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선생님
방학이 되었다. 아니 나의 방학이야 시작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내 친구들과 동료들도 드디어 방학을 맞이한 것이다. 방학 때마다 그랬듯 전국 곳곳에 숨은 듯 지내던 나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우~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곤 일 년에 한 번은 만나줘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빠듯한 날을 쪼개의 약속을 잡겠지. 방학 아닌 때 만나는 사람들이 있고 방학되면 특별히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직업환경상 상당수가 친구 아니면 동료였거나 동료인 사람들, 또 그들의 대부분은 몇 달 전까지의 내가 그랬듯 선생님들이다.
만난 지 어느새 13년이 넘은 동료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2002년 월드컵과 보냈던 그 뜨겁던 해에 일 년을 함께 지낸 사람들이었으니 어지간한 실수와 단점들은 너무 붉었던 그날들의 색깔 속에 묻혀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린 만날 때마다 붉고 만날수록 짙어져 가는 것 같다. 연령대는 천차만별이지만, 한 곳에 모이면 너무 다른 개성으로 닮은 점이 없지만, 그래도 우린 전혀 튀지 않고도 함께 할 수 있다. 만날 때마다 그게 참 신기하다.
두 해 전 여름까지는 동료였으나 이제 혼자 퇴직자가 되어 만났다. 함께 이야기하고 먹었고 또 여행했던 사람들. 한 20년 넘게 있었던 우리들의 근무환경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들의 많은 수는 이제 대학교 때 그 꾀꼬리 같던 목소리 대신 걸걸한 톤의 쉰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고, 그 소리는 매우 커서 조금만 이야기하다 보면 자꾸 쉬~ 소리를 내며 서로 간에 주의를 주어야 한다.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처럼, 누가 보면 부끄럽게 자꾸 목소리가 올라간다. 주변에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서로 간에는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민망한 목소리를 갖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서로 아는 것이며,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그런 것이다.
학교를 나온 내 계획과 학교로 돌아가 새 학년을 맞을 계획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동료들은 마음이 같을 리가 없다. 함께 살다가 다른 곳에 있게 됨으로써, 나는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 이야기에 대한 공감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가게 될 사실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해서 나는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나 현실로부터 이제 덜 민감하고 덜 간절하게 된 것 같았다. 이런 사실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또 그곳을 떠났으니 지금 여기에 충실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제 혼자 있게 됨으로써 객관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목적과 가치를 만들어낸 뒤 그것을 위해 살아나가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후로도 나는 학교로부터 그리 멀리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었기에, 간절하게 마음의 자유를 원했기에 직업적 안정감이 주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믿었고 또 그리했다.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간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숨 쉬고 싶어 하는 내 본질은 돌볼 틈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 아마 퇴직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내 본질, 내 방식으로 세상과 이야기 나누는 것, 그것을 할 틈이 생기지 않자 나는 정말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매우 잘한 일이라 여기고 있다.
나로서는 직업마저 물려야 할 정도의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유가 같은 정도로 중요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단지 배부른 소리 한다라고 핀잔을 들은 적이 많지만, 사람마다 죽고 사는 이유는 다르니, 그저 그런 정도라고 생각하고 만다. 내가 이해받아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고, 굳이 그들이 날 이해해줘야 할 이유도 필요치 않다. 나는 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해 아이들을 사랑했고, 성실하게 일했고, 동료들을 순수하게 존경했으며, 열심히 공부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젠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학교를 사랑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게 내 본질이라고 해석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 내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 나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방식이 보다 나 다움으로써 내 본질에 가깝다는 것.
학교를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선생 같고 선생님을 이해하고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에 주의를 기울인다. 여행을 가도 학교가 눈에 띄고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선생님들에 신경이 쓰인다. 만나는 사람들과 학교를 이야기하고 선생님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부모를 이야기한다. 물론 내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겠지. 또 내 방식으로 학교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학교에 깃든 아이들과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의 백그라운드인 부모와 그들이 만드는 가정의 분위기,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품은 학교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학교에 깃든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싶다.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해 보는 일이, 어쩌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고, 내 아이들과 동료들을 사랑하는 나다운 방식이었다고 생각하며 나의 본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부디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랄 뿐. 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을 만나고 오는 날은 생각이 많아진다.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실은 머릿속 이야기가 그득하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도 공간도 많다. 때론 지저분했던 화장실과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교실에 갇힌 그 이상 야리꾸리한 음식 냄새조차 생각날 때가 있다. 그 모든 것이 학교에 대한 기억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여기에 있고, 그런 내가 좋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을 지나온 지금의 내가 할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좋은 생각과 따스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를 이야기하겠지. 또 아이를 품은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겠고. 때론 이런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기울일까 싶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관심에 연연한 삶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선택이자 자유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주의를 준다.
학교를 떠났지만 여전히 학교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질기기를 바란다. 아이들을 잊고 있다가도 사진 한 장 만으로도 그리움에 사무치는 이 마음이, 학교를 떠나왔던 처음 그 마음만큼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래오래 이 마음 살아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