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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벗 Apr 10. 2021

영화가 보여주는 남자, 보여주지 않는 남자

<미나리>에 기대 내 멋대로질문 던지기

영화가 보여주는 남자, 보여주지 않는 남자

<미나리>에 기대 내 멋대로 질문 던지기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


내 추측이지만, 유학이나 이민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미나리라는 영화는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영화를 보며 소환되는 '타자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 사회나 미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다면 겹쳐지고 공명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남성이라면 스티븐 연이 연기한 주인공 제이콥을 보면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나에게 미나리의 흥미 포인트는 조금 달랐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의미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미나리뷰(?)에서는 내가 미국 유학생활을 하며 통과한 삶세계의 풍경을 소박한 1차 자료 삼아, 어둠 속에서 전진하는 (남성의) 삶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해 명상해보고자 한다. 주제의 성격상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인 할머니(윤여정 배우 연기)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할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미나리는 1980년대의 아칸소를 배경으로,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 제이콥과 모니카(모니카와 제이콥이라기엔, 제이콥에 스폿라잇트가 집중된다), 그들의 아들과 딸(감독의 경험이 많이 들어가서인지, 아들의 경험이 더 중점적으로 비친다), 그리고 한국(아마도)에서 찾아온 모니카의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이사와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일종의 트레일러 집으로 들어간 가족은 갈등에 직면한다. 넓은 땅을 정원이 아닌 밭으로 일궈 한국 채소를 기르려는 꿈을 가진 지방 출신 제이콥과, 리스크가 높은 농사일보다 안정적이고 도시적인 삶을 꿈꾸는 서울 출신 모니카는 도통 같은 데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동상이몽의 부모 사이의 아들 데이비드는 심장질환이 있고, 무리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모니카는 병원이 가까운 도시를 선호한다.


이 간단한 스케치를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와 비교해보면, 미나리 서사의 '무맥락성'이 먼저 드러난다. 이민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삶의 고통을 안고 와서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배경적인 서사가 없기 때문이다. 지방이면 어디고 서울이면 어떤 집안 출신인가. 말투로도 지역이나 출신이 드러나진 않는다. TV를 보던 할머니(데이비드 기준)가 너희들이 좋아하던 노래 아니냐고 묻는 장면에서만 어렴풋이 이민을 꿈꾸는 부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들이 캘리포니아에선 어떤 삶을 겪었는지 알기도 어렵다. 이민자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킴스 컨비니언스와 비교해보면) 스테레오 타입이나 문화적 레퍼런스들도 이 영화에선 상당히 한정적이다.


갑자기 등장해 주요 인물로 등극하는 데이비드 할머니의 존재도 어디서 왔는지 파악하긴 어렵다. 그가 가진 특징들, 즉 손자 앞에서도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는 점, 성격이 쿨하다는 점, 요리를 못한다는 점 등을 미뤄봐도 보통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체성 조각들(지역, 나이, 취향 등)이 맞춰쥐진 않는다. 한국인 시청자에게 이 영화가 자칫 지루하거나 '먼 나라 딴 얘기'로 느껴질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특징과 연관된다. 서사가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다. 그런데 바로 이 '무맥락성'이 난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를 벗어난 '식민지 남성성'의 모습


제이콥과 모니카는 부화장(그렇다. 해처리다)에서 병아리 암수를 구분하는 감별사 일을 한다. 암놈은 자라서 알을 낳거나 고기가 되고, 수놈은 폐기된다. 제이콥은 암수 구별이 재빨라 임금이 높고, 모니카는 그렇지 않아서 집에서 병아리를 데려다 놓고 연습해서 실력이 나아지기도 한다. 홈스쿨링이 없는 지역인지 아이들은 일터에 와서 백과사전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는데 잠시 쉬는 시간에 아들과 시간을 보내던 제이콥은 병아리 수놈은 어디 가냐는 질문에 말을 돌리며 다른 말을 한다. (병아리 수놈들처럼 하늘나라로 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말. 이 말은 특히 한국 출신 이민자 남성의 정체성의 핵심을 드러내 준다.


학계의 준정설에 따르면,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 남자의 위치는 강아지 아래다. 백인 남자, 흑인 남자, 강아지 수놈, 그리고 아시아 남자다. 이민자이기 때문에 자연히 백인 남자에 비해 힘과 돈이 없다. 반면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 살며 서브컬처를 익히고 주도해온 다른 인종의 남자들(흑인, 히스패닉 등)과는 권력, 자본, 그리고 문화자본에서 모두 질 수밖에 없다. 1세대 아시아 남자는 영어도 못하고, 힘도 없고, 돈도 없으며, 같이 놀려고 해도 어디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코리 아타운이나 한인교회에 이들이 출몰하는 이유가 있는 것. 이론의 언어를 빌린다면, 남성성의 권력은 젠더 구조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권력과도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얘기로도 읽힌다. 


