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경험 다른 해석

당신이 흔들릴 대 SHIFT하라

by 알버트


배낭을 메고 오른손에 검정 봉지, 왼손에 우산을 들고 전철을 탔다. 구로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자원상담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 명의 내담자를 만났던 그 날, 4시가 지난 시각이었지만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상담을 마치고 걸어 나오니 힘도 없고 속이 울렁거려 괴로웠다. 학교로 돌아가 먹을 요량으로 남구로역 입구에서 과일 두어 가지를 샀다.


그런데 온수역에서 내려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두리번거리다 그만 두 팔 벌려 큰 절 하듯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강장에 낮은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는데 입구를 찾으며 방향을 트느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엎어지자마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배낭은 벗겨져 내동댕이 쳐졌으며, 과일이 든 검정 봉지는 저만치 앞에서 나뒹굴었다. 푹 들어간 정강이에서 불이 난 듯했다. 언뜻 보니 피부는 크게 벗겨졌고 시퍼렇게 움푹 파인 다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까진 양 손바닥은 따갑고 쓰라려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침착하게 배낭을 건져 올린 뒤 검정 봉지를 집어 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구 쪽을 향했다. 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앞만 보고 걸었다. 다행히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는지 웃는 소리도, 탄식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빨래를 걸쳐놓은 것처럼 벤치를 안고 넘어진 모습은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광경일 것이었고, 만약 내가 그 모습을 봤다면 아픈 그 사람과 상관없이 웃음부터 터져 나왔을지 모른다. 그렇게 아프지만 웃긴 상황을 연출한 뒤 절뚝거리며 전철역을 나왔다.


장난 삼아 나의 이 사례를 들려준 뒤“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철역 입구로 올라가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라고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지독히 재수 없었던 그 날의 나를 먼저 말한다. 그런데 그날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한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진짜 운 좋았다’였다. 꽈당당 넘어졌음에도 정강이 뼈가 부러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고, 우스꽝스럽게 자빠지는 내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 창피해서 좋았다. 봉지 안에 있던 방울토마토 뚜껑이 많이 열리지 않아 주워 담은 토마토 개수가 열 개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배낭 속에 있던 음료수 병이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한 푼이 아쉬운 내담자 중 한 분이, 상담해줘서 고맙다고 건네준 드링크 한 병이 가방 속 그것도 중요한 책과 서류들과 함께 있었는데, 가방이 벗겨져 땅에 내동댕이 쳐졌음에도 불구하고 깨지지 않은 것이었다. 끈적거리는 음료수가 가방 안에 쏟아져 내가 좋아하는 그 가방의 가죽과 천에 스며들고, 가방 안에 유리 가루가 가득한 광경,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을 터였다.


우리가 사는 환경을 내 맘대로 할 순 없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마음은 내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내가 통제할 순 없지만 내 마음을 조절하고 다루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루 중 겪는 일을 내가 모두 결정할 순 없지만, 벌어지는 일 속에서 어떤 일을 기억하고, 선택하고, 해석할지는 나에게 달린 일이다. 온수역에서 넘어진 일은 하나의 상황을 두고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와 단점보다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녹록지 않은 하루의 시간 속에도 수없이 많은 좋은 일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을 보자.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 출퇴근 시간과 겹쳐 평소보다 밀렸다. 톨게이트를 통과한 직후, 갑자기 방향을 틀며 질주하다가 멈추는 미친 것 같은 이상한 차를 만나 사고가 날뻔했다. 졸려서 운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록 피곤했고, 그래서 집으로 오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식구들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씻지 못한 몸은 지저분했다. 커피 한잔을 내려 소파에 앉으니 소파 한쪽에 어제 놀러 왔던 지인이 개어둔 수건이 여전히 뒹굴고 있다. 예전 brunch에 올려 둔 글이 뜬금없이 메인에 떴으며, 멀리 있는 아이는 이제야 자기의 적성을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이가 몇인데 지금에서야 말이다. 그리고 다시 내린 커피는 마시기 싱거워 다시 내렸어야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 통행료가 할인되었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갑자기 방향을 틀며 미친 듯 질주하다가 멈추는 이상한 차를 운 좋게 부딪치지 않았다. 하늘이 도왔다. 졸릴 때쯤 졸음쉼터를 발견했고, 자고 나니 머리가 개운해지고 운전할 수 있었다. 집에 오니 따뜻했고, 식구들이 없어 나를 방해하는 것 없이 조용하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세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내린 커피는 너무 맛있었으며, 소파 한쪽 몇 개의 수건을 개어놓고 사라진 지인의 흔적이 남아 어제의 즐거움을 되감기 하게 해 준다. 적절한 때에 좋은 생각이 나서 기운이 돌기 시작했으며, 예전 brunch에 올려 둔 글 하나가 메인에 떴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사계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파트가 흘러나오고, 멀리 있는 아이는 이제야 자기의 적성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다시 내린 커피가 싱거웠지만 노력 끝에 진하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아직 밤이 끝나려면 서너 시간 이상은 남았고, 이 밤이 다할 때까지 생각해보면 적을 일들은 많다. 하루를 언뜻 훑어보아도 이렇게 신나는 일의 목록을 작성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 대신 악몽 같았던 하나를 떠올린다면 내 삶은 끔찍한 사건으로 점철된 매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문제를 곱씹는 사람에게는 문제로 그득한 삶이 펼쳐지고, 좋은 일을 떠올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둥둥 떠다니던 좋은 일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는 것을 믿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선생님, 그대의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