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 Under..

정착을 위한 2주간의 여정.

by 연금술사

2006년 2월… 여름이었던 남반구의 대륙.. 캥거루, 코알라의 나라..


꿈을 좇아 사람들이 해외로 간다지만 난 생계를 위해 해외로 가야 했다. 어둡고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아니었다. 이제는 먹고 사는 데에 집중하고 뜬구름 잡는 꿈을 꾸지 말자고 다짐했다. 당시 인구 100만 명 정도였던 남호주의 주도에 있는 공항. 인천공항의 10분의 1 규모나 될까 하는 공항에 학교에서 나온 담당자가 가져온 차를 타고 학교 숙소로 향했다. 분명 외국인데 바깥의 풍경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같았다. 2층을 넘지 않는 건물들.


유학원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자금도 넉넉지 않아 소위 정착서비스 같은 건 꿈도 못 꿨다. 서울에서 학교 담당자와 직접 연락해서 학교 기숙사를 숙소로 잡았다. 시멘트 블록을 쌓아서 페인트만 칠한 벽, 1인용 침대하나 작은 책상 하나 그리고 백열등 스탠드. 창 밖으로는 저 멀리 바다가 살짝 보이는 풍경이었다. 방학이라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건물의 벽이 시멘트 블록인 데다가 회색빛 벽이었다 보니 감옥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용 부엌에는 전기화덕과 전자레인지 그리고 냉장고가 구비되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면 1인실 감옥 같았지만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내 상황과 관계없이 평화로웠다. 파란 하늘, 맑은 공기 그리고 조용함..


숙소를 계약한 기간은 2주. 그 시간 안에 가족이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서울처럼 부동산에 가서 방 구하겠다고 말하면 방을 보여주고 계약이 되는 건 줄 알았다. 버스도 서울만큼 다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자동차 렌트도 안 했다. 그리고 더욱이 운전방향이 반대여서 섣불리 차를 몰겠다는 생각도 못했다. 모든 것이 호주라는 나라에 대해 너무 모르고 왔음을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체감하기 시작했다. 지역 신문을 사서 그곳에 광고가 나온 원하는 집을 찾아서 거기 나온 전화로 전화를 하면 전화기를 통해 집에 대해 설명하고 주소를 말해주고 인스펙션 날자와 시간을 얘기해 줬다. 겨우 기본 회화 정도만 하는 수준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적어내고 기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법도 달랐고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한 집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세 번, 네 번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는데 다시 듣기를 어떻게 하는 줄 몰랐다. 집을 서너 개 알아보면 20불짜리 공중전화 카드는 절반 이상 충전 금액이 줄어들었다.


먹을 것도 없고 지도도 변변찮은 것이 없어서 쇼핑센터를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30분을 기다리고 있어도 버스도 오지 않고 심지어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캠퍼스 내에 위치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기숙사로 다시 돌아와 직원에게 물으니 일요일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얘기가 돌아왔다. 아내가 서울에서 떠날 때 혹시 모르니 햇반 10개와 컵라면 10개를 넣을 때 난 한사코 짐만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는데 그것 아니었으면 굶어 죽을 뻔했다.


학교에서 나누어 주었던 간단한 지역지도 팸플릿을 이용해서 길을 찾았다. 지역신문과 지도를 보고 겨우겨우 버스를 타서 렌트 광고 집을 찾아가면 인스펙션이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한 곳을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언제 연락을 주냐고 물었더니 곧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난 그 집이 계약되는 건 줄 알았다.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스펙션 방문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집주인이 그중에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1주일이 지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살림살이를 다 포장해서 이제 1~2주 사이면 도착을 하는데 주소지가 없으면 어느 곳에 보관을 해야 하고 보관료와 그 이후 배달하는 배달비가 추가로 지불돼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시간과 자금의 압박에 그냥 돈이 좀 더 들더라도 정착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원 같은 곳에서 하는 서비스였는데 2천 불 정도를 받고 집과 자동차를 구하는 것을 돕는 서비스였다. 여러 구설들이 많은 서비스여서 안 하고 싶었지만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니 방법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우리 상황에 그 큰돈을 쓸 수 없으니 좀 더 노력해 보자고 했다. 나를 이해 못 해 주는 것 같아 섭섭했지만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열심히 돌아다니며 집을 찾았다.


쇼핑센터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먹을 것을 샀는데 인스턴트 죽 같은 아시안 음식과 소시지를 한 뭉텅이 샀다. 요리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그거면 될 줄 알았는데 1주일째가 되기 시작하니 소시지에서 고기 누릿 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난 그 소시지는 사 먹지 않는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열흘 동안 차가 없으니 버스를 타고 집을 찾아다니며 많은 거리를 걸었고 먹는 것이 변변찮으니 몸무게가 10킬로가 줄어들었다. 저울로 재어보지 않아도 바지가 커진걸 알 정도였다. 하루는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보러 갔다. 택시 기사도 그곳을 잘 몰라 길을 헤맸다. 차가 없이는 학교를 갈 수가 없는 거리였다. 인스펙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터벅터벅… 하늘은 너무 파랗고 거리는 조용했다. 지나가다 어쩌다 만나는 호주인들은 Good day, mate!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눈물을 흘렸다. 자괴감, 허무함, 책임감, 상실감…여러 감정이 쏟아졌다.


다행히 기숙사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집을 구했다. 그전 집들은 유학생이라는 조건 때문에 집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집주인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학교 근처에 새로 지어진 2층 집이었는데 예산을 넘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유학생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렇게 2주간의 정착을 위한 여정을 마치고 호주에서 첫 집을 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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