한국의 페미니즘 논의에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제시된 바 있는데, 해외 남성성 연구에서도 본 적 있는 '식민적 남성성'과 큰 결을 같이 한다.* 정치 및 경제 구조에서는 패권자에 굴복하거나 저항하며 삶의 고통을 맛보거나 둘 중의 선택밖에 없는 식민지의 남성이 역설적으로도 젠더 구조에서는 우월한 위치를 앞세워 '집안 여자'를 다스리려 한다는 것. 그런데 식민지를 벗어난 '식민지 남성성'의 모습은, 특히나 한인 사회와 교회와 연관이 없는 제이콥의 경우 거의 '아노미적 남성성'에 가까워 보인다. '사회에선 위계 사다리에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아무개'라는 것. 실제로 해처리에 입성한 제이콥과 모니카를 관리자가 거창하게 소개하지만 아무도 손뼉 치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현지인 노동자였다면 '그래도 나는 영어도 하고 여기 출신이다. 저들과는 다르다'라는 감상이 스치진 않았을까.


반면 제이콥은 집에서는 가장이다. 그는 몸으로 열심히 일해서 가족에게 부를 안겨다 주고 인정을 받고자 한다. 그의 선택한 인정투쟁은 농업이다. 제이콥이 병아리 감별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농부로서의 성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 보면 더 잘 이해된다. 이 사회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사다리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더 많은 한인이 이민오는 이 상황에서 한국 채소를 심어 팔면 일종의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 교회를 가지 않더라도 한인 이민자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제이콥의 농업 분투는 온갖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가 오히려 백인 노동자 폴을 고용해 함께 밭을 일궈간다는 얘기(기독교 신앙에 정도 이상으로 심취해 있다는 것을 빼면 인종차별적이지 않다는 데서 오히려 이상한 노동자)는 장치인지 감독 본인의 희미한 기억에서 나온 얘기인지 명확하지 않다. 제이콥은 병아리 성기 감상이라는 일을 계속하면서 은행 대출로 자금을 댄 농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듯하다. 수도에서 나오는 물을 사용하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직접 우물을 파서 농장에 물을 댄다. 데이비드가 아파 함께 병원에 갈 때도 한인마트 사장에게 샘플로 건네줄 농작물이 우선이다. 아들은 뒷전인 제이콥이 원망스러운 모니카가 울어도 그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던져 일하고 있는데, 왜?'라고 묻는 듯하다.


제이콥의 분투가 그렇게도 처절한 이유는, 그가 이 사회에서 가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였으면 세대, 지역, 학벌, 성별 등에서 네트워크를 뻗어나갔을 그에게, 아칸소에서는 동원할 인맥도 협력할 동지도 없는 것이다. 도시의 한인 교회도 나가지 않고, 작심하고 나간 지역 교회에선 말이 통하지 않아 얻을 것도 없다. 오히려 데이비드가 영어를 무기로 친구를 만든다는 점은 흥미롭다. 미국 사회에선 영어가 서툰 성인 남자보다 영어를 하는 어린아이가 힘이 더 센 것인가.


영화는 만족스러운 수확물을 싣고 도시에 내다 팔려던 제이콥의 꿈이 좌절되면서 급작스런 파국을 맞이한다. 계약했던 도시의 한인이 더 이상 채소가 필요하지 않다고 통보해온 것. 제이콥은 패닉한다. 어떻게 살려놓은 채소인데. 우물이 마르자 비싼 수도세를 내가며 물을 대온 피 같고 금 같은 수확물이 아니던가. 대출금은 또 어떤가. 이번에 망하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아들 데이비드의 심장질환 체크업을 하러 병원에 가야 한다. 제이콥은 마침 도시에 가는 김에 한인마트 사장에게 선보일 채소 샘플박스를 챙긴다. '이걸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니카와의 싸움에 지쳐 다시 운전해 돌아오는 길에 부부는 집 근처에서 이상한 연기를 맡는다. 건강을 잃은 할머니가 물건을 태우다 실수로 불이 번져 농작물을 저장해둔 창고에 불이 붙은 것. 제이콥과 모니카는 채소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매캐한 연기를 견딜 수는 없다. 한 때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듯했던 수확물들은 모두 타버리고, 지친 가족은 오랜만에 모두 거실에서 함께 잠을 청한다.


