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욕먹는 꼰대의 정체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

by 한자루




입학식의 마법은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교문 앞의 환영 현수막은 먼지에 찌들어 철거됐고, 우리들의 새 실내화는 이제 복도의 왁스 냄새와 적당히 타협한 칙칙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학교는 더 이상 꿈과 희망의 전당이 아니었다.

그곳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우리를 효율적으로 가둬두는 거대한 통조림 공장이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우리를 언젠가 학력고사 점수라는 완성품으로 출고될 원자재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국어 선생님이자 담임이었던 김도현 선생님은 예외였다.


두 번째 국어 시간, 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출석부를 부르는 대신, 분필을 들어 칠판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칠판을 긁는 그 건조한 소리만으로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1988년의 교실에서 정적은 대개 폭풍 전야의 공포를 의미했지만, 김도현 선생님이 만들어낸 침묵은 조금 달랐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일종의 입국 심사 같았다.

“이제 너희들은 모두는 중학생이다.”

누구나 아는 말이었지만, 그날 그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러니까 이제는 외워서 끝내는 수업은 안 한다. 국어는 정답을 맞히는 과목이 아니라, 너희 속에 숨겨진 생각을 꺼내는 과목이다.”

칠판에는 굵은 글씨로 다섯 권의 소설 제목을 적혀 있었다.

이른바 한국 근현대 비극 전집이자, 우리 아버지들의 자서전이기도 한 소설의 제목들이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건 다들 알지?”

선생님은 분필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말했다.

“비 오는 날, 아내가 죽어가는데도 인력거를 끌러 나가는 가장. 무능해 보이지만 도망치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책임진다는 게 항상 멋있게 보이진 않는다는 걸 이 소설은 보여준다.”

선생님은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범선의 '오발탄' 이건 조금 더 답답한 아버지다.” 선생님은 칠판을 톡 두드렸다.

“열심히 사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늘 미안해하는 사람.”

교실이 조용해졌다.

“시대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괜히 떠올렸다.

"계속해서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

아이들은 제목을 보며 키득거렸다.

선생님은 몇 초 뒤에야 말을 이었다.

“이 작품엔 말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가족 안에서도.”

아이들 몇 명이 슬쩍 서로를 봤다.

“권위는 꼭 소리를 크게 낼 필요가 없다. 침묵으로도 사람을 누를 수 있다.”

나는 TV를 보고 있던 아버지 얼굴이 스쳤다.

선생님은 분필을 내려놓고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칠판의 위에 적힌 또 한 편의 제목을 가리켰다.

황순원 '카인의 후예'

“이건 너희 할아버지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너희 아버지들이 평생 입을 다물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88년의 우리에게 6.25 전쟁이나 해방 직후는 교과서 속의 박제된 연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도현 선생님은 그 먼 과거의 파편이 어떻게 우리 집 저녁 식탁의 무거운 침묵으로 이어졌는지를 짚어내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형제와 이웃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그 잔인한 겨울, 우리들의 아버지는 그 공포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소설 속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형제를 배신하고 이웃을 고발한다. 그게 ‘카인의 후예’라는 이름의 뜻이지. 직접 죄를 짓지 않았어도, 그 비극의 그림자 아래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평생 죄책감과 침묵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 그게 어쩌면 바로 너희 부모님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칠판 앞에서 잠깐 등을 돌렸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왜 그렇게 지나온 과거에 대해 말을 아끼는지, 왜 가끔 허공을 보며 서글픈 눈을 하는지... 이 소설을 읽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 세대는 침묵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지켜온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그 말이 괜히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눌러왔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완성된 어른의 모습으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을 듣고 보니, 아버지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형제끼리 총을 겨누던 그 미친 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자라난 상처 입은 소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소설은 박완서.” 그 이름을 말할 때 선생님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다.”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죽음이나 아버지. 둘 다 막 중학생이 된 소년들이 자주 꺼내는 단어는 아니었으까.

“이 소설은 사건이 많은 이야기는 아니다.”

선생님은 교탁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고, 가난도 나오고, 시대 얘기도 나오지 만, 누가 죽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그런 걸 외울 필요는 없다.”

선생님은 칠판에 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 소설이 진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선생님은 또 말을 잠시 끊었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거다.”

그 말이 교실 안에 천천히 퍼졌다.

“살아 있을 때는 잘 몰랐던 사람을 죽고 나서야 다시 보게 되는 이야기다.”

