시에 들르기 위해 접는 우산을 특별히 사서 가지고 왔으면서도 전철에서 올라서자마자 낭패감을 맛보게 되는 건 순전히 내가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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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읽던 칠리한 날씨라는 게 아마 이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날씨를 겪을 때마다 연상되는 묘한 기억들과 슬픔 같은 것이 있다면 익숙할 법도 하지만, 막상 낯 선 장소 예기치 않은 마음에 덮친 일이라면 당황스럽기도 하다. 더구나 정신없어 몸이라도 숨기고 싶단 마음도 먹기 전에 저기 저렇게 떠~억 하니 런던아이가 달려들 땐 더욱더....... 그리고 뒤를 돌면 바로 빅벤....... 숨겨둔 보물을 한꺼번에 쓸어 담는 느낌은 그런 상황에서도 찾아왔다. 화창한 날씨에 여유로운 마음이었으면 몇 배는 더 환호하고 기뻐했을까.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런 순간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날의 날씨와 함께 들이닥치던 볼 것들이 비밀의 장소에서 내 눈에만 보여주던 보물찾기 쪽지 같이 남아있진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겪는 많은 일에는 그렇게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바빠 보였다. 제 각기 목적지를 향해 걷는 걸음이 빠르고, 우산 속으로 몸을 숨기기도 하고, 여기서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선생이었던 사람이니 저런 정경을 흘려 볼 수는 없다. 그들이 가는 곳, 하는 행동을 나도 모르게 보고 있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읽으며 이 안에서 일어날 역동을 추측하고, 그 선생님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며 그 안에서 아이들이 펼쳐갈 그림들을 상상해본다. 생각을 따라다니는 일은 의외로 재밌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을 포함, 여러 나라 여러 장소에서 선생님을 따르는 아이들 무리들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럴 때마다 많은 생각들을 했었다. 그리곤 이내 부러워지고 안타까워지기 시작했고....... 아이들,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 아이들, 적어도 정체성을 깨달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자의적으로 주도성을 가지고 주변을 이겨낼 힘을 얻기 전까지의 아이들이라면, 그때까진 어른의 그림자를 지우기 힘들다.


아이들 가까이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불어넣는 입김이 어떠한지, 학교생활하며 나이 좀 먹어 본 사람들이라면 알 만큼은 안다. 아이가 만나는 최초의 우주이자 대부분의 경우 아이의 가장 귀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집, 부모 그리고 친인척을 포함한 가족. 그다음 아이가 만들어가는 또래 세상과 주변의 넓은 학교 그리고 거기서 만나는 새로운 미래와 아이 주변의 사람들....... 나는 어딜 가든 아이들의 표정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과 엮어내는 그 분위기를 읽는걸 즐긴다. 나도 모르게 그러하다. 여럿이 있을 땐 힘들지만 나처럼 숫기 없고, 말도 없는 사람에게는 딱 맞는 놀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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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만 말하자. 알고 싶은 사람에게나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한 참을 정신 팔고, 빅벤을 한 화면에 어떻게 다 담을지 이리 저리 재 보았다. 도대체 어떤 구도로 찍어야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카메라 하나 사서 오직 오토 모드로만 찍고 돌아다니는 처지이다 보니, 이 모든 기술도 방법도 결국은 내 아이디어 이상을 건너가지 못한다. 지금이야 아주 조금 책으로 읽고 선생님에게 배우고 해서 겁만 많아졌지만, 그땐 심지어 겁도 없었다.


다리 건너편에 멋지게 서있는 런던 아이를 찍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여러 장 찍었지만 사실 너무 춥고 비를 많이 맞았다. 어디라도 들어가 앉든 무슨 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눈 앞에 시티투어 버스 매표소가 보였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표를 샀다. 직원이 타는 장소를 알려주길래 타러 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이리저리 바람이 몰아친다.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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