제이콥이 미래를 걸고 만들어낸 결과물은 타버렸어도, 할머니가 물가에 심어둔 미나리는 잘만 자란다. 미나리는 물만 있다면 어디서든 잘 자란다. 마치 새로운 나라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도 생존해온 이민자들처럼. 이민자는 미나리다.


* 그럼에도'식민지 남성성colony masculinity'과 '식민적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이 영화는 자전적 영화다. 정이삭 감독은 1978년생의 이민자 2세로, 아칸소에서 본인을 키운 부모님의 기억에 기반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 노동자가 세탁소나 식당 등 자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 굳이 미국에서 농업에 뛰어든 것은, 실화에 기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킴스 컨비니언스>의 주인공 가족 중 아빠는 편의점을 운영한다. 대중문화의 상상력에서 아시아 이민자 남성이 동네에서 장사하는 아저씨인 것은 아마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


둘째, 이 영화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징적 영화다. 감독은 또 영화가 모두 실화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나의 이민자 이야기'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이민자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영화의 제목이자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는 미나리가 이민자의 삶의 은유로서 기능한다는 점은 이 가능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영화를 함께 본 이들과는 이런 얘기를 했다. 이게 한국 영화인지 외국 영화인지 논란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한테도 중요할 수도 있다고. 이민이나 유학 경험이 없는 한국인에게 이 영화는 무언가 애매하다. 이민 오기 이전 삶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민 후에 삶의 다채로운 측면도 조명되지 않는다. 트레일러 집, 농장, 해처리, 그리고 주변 정도를 맴돌며 가족들 간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한다. '이민자가 미나리처럼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는 얘기는 알겠는데, 갑자기 수확물이 불타는 결말이며 잔뜩 자란 미나리를 보며 새로운 꿈을 꾸는 제이콥과 아들도 뭔가 공감하긴 어렵다.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첫 번째 가능성에서 이 논의를 이끌어가 보면, 이민자 2세인 정이삭 감독에게 '이민 전 삶'이란 비어있는 상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대중문화로 곁눈질하거나 부모님의 이야기로만 들어서는 완전히 다른 조건의 인간상은 그려내기 어렵다. 또 영화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예산의 문제라던지, 촬영지를 다양하게 선택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 등의 요소를 들어 미나리에 왜 한국이 나오지 않는지 추측해볼 뿐이다. 이 가능성을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감독에게 무례할 수 있기 뿐만 아니라, 그렇다면 이 영화가 왜 유난히 미국에서 각종 상을 받으며 보편적인 스토리텔링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협소하고 '무맥락적'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에, 왜 아시아인도 이민자도 아닌 사람들이 열광했을까.


두 번째 가능성을 택해 조금 나아가 보면,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삶이란 바로 이민자 삶의 조건의 본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새로운 땅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서 '무맥락적'이며 모든 영역의 자본과 힘을 결여한 '아노미적' 상태와 가까울 수 있다. 


이민자의 삶은 본국과 시간의 갭이 존재한다. 이민을 해온 타이밍에 따라 다르지만, 문화와 언어는 변화를 멈추고 저 멀리 바다를 건너온 그때의 시점에서 멈춰있다. 외국의 코리아 타운이나 한인 음식점을 가서 느끼게 되는 것이 '본국 감성'이라기보다는 '한 20년 전쯤의 본국 감성'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인사회 어른들의 헤어스타일이나 말투, 가치관, 음식점 인테리어나 장식품 등이 모두 예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들의 기억이 그때의 한국에 멈취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원본을 바다 뒤에 두고 온 상황에서도 문화적 재생산과 사회화는 필요하다. 나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고백하건대 유학 생활 중에는 목사님 아들들과 베프가 된 적도 있었고, 한인 교회에 자주 나가 예배 시간엔 졸고 식사가 시작되면 그립던 한국 음식을 탐닉했었다. 워싱턴 D.C.의 차이나타운에 대한 소논문을 쓰면서 이상하게 인테리어가 더 후지고 오래된 곳에 중국인들이 더 식사를 많이 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었다. 모국의 음식을 먹고, 언어를 사용하며, 문화를 경험해 사회화되는 시간이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모국과의 타입 갭, 그리고 문화를 계속 삶으로 경험할(relive) 필요를 종합해보면 이민자의 삶이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면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를 증명해줄 것들이 눈이 보일 때마다 그것들을 따라 어떻게든 길을 터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는 희미하게 남아있고, 온통 구름이 껴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이 미지의 땅에서 무언가 강력한 것을 붙잡아야 한다. 일부 이민자가 민족에, 종교에, 문화에, 언어에 그렇게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흥미롭게 생각했던 현상 중 하나는, 유학 중에 만난 많은 한국 남자들이 한국에서 만큼이나, 또는 아마도 더 나이 위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었다는 점이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수평적인 문화에 녹아들어 한인들 사이에서도 나이 위계가 느슨해졌을 만한데도, 희미한 이곳에서 정체성을 붙잡기 위해서 나이의 힘을 빌린 이들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불안한 정체성, 맥락을 잃은 (남성의) 삶


