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UK
런던에서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일어나는 대신 커튼을 들췄다. 빛과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나무. 여기서 너를 보니 반갑구나....... 멍하니 누워, 점점 작은 녹색 잎들이 제 색깔을 드러내는 시간을 즐긴다. 떠나올 때 막 녹색 눈이 터지기 시작했던 것도 같은데, 산수유 꽂은 완전히 피었는지 울타리 조팝나무에는 잎이 자라기 시작했는지.......
허리가 아프다. 뻐근하고 두 다리는 묵직하다. 싱가포르에서 런던까지 14시간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해 한국에서 직항으로는 대체 얼마인지 찾아보고는, 다음에도 이런 식의 중간 체류가 좋을것인가 자문해본다. 체크인을 늦게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중간자리에 앉았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앉아 오가는 대화를 듣게 되면 누구나 다소 외로워지기 마련이다. 싱가포르 발이라 그런지 둘러보아도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나와 생김새 비슷한 두 사람도 자신들의 언어로 눈웃음을 나누고 있다. 내가 이젠 철저히 혼자군 싶다. 한국드라마를 좋아하는지 한국인인 나는 보지도 않았던 드라마나 영화를 그들이 본다. 익숙하지 않은 정경, 우습게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야 비로소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락처를 나눴다. 열 시간 넘는 동안은 내내 말없이 있다가 입국심사대에서야 봇물 터지듯 나눈 대화들. 어찌보면 이해못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은 서로가 탐색하며 말붙여도 좋겠다 싶어도 말하지 않았고, 한국 영화를 좋아하느냐는 작은 한마디에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 웃음꽃이 핀 것이다. 둘은 영국에서 유학했고, 지금은 직업상 출장을 가는 것이라했다.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면서 나는 '잘 가시오'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그 순간 진심이었다.
둘러보면 화려할 것 없고 잘 정돈되지 않은 마당이다. 무언가 잘 가꾸어진 잔디에 근사하게 차를 타고 퇴근 할 것 같은 장면은 영화에서나 보던 그림인 것일까. 여기저기 타국에서 자리잡으려 애쓴 고단함이 묻어나는 듯하다. 멀리 집을 떠나와, 고국을 떠난 이의 집에, 여행 중인 사람들과 함께 맞는 아침. 햇빛은 느리고 나무의 실루엣은 크고 검으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묘하게 어색하다.
커튼을 조금 더 걷어보았다. 여기저기 뒹구는 가재도구들과 멀리서 펄럭이는 빨래들이 보인다. 깔끔했던 도로와 마주한 대문의 뒷모습이 이러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집도 아닌 그 곳 침대 한 칸에 누워, 먼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를 상상해 보았다. 오래 말 해보지 않아 알 수 없을 일이었지만, 샤워실이나 부엌 그리고 거실과 도미토리의 상태를 보면서 맘대로 그려보았다. 이층에선, 들락거리는 여행객들이 익숙해졌을 이 댁 식구들의 리얼 생활이 펼쳐질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 거기 살아갈 것이었다.
젊은 아주머니는 비교적 센스가 있었다. 여행객들이 숙지해야 할 사항을 보기좋게 그러나 조금은 애교있게 말하는 방법을 아셨다. 비록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쉽게 눈치챌 수 있었고, 또 그 마음이 조금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해서 그렇지, 그 일이 밥벌이만의 용도를 띄지만 않는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장기 투숙객 둘이 있는 것 같았다. 밥상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짐작했다. 그 청춘들은 꿈과 기대를 안고 한국을 떠나 왔을 것이었고, 비가 올 듯한 초봄 그 날 아침 우연히 나와 마주앉게 되었을 사람들.
나이가 들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이들과 그 뒤의 부모까지 만나온 시간이 쌓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 모두 부러워할만한 직장을 가지고서도, 행복해하기보단 꿈에 다가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직장인들을 많이 봐서 그러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그 때 가진 생각으론, 아직 이들에게는 조금 더 성숙을 향해 나아갈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고, 어떤 경우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는 우려였다.
우리가 꾸는 꿈은 때때로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열망을 위해 한걸음씩 내딛느냐에 달린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그 땐 다행히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좋아하고 무슨일에 관심이 있는지부터 먼저 아는 게 쉬운 출발이라고 생각했었고,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란 것도 잘 알았다. 적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폭발시켜 그 일에 매달릴 때 우린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나 만의 것이었다고 믿는다. 내가 걱정하던대로 그들이 흘러갈 확률은 적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일이 되어가길 바라지도 않는다. 사람은 언제든 변화 가능한 연속선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본 한 장면으로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기엔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어쨌거나 그 첫째날, 시끌거리는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이끌려 방문을 열고 나가본다. 제 각기 그릇 하나씩을 들고 바쁘게 아침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한식이다....... 6일 만에 처음 맛보게 될 한식이 꿈처럼 펼쳐져 있다.
원래 음식에 연연해하지 않는 성격의 나, 그 흔한 고추장 하나도 없이 해외로 갈 수 있는 나. 그런데 집 떠나 6일만에 저런 밥상을 마주하는 순간, 이건 뭐...... 저 총각김치..... 된장국.... 좋아서 죽을 것 같다.
벽에 보니 박지성 선수 싸인도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