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생존 본능
마감이 곧 성취였던 기자 생활을 했던 나에게 최근 연속된 투자 제안 서류 탈락은 단순히 실패를 넘어선 충격이었다. 쉽게 본 것은 아니었으나 어렵게 느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의 서비스와 BM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스스로 대한 실망까지 탈락의 낙담을 크게 했다.
디캠프 2월 디데이, 판교 제2테크노밸리, 그리고 어젯밤 퇴근길 전달받은 프라이어 17기 배치까지 모두 소중하고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렇기에 정성의 정도와의 별개로 아쉬운 마음이 크다. 또 같은 상황에서 다시 쓸 수 있다 할지언정, 답을 찾아 적는 게 아닐 테니 더 잘 쓸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출 서류를 다시 읽어봐도 ‘이 단어는 애매한가?’, ‘서비스 플로우는 좀 더 구체적이어야 했을까?’, ‘이 부분은 자신감이 과했나?’와 같은 근거 없는 의심만 커졌다. 0과 1의 경계는 넓기만 하다.
팀이 만들어내는 성과가 작용이라면, 그 작용에 반응하는 투자라는 반작용의 힘은 팀을 움직이게 한다. 우리가 투자를 받기 위해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서비스, 그러니까 실사용자와 만나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작용은 투자라는 반작용을 필요로 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A가 다른 B에 힘을 가하면, B는 A에 크기는 같고 방향이 반대인 힘을 동시에 가한다. 누구의 힘이 부족했을까? 누구의 방향이 어긋한 것일까?
공교롭게도 프라이머 17기 배치 지원을 마무리했던 지난 주말, 나는 13.16km를 뛰었다. 케이던스가 11'40"/km였으니 빠르게 걷기에 가까웠지만, 한 달 전에는 2km만 뛰어도 숨차던 내게 있어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음 날 프라이머 17기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게 된 건, 운명의 생존본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더 많이 실패할 것이니, 더 멀리 더 빠르게 발로 뛰며 이루는 작은 성취를 만들며 버텨야만 한다는 운명 스스로의 계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패를 맛 본 인간은 나약하다. 순간적으로 '설마 마라톤 풀코스를 달릴 때까지 일일공에서 성취가 없다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건, 보이지 않는 결승점이 아니라 바로 앞사람의 뒤꿈치라는 진리는 달라지지 않는다. ‘설마’라는 의심을 지우고, ‘한 걸음 더’라는 확신을 더한다. 나는 일일공 가이스트의 한 구절로 '목적을 가지고 끈기 있게 꾸준히 계속 시도하고 도전한다’는 문장을 적었다. 아직 넷플릭스 등 일일공이 닮긴 원하는 기업의 문장에 가깝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 실패라고 불려도, 다시 나아가는 ‘한 걸음’의 확신이 우리의 문장으로 바꾸게 할 것이라 믿는다. 다음 문장은 ‘실패는 선택지에 없다’다.
곧 프라이머 17기 배치에 성공하게 될 미지의 팀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오늘도 뛰어야겠다.
(이미지=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