평소 가부장적인 남성성에 비판의 날을 갈고 있는 나는, 제이콥과 공감하기보다는 반쯤은 지루하게, 반쯤은 의심의 시선으로 그의 분투를 지켜봤다. 내가 평생 화이트칼라 종류의 일만 해왔으며 현재 비혼 무자녀라는 점도 유효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이콥의 투쟁에 대해서 생각해볼수록, 유학생활 중의 나의 삶의 모습이 겹쳐졌다. 대학원생이라는 점이나 교회를 안 간다는 점, 사회생활이 좁았다는 점 등에서 '불안한 정체성, 맥락을 잃은 삶'과 제이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앞'이라는 방식의 사고도 비슷했던 것 같다. 가난한 아시아인이었던 내가 성공하려면 오직 대학원에서 살아남는 방법 밖에 없었다.


존재론적 안보(ontological security)라는 개념을 배운 적이 있다. 정체성이 특정 상징이나 관념과 밀접하게 결부돼 의미가 고정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얘기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항상 흔들리게 되어있다. 따라서 정체성의 안정을 추구하는 행위자는 사회적 퍼포먼스와 그에 동반되는 반응을 통해 정체성의 의미를 고정시키려(fix meaning)한다.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불안한 정체성의 특질은 남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존재론적 안보로 테러리즘을 설명하고자 시도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테러리스트가 남성이라고 이론적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 물론 특정 구조에 의해 정체성이 더 불안할 수는 있지만(젠더, 인종 등) 다양한 현대사회의 조건들로 인해 정체성의 불안이 모두에게 증대되는 측면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어려운 개념까지 들먹여가며 이 논의를 끌어가는 이유는, 어둠 속을 지팡이로 짚어 어떻게든 나아가는 듯한 제이콥의 모습이 불평등하고 불안정하고 많은 경우에 불안한 현대인의 삶과 닮아 있지 않나 하는 가설을 던져보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민자의 삶이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상징(미나리 등)들과 공명할 가능성이 딱히 높은 것이 아닌 미국 또는 서양의 일반 관람자들이 제이콥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위태한 삶(precarious life)' 정도를 본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다. 미나리가 토크니즘(tokenism)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끌어낸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지점이 모색되는 것은 아닌가. 맥락을 바꿔 현재의 한국 사회에 대입해봐도, 맥락을 잃고 보이는 기회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종류의 삶은 코로나와 부동산에 좌절해 주식과 비트코인에 운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결말 이후 가족의 삶이다. 특히 제이콥이 어떻게 집착을 버리고 가족과 기대며 농장을 운영해나갔을지가 궁금하다. 그는 '가장'됨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성공적으로 일과 가족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을까. 그는 경주마처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일터로 자신을 내몰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남성성 구조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미국 사회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데이비드는 영어 실력과 교육의 기회를 통해 새로운 역량을 키울 수 있었을까. 제이콥보다 더 풍부한 문화자본을 습득해 업데이트된 젠더 의식으로 새로운 남성성을 꽃피웠을까. '남자답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찾았을까.


아마 좋은 글은 질문으로 시작해 해답으로 끝나는 것일 거다. 하지만 길 위에서 쓰는 이 글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난다. 얼마 전에 '실패를 예감하며 실패로 전진하기'라는 문구를 읽고 감탄했었다. 딱 내가 던지고 있는 질문의 모습일 거다. 아마 실패할 거고, 아마 결국 어느 지점에서 시대의 산물로, 꼰대로, 남자 꼰대로 끝날 것이다. 그래도 다음 질문으로 나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글로 들어가 다음 질문으로, 또 다음 질문으로...


참고한 자료(학술자료는 생략)


https://m.khan.co.kr/amp/view.html?art_id=202102131120001&sec_id=940100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7259

https://www.google.com/amp/s/www.bbc.com/korean/news-56192427.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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