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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Aug 17. 2016

나는 꿈처럼 살리니

가마르조바,조지아

내 명함을 받아 든 이가 물었다.


"왜 닉네임이 알버트예요?"

"어머나 선생님, 그렇게 물어봐주셔서 감사해요. 그 이름에 대해 물은 사람은 선생님이 두 번째예요."


두어 달 전 이룸센터에서 열렸던 토론회에서 만난 이가 내 명함에 적힌 이메일 주소를 보고 질문했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 알버트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질문했던 분은, 이름만 불러도 그리운 작고하신 '구본형'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내게 "알버트야"라고 부르시면서 왜 네 이름이 알버트냐라고 물으셨다.





알버트는 어렸을 때 가슴 두근거리며 봤던 '캔디 캔디'라는 만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테리우스, 앤서니, 아치, 스테아 그리고 앤과 니일과 이라이자까지 기억해도, 알버트 아저씨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 가슴 조이며 넘기던 페이지에서 알버트 아저씨의 등장분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내 닉네임 알버트는 거기에서 따 온 것이다. 알버트 아저씨는 그야말로 내 눈에 비친 가장 완벽한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알버트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영어학원엘 가면 꼭 영어 이름을 지으라고 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ANNE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ANN이 아니라, '반드시 뒤에 E가 붙은 ANNE으로 불러달라'라고 했기 때문에, 나 역시 충실히 E를 붙여 ANNE을 영어식 이름으로 쓰곤 했었다. 그리고 앤을 읽으며 내 이상형은 길버트가 되었다. 앤의 빨강머리를 홍당무로 놀려 원수처럼 지냈던 길버트는, 열 권에 이르는 빨강 머리 앤 전집을 읽다 보면 근사한 남자로 성장한다. 앤을 사랑하고, 가정적이며, 그러나 의사로서 열정과 도전정신을 지닌 그런 따스하고 한결같은 남자로 나온다. 완벽하다. 나는 단지 한 권의 동화책을 보면서도 이미 마음속에 길버트라는 인물에 대해 이상적인 남성상을 그렸던 것 같다.


내게 있어 '비밀의 화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두서너 개의 장면이다. 강력한 하나는 메어리가 땅속에서 열쇠를 주워, 비밀의 화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하녀 마사의 남동생 니콘과 남몰래 정원을 가꾸고, 장미 덩굴 가득한 그 정원에 콜린을 초대하는 장면, 그리고 하나는 비바람이 치는 밤 메드록 부인과 마차를 타고 황무지를 건너가는 장면이다. 동화에 등장한 니콘의 설명에 의하면 그 황무지는 꿀벌이 잉잉거리고 히드꽃이 만발한 곳이다.


나는 큰 소나무들과 배롱나무 매화나무 산수유 철쭉 화살나무 등이 서 있는 우리 집 마당 여기저기에 땅을 파고 백합과 나리 패랭이 심지어 부추 그리고 화원에서 살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심고 가꾼다. 햇빛이 있어야 식물이 잘 자란다는 것도 모른 채 처음엔 이것저것 사다 심었고 몰랐던 것만큼 실망도 컸다. 여러 해의 실수 끝에 구근류와 여러해살이 풀이 자리 잡고 있지만, 때때로 장화 신고 모종삽과 전지가위를 들고 마당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울타리는 조팝나무가 그득해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부터는 완벽하게 앞을 가려줘 어찌 보면 마당은 외부와 잘 구분되어 있다.  울타리 밖으론 단풍나무를 비롯해 감나무 앵두나무 자두 나무 그리고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어,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고 마당에 둔 절구통으로 물을 마시러 온다. 새들 먹이와 물을 채우는 일은 부지런하지 않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몇 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비밀의 화원'같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나는 마당 데크에 앉아 고양이를 쫓기도 하고, 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때론 혼자서 랩탑 끼고 앉아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풍이 지는 가을날, 따뜻한 커피를 옆에 두고, 그네를 타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큼 근사한 적이 있었을까 싶다. 눈이 오거나 화장실 창 밖으로 등불 같은 벚꽃이 필 때도 있지만, 몸을 뒤로 젖혀 바람을 가르는 그때는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그때 마당엔 떨어진 단풍잎들이 가득할 때가 많다. 우리 집 정원이 생기기 전 나는 우리 아파트 옆 골목길 벤치에 앉아, 머그에 담아 간 커피를 마시며 가을 낙엽이 얼마나 아름다운 색을 가졌는지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알버트, 길버트, 그리고 비밀의 화원.

이 셋 중에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두 개였다. 이상적인 남성상은 내가 남성이 아닌 관계로 만들 수가 없고, 그리고 내가 가진 그 이상에 들어맞는 혹은 그 틀에 맞는 길버트를 찾을 수가 없어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설정이었다고 결론 내렸던 적이 있다. 어쩌면 알버트와 길버트의 중간 정도의 인류로 내가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나의 비밀의 화원은 아쉬운 대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꿀벌이 잉잉거리고 낮은 풀 숲 사이로 온갖 꽃과 작은 짐승이 살 것 같은 황무지는 일찍이 만날 수 없었다. 내 행동반경 안에선 그랬다. 두어 해 전 모하비 사막을 지난 적은 있었지만, 조슈아 나무와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만발한 모하비에 내려 걸을 수는 없었다. 버스 창 밖으로 보며 지나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지난 7월에 만났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그곳에선 곳곳에서 작고 낮은 꽃들을 수없이 담은 들판을 만났다. 사람들은 들판을 보며 환호했고, 걸어 들어가, 묻혀 뒹굴고, 뛰어올랐다.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수많은 종류의 들꽃들이 가는 곳마다 가득했고, 그 향기는 우리를 취하게 만들었다. 7월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생각하면, 녹색에 분홍과 노랑 같은 꽃들이 가득 채워진 끝없는 들판 그리고 넓은 평원이 떠오른다. 나는 소원을 풀었다고 하며 돌아왔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늘 꿈꾸던 들꽃 만발한 평원을 원 없이 보고 온 느낌, 한국에선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떠올리면 지금도 그 길을 달리는 듯하다. 그리고 저 언덕들이 온통 보라색 혹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고, 가까이 가보면 그 노랑과 보라색이 야생화였음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꿈을 꾼 것 같다고 했다. 꿈, 꿈은 아무리 작은 꿈이라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유인한다. 꿈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벌레 먹은 콩을 골라내듯 정성스레 고르고 남겨 키우면, 우리가 꿈꾸던 맛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잉태되고 자란다. 그것들 중 무엇에 좋은 영양분을 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인 것이고, 중요한 일과 나를 설레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구분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로즈메리나 라벤더 향기, 여행, 꽃들 같은 것 그리고 나만의 땅에 구근을 심어 봄과 여름에 그 꽃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향기를 맡는 일도 속한다. 나는 충실히 해내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즐거워한다. 마당이 없었을 땐 화분에 자라던 꽃들이 많았고, 그 화분들로 내 베란다는 그득했던 적이 있다. 가을에 낙엽이 물들 때, 친구와 그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낙엽 색에 감탄했고, 눈이 올 땐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눈을 보거나 나가 걷기도 했다.


나를 행복하고 들뜨게 하는 일은 수없이 많다. 중요한 일은 중요한 일대로, 그리고  무게 있는 중요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도 나는 꿈을 꾸고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을 찾아 나선다.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은 녀석들을 돌보며 그렇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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