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벗 Apr 08. 2021

시작의 명상

묶인 실타래를 조심스레 풀어내다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묶인 실타래에 처음과 끝이 있을리 없다. 비어있는 화면과 커서가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 이야기를 시작해도 괜찮다는 것. 

    글쓰기에는 두가지의 모드가 있다. 사유하고 글쓰기와 사유하며 글쓰기. 전자는 학술적인 글쓰기에 가깝다면, 후자는 에세이에 가깝다. 에버노트와 노션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글이 되지 못한 글'들은 후자에 더 가깝다. 건네지 못한 말들, 중간에 되돌아온 산행, 끝까지 달리지 않은 달리기, 다 익지 않고 불어버린 요리. 

    엉키고 설킨 실타래 속에서 뽑아내는 이야기는 그래서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유투브의 노동요나 위스키 온도록 한잔의 감성의 결에 더 가깝다. 고요하다. 


    완주한 산행의 이야기는 어떨까? 끝내지 못한 등반을 속죄라도 하듯 오른 설악산 울산바위 위에서의 해방감. 산이 수묵화처럼 보이는 경험. 추위가 시원함이 되는 시간. 그리고 '이렇게 힘든 산행은, 내가 끝내지 못한 일들에 대한 나의 반성'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순간들. 

    끝마친 걷기 여정은 또 어떨까? 누군가가 열정으로 마음으로 닦아놓은 둘레길을 도장 수집이라도 하듯 때론 생각에 차, 때론 고요함을 담고 걷고 또 걸어 마친 여정에서 발견한 자신. 가끔씩 공허하고, 가끔씩 자유로웠던 길. 길 위에서 글을 찾고, 글 위에서 길을 찾겠노라 마음 먹게 된 여행. 

    글은 완결되고 싶어하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배워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어딘가에선 끝나야 한다. 도착하게 될 길의 끝자락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할 지점도 고르게 되는 것이다. 어디서 완결될지 모른채, 매번 시작만 하는 인간에게 좋은 글이란 보상은 없는 것처럼. 

    인간은 편집증적 유형과 정신분열적 유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전자는 과거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미래를 바삐 주워담는 인간이고, 후자는 매번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전자가 좀더 학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야기의 역사를 이해하고, 어디서 말을 시작해 어디까지 가야 할지를 결정한다. 쌓아놓은 나의 이야기 보따리는 성과지만 짐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외연을 넓히고 어두운 곳을 밝혀나간다.

    정신분열증에 걸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어제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매번 새로 시작해, 마치 어제도 내일도 없는 것처럼 불사르고 불태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불나방처럼 같은 불에 계속 달려들며, 밝혀놓은 지점을 지나쳐 새로운 어둠으로 직진한다. 편집증에 걸린 인간이 학자라면,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은 사업가나 행동가에 가깝다. 열정의 파토스를 따라 로고스를 임기응변으로 만들어낸다. 


    나는 항상 모으고 쌓고 싶었던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구멍난 독에 계속 물을 붓고 싶었고, 새로운 곳을 밝히고는 뒤를 돌아보았고, 열정으로 태울 나무를 베고 베어 쌓아 놓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오른 길은 항상 일찍 끝났고, 산행에선 항상 중간에 되돌아왔다. 요리를 마치지도 않고 음식을 먹어버렸다. 글은 비루한 노트와 조각들만 뭉개지고 잘려나간 형태로 쓰레기처럼 쌓여있다. 

    그런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편집증과 정신분열의 변증법에서 길을 놓아버려도 되는 것이었다면 어떨까? 도장 찍기위해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면, 산행의 목적이 등반이 아니었다면, 요리의 목적은 완성이 아니라면. 양 어깨에 힘을 빼고, 그냥 어딘가에서는 이야기를 시작해, 적당한 지점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었다면. 마치 이 삶의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처럼. 

    실타래를 그럴듯하게 정리해 멋진 스웨터를 만들겠다는 기획은 그 자체가 시작부터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성공하더라도, 스웨터를 만들어낸 순간 마치 '완결'되면 뭔가 거창한 탁월함을 선사할 것처럼 윙크했던 미래가 다시금 멀어지는 것처럼. 그냥, 반대로 걷지 않고 길을 걷는다는 것. 풍경을 놓치지 않고, 마주치는 이와 인사도 하면서 산행을 계속한다는 것. 요리에 몰입하고, 때때로 먹는 것.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끝내기 위해 질주하는, 그래서 완결되면 다시금 외로워지는 이야기가 아닌 것. 그냥 조곤조곤 수다가 내 삶이 되는 이야기. 길가의 풀과 꽃에게 인사하면서도 하늘과 전망의 시야를 잃지 않는 여정.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패배로 걷는 길. 이 길에 나서며 바로 위대함을 포기하고 싶다. 나에게는 탁월함을 엿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귀여움과 따뜻함으로 위로받는 것도 과분하다. 

    귀여운 고양이를 찾아 어슬렁 어슬렁대는 이 여정의 첫 이정표는 관계도, 공부도 아닌 일이 될 것 같다. 어딘가에서는 시작해야 하는데, 나의 업이라는 것은 계속 떠들어도 차고 넘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자문하면 조금씩 걷다보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생길지 모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