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간호 유학..

적성은 남의 나라 얘기..

by 연금술사

2주간 몸무게가 10킬로가 빠질 정도의 강행군과 피로도 때문에 얼마짜리 렌트가 구해지던 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서울에서 이삿짐은 올 때가 돼 가는데 집을 못 구했다면 어디다 짐을 맡겨야 하고 추가 비용이 들고 짐을 받고 정리하는데 일하는 사람들하고 실랑이를 했을 것이다. 다행히 짐 도착하기 4일 전에 집을 구했다.


임시 숙소에서 계약한 렌트 집으로 이사한 후 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덮고 잘 이불도 침대도 밥을 할 수 있는 밥솥도 먹기 위한 숟가락도 젓가락도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만 있으면 가사도구가 도착할 것이어서 작은 솥 두 개와 숟가락 하나 그리고 스팸을 샀다. 쌀도 샀다. 그렇게 밥을 지어서 스팸과 한 숟가락 떴는데 천국의 맛이었다.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을 사놓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계절은 여름이었기에 음식을 상온에 오래 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저녁으로 먹었던 스팸을 뚜껑만 덮어 놓고 부엌 한 구석에 두었다. 다음 날 학교를 다녀와서 먹을 생각으로 최대한 부엌 구석 시원한 곳에 두었다. 학교를 마치고 신나게 스팸과 저녁을 먹을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는데.. 스팸을 놓은 곳이 시꺼멓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라서 가까이 들여다봤는데… 개미 때.. 개미가 스팸을 뒤덮어서 시꺼멓게 보였던 것이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고 허망한 마음과 동시에 황당하기까지 했다. 아니 왜 집에 개미가? 새로 지어진 집이? 부엌 싱크대 쪽을 보았더니 파이프가 연결된 벽을 통해 개미들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호주의 야생을 처음 겪었다. 자연이 깨끗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주택 마감의 상태가 그저 황당한 상황인 것이었다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더 있지만 렌트를 구하고 첫 번째로 각인된 호주의 기억이었다.


유학생들의 배경을 물어보면 정말 다양하다. 순수하게 외국에서 유학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 보다는 호주 같은 경우는 이민을 고려하고 유학을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 같은 경우도 있었고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온 친구도 있었고 한국에서 간호사를 병원에 근무하다 왔던 친구도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간호가 적성에 맞는지 어느 병동에서 일하고 싶은지 어느 병원이 좋은지 같은 주재가 오갈 때 사실 나는 그 얘기에 끼어들지 못했다. 누군가 나에 물었을 때 난 먹고살려고 이 공부를 하는 것이지 적성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을 했다. 남편의 실패로 따라온 아내가 있었고 1살짜리 딸아이가 있는데 피 보는 것이 무섭고 토사물을 치우고 대소변을 치우는 것이 역해서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그땐 그냥 견디고 살아남아야 하니 무조건 한다였으니까.


어학원을 졸업했다지만 막상 학교를 다녀보니 또 다른 세상이었다. 어학원은 정말 천국이었고 온실 같은 곳이란 것을 깨 달았다 수업은 태반을 못 알아 들었고 읽어야 하는 독서량도 어마어마했고 제출해야 하는 에세이는 매일매일이 영어 테스트였다. 에세이를 제출하고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빨갛게 줄이 쳐진 곳에 unclear라는 마킹을 보면 골치가 아팠다. 재미있었던 건 그 부분을 일본, 중국, 한국 유학생들을 보여주면 이해하는데 정작 학교 선생님은 이해를 못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당연히 우리가 문제였던 거였지만.


간호대 첫 학기 첫 번째 에세이의 주제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1000자짜리 에세이었었는데 토픽이 “What is nursing?”이었다. 그 1000자짜리 에세이를 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간호가 간호지 이걸 뭘 말하라는 건지. 에세이 형식이어야 하기 때문에 서문이 있어야 하고 주장하는 바가 본문에 들어가야 하며 그 주장의 근거로 어디서 어떤 글을 인용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엔 결론으로 정리르 해야 했다. 거기에 레퍼런스 한 책이나 articles 등을 Harvard Reference guide에 맞춰서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수석 같은 것을 꿈꾸지 않고 “PASS”가 목표였기에 수려하게 쓰거나 할 요량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 하는 에너지와 스트레스의 강도는 HD를 받기 위해서든 P를 받기 위해서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주의 대학은 성적을 High distinction, Distinction, Credit, Pass 그리고 Fail로 나눈다. 50점을 넘기면 Pass였다. 사실 Credit 정도도 난 감지덕지했다.


남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간호대 졸업해서 훌륭한 간호사를 꿈꿀 때 난 우스워도 좋으니 졸업해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행히 운이 좋게도 당시엔 간호사가 많이 모자랐고 졸업만 하면 공립병원에 대부분 취업을 했다. 적어도 내 주변엔 공립병원에 취업을 못해서 고생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유학생 들도 로컬 학생들과 취업의 기회가 공평했다. 요즘은 로컬 학생 우선 정책을 펴기 때문에 유학생이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다.


다행히 비위가 좋아서 환자의 대소변을 보고 괴로워하는 일이 적었고 토사물을 보고 정리하는 일도 악취가 나는 환자의 몸을 씻기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했고 가장의 책임을 미룰 수 없었고 더 이상 부모님께 의존하면 안 됐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맞겠지만 나에게 실패는 참을성을 길러 주었고 책임에 대한 무거움을 알려 주었고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나에겐 무용담이고 술 마시며 얘기할 안줏거리가 되었지만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무모한 길을 지나왔던 것이었다.


호주의 간호대학엔 엠티도, 동기라는 개념도, 선배라는 것도 없었다. 과 동기라는 개념은 정말 존재하지도 않았다.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스케줄에 맞춰 과제를 내고 피드백을 받고 수업이 끝나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학생들은 처음엔 유학생끼리, 그러다가 같은 대륙끼리.. 그러다가 결국엔 같은 나라 출신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된다. 좋은 경우도 있지만 나쁘게 관계가 정리될 때도 많았다. 아무래도 좁아지는 관계가 되고 살아온 배경이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어울리다 보니 생기는 문제였던 것 같다.


간호던 어떤 공부던 적성에 맞을까를 고민해 보고 본인이 확실한 성향이 있다면 그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선호가 없고 하고자 하는 것에 어떤 희망이 보인다면 너무 적성이 맞을까 맞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것보다 해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설령 그 길이 정말 아니어서 다른 길로 가더라도 지나왔던 과정에서 배우는 인생의 교훈이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던 사람은 성장하게 된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회사를 뛰쳐나와서 중국을 거쳐 호주에 와서 간호사가 되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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