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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버트 Jul 18. 2019

그럴거면 하지 말았어야 했다

[냉정한 이타주의자] 는 어떻게 내 과거를 후회하게 만들었는가

어차피 떠날 거잖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행히 별 탈 없이 대학에 합격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하고 싶은 것은 다하며 사는 즐거운 나날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게임도 하고 재미있는 곳도 놀러가며 행복한 인생을 즐기는 와중에, 으레 자주 만나는 그룹 안의 친구 한명이 단체 톡방에 글을 남겼다. 자신의 삼촌의 친구가 보육원을 운영하는데, 초등학생 10명 정도를 맡아 교육 봉사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봉사 기간이 끝나면 한 턱 거하게 쏘신다는 유혹의 말과 함께.


사실 당시 나를 포함한 그 그룹 속 친구들은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공부를 잘하진 않았다. 그래도 대학 입학 전 뜻깊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승낙을 했다. 전날 밤 한 친구 집에 모여 신나게 놀고 다음 날 보육원으로 향했다. 보육원 앞에 도착해 전화를 드리자 원장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봉사를 잘 안오더라고.
아유, 와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진짜. 애들도 기뻐할 거야.

그렇게 아이들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받은 뒤 나는 영어, 다른 친구 3명은 각각 수학, 과학, 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아이들은 참 착했다. 어설프고 허술한 수업 내용이었지만 아이들은 곧잘 따라주었고 미안할 정도로 수업에 대한 참여도와 반응이 좋았다. 숙제를 내주면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으면서도 어떻게든 다 풀어왔고, 질문도 그 양과 질이 여타 초등학생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그렇게 5일 간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그 학생들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고 배우게 되었다.


이윽고 마지막 날이 되었다. 어느 고급 중국집으로 오라는 친구 삼촌의 문자를 받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5일 간 정이 들었다고 처음 그 아이들을 보았을 때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마지막 아이 중 한 명이 갑자기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근데, 선생님은 언제 다시 오시는거에요?
전에 영어 선생님도 오신다 해놓고 아직도 안 오셨는데…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들은 이타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나눔이 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철썩같이 믿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들에게 우리같은 봉사자들은 배움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전달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이들은 매번 새로운 선생님이 올 때마다 마음을 주지만, 그들은 여러 이유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한 채로 홀연히 떠나버리고 만다. 행복한 배움은 멈추어버리고 그들은 다시 언제 떠날지 모를 새로운 선생님을 기다린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은 영원히 반복된다.


과연 이게 진정 ‘아이들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일까? 란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껏 누구를 도운 것인가요


열정과 선의라는 그럴싸한 포장 뒤에 있는 이타적 활동 뒤의 민낯은 이뿐만이 아니다. 보육원의 그 일 후 몇 달이 지나고 나는 대학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명은 종종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아이를 보여줬다. 월드비전의 1:1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잠비아에 있는 한 아이를 거의 3년 가까이 돕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하고 같이 밥을 먹다가 그 아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 친구는 한숨을 내쉬더니 최근에 그 후원을 끊었음을 알려주었다.그 이유를 물어보는 나에게 친구는 기사 하나를 내밀었는데,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신이 이제껏 아이를 위해 준 도움이 그 아이에게 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심지어 심하게는 지방 군벌들의 로비자금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160804176400079)


이제껏 3년 간 자신이 그 아이의 인생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과 상상의 괴리는 너무나 심했다.


냉정한 이타주의자


아침에 TV를 틀면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수많은 기관에서 나온 수많은 형태의 기부 호소 광고가 나온다. 다 썩어가는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아이를 내세운다. 얼굴만 봐도 신뢰감을 주는 연예인이 양복을 입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며 기부를 부탁한다. 전화번호에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 내가 죽어가는 저 아이를 살릴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우리는 전화기를 들어 자연스럽게 정기기부에 등록을 한다. 순전히 이타적인 이유만으로.


윌리엄 맥어스킬의 <냉정한 이타주의자> 는 그런 우리들의 행동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그 돈, 정말 올바르게 쓰이고 있나요?


저자는 절대 기부가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책 앞부분의 대부분을 할애해 우리는 전 세계 상위 1% 소득 수준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의 작은 도움들이 99%의 최빈국들에게 엄청나게 큰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아주 큰 맹점을 꼬집는다. 바로 기부 이후에 그 돈들이 어떤 기준으로 효율적으로 쓰이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기부의 범위를 더욱 넓혀, 우리가 이타적 활동에 들이는 시간과 열정 또한 매우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타적 행위는 열정뿐만이 아닌 냉정한 이성과 분석 또한 수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때의 나를 다시 평가하다


이 책을 읽기 전, 그 때의 나를 평가해본다면 어떨까 싶어, 책에서 나온 냉정한 이타주의자의 5가지 기준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

보육원 안에서 활동하는 초등학생 10명, 기초적인 수준의 교육과 피드백. 하지만 우리가 떠나감으로서 그 혜택은 사라진다. 즉, 일시적인 메리트이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가?

아니다. 비록 아이들이 잘 따라와주긴 했지만 우리는 각자의 시간 5일을 투자해야 했고, 오며 가며 걸린 시간을 포함한다면 투자 대비 효율은 매우 낮다.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는가?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다. 아이들과 보육원 원장님은 공통적으로 교육자가 필요함을 강조했고, 그 외의 부분은 보육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우리가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봉사자가 오거나 모집 기간동안 아이들은 교육을 받지 못할 것이다. 


성공 가능성은 어느정도이고,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어느정도인가?

가능성은 낮고, 효과는 미약하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위한 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봉사 시간이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다. 설령 이를 통해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 효과는 크지 않고 일시적일 것이다.


5개의 기준을 조합해보면 우리가 봉사 활동을 간 것은 그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기 위한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그저 친구 삼촌이 사주는 밥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정말 그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면, 그 대안으로 돈을 모아 좋은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온라인 수강권이나 좋은 책을 선물하는 등이 효과의 크기나 지속성에서도 훨씬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 나의 눈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다음 수업을 기대하던 아이들아, 정말 미안하다. 나는 그 때 쉽게 꺼지는 짧은 열정을 가진 경솔한 사람이 아닌,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되었어야 했다. 나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너희들의 희망과 꿈에 큰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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