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길었고, 결정은 없었다

전략기획 팀장 일기 시즌 2 - 9편

by 초연

오전 10시, 정례 전략회의가 시작됐다.

안건은 단 세 가지였다.


1) 내년 CAPEX 조정안

2) 베트남 VAT 리스크 업데이트

3) 신규 고객사 조건 재협상 가이드


안건은 단순했지만, 모두 ‘결정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결정하기 어려운 안건은 대부분 기획팀이 떠안게 되는 결론 없는 회의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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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시작 20분, 흐름은 예상대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재경팀: “CAPEX는 줄여야죠. 지금 상황에서는.”

생산본부: “줄이면 라인 확보는요? 그건 또 누가 책임지나요?”

영업본부: “이 타이밍에 투자 늦추면 고객이 눈치챕니다. 매출 더 빠져요.”


모두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모두의 말이 충돌했다.


‘모두 옳을 때 회의는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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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15분, 논쟁은 방향을 잃었다.


“우선순위를 다시 정해야 합니다.”

“지금은 시장 상황 따라가는 게 먼저죠.”

“아니, 내부 효율화부터 해야죠.”


흩어진 말을 구조화하는 것.

그게 전략기획팀장의 역할이다.


“정리해 보면 우선순위는 세 가지입니다.

1) 시장 대응 속도

2) 내부 효율 안정성

3) CAPEX 여력 관리

오늘 우리가 합의할 것은 무엇을 1번으로 둘 지입니다.”


회의실은 잠시 조용했다.


그러나 5초 후, 영업본부장이 말했다.


“…그럼 오늘은 정하기 어렵겠네요.”


‘그걸 정하려고 우리가 모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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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20분, 회장은 말했다.


“좋아, 방향은 이해했어.

그럼 기획팀에서 우선순위 정해서 다음 주에 다시 올려줘.”


결정은 없었고,

정리할 사람만 생겼다.


복도에서 팀원이 물었다.


“팀장님… 오늘 결론이요?”

“결론은… 우리가 다시 결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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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40분.

하루 종일 회의 후폭풍을 정리했다.


우리는 왜 회의를 해도 끝나지 않을까?


회의가

결정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결정을 미루는 책임을 나누는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뤄진 결정은

늘 전략기획팀장의 책상 위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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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전, 일기에 적었다.


“오늘 회의는 길었고, 결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내가 채워야 한다.”


마지막 문장.


“전략기획팀장은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결론이 없을 때 다음 결론을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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