나는 책 위에 손을 얹은 채 그 문장을 곱씹었다.

잘 몰랐던 사람.’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 말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했다.

“그냥...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이다.”

그 말이 왠지 더 어려웠다. 영웅도 아니고, 악당도 아닌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라는 걸까.

선생님은 분필을 내려놓고 우리를 돌아봤다.

“이 작품들에 나오는 아버지는 모두 다르다. 근데 한 가지는 같다.”

아이들이 숨을 죽였다.

“자기 선택과, 자기 시대를 온몸으로 버텼다는 거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아직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아버지를 떠올릴 때 오늘 읽은 소설들이 같이 떠오를 거다.”

그날 숙제는 간단했다.

“다섯 작품 중 하나만 골라라. 그리고 써라.”

선생님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줄거리 요약은 필요 없다.” 그 말에 다행이라는 듯이 교실 뒤쪽에서 누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이걸 써라.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글씨는 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또렷했다.

“소설 속 아버지를 써도 되고, 너희 아버지를 써도 된다.”

선생님은 우리 얼굴을 한 명씩 바라봤다.

“좋아해도 된다. 싫어해도 된다.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써도 된다.”

그 말에 나는 괜히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좋다, 싫다로는 딱 나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솔직한 거다.” 선생님은 분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국어 시간은 정답을 맞히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을 들키는 시간이다. 질문 있나?"

김민호 선생님은 기대하지 않는 눈빛으로 물었다.

우리 반 1등 김명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이 소설들이 중간고사 시험에 나오나요?"

그것은 1988년의 모범생이 던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비극적인 질문이었다.

세상 모든 가치가 점수로 치환되던 시절, 명호에게 아버지는 시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 불필요한 데이터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한동안 조용히 명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번 중간고사와는 크게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희들 인생의 중간고사와는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싶구나.”

명호는 실망한 얼굴로 다시 교과서에 얼굴을 파묻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축제를 준비하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김민호 선생님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그 구부정한 거인들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1988년의 봄, 우리는 우리가 결코 정답을 맞힐 수 없는 시험지를 하나씩 받아 들었다.

그것은 4지 선다형 문제집에는 나오지 않는, 그러나 평생을 걸쳐 풀어야 할 아버지라는 이름의 숙제였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하나둘 책을 덮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라면 매점 앞 떡볶이 가격이 50원 오른 것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을 우리였지만, 오늘 기남이의 안색은 유독 파리했다.

녀석은 어깨에 멘 커다란 카이카이 가방 끈을 터질 듯 거머쥔 채 걷다가, 갑자기 길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 마치 인류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자 같은 표정이었다.

“야, 럭키보이. 우리 담임... 혹시 사이코패스 아닐까?”

“갑자기 뭔 소리야? 뜬금없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길가에 굴러다니던 빈 깡통을 툭 찼다.

하지만 기남이의 눈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녀석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쏘아붙였다.

“아니, 생각을 해봐. 남의 집 구린 걸 왜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냐고. 담임,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우리 아빠가 뭐 지폐에 나오는 세종대왕도 아니고. 이 숙제는 사기라고, 사기!”

나는 대답 대신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를 멀리 찼다.

돌멩이는 포장되지 않은 길 위를 몇 번 구르더니 시커먼 하수구 속으로 퐁당 빠져버렸다.


기남이는 14살 소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정당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학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은밀한 가정사를 원고지 위에 강제로 발설하게 만드는 기묘한 검문소 같았다.

김민호 선생님은 국어에 정답이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라는 제목 아래에 존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때 돌아올 매타작의 두려움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기남이의 말대로, 우리들의 아버지는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480원짜리 휘발유 가격에 미간을 찌푸리고, 일요일이면 거실에 누워 TV 리모컨을 배 위에 올린 채 낮잠을 자는 평범한 남자들이었을 뿐이다.

“야, 그냥 대충 써. 이순신 장군처럼 썼다고 해서 담임이 너희 집 확인하러 가겠냐?”

내가 건넨 위로는 기만이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너무나 빈약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산 학원에서 배운 덧셈 뺄셈으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진실효도 사이의 기괴한 관계 속으로.


“아니, 이번 숙제는 우리 같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담임은... 외계인이야.”

나는 결국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야, 너는 아직도 외계인 타령이냐. 유치하게.”

“아니, 진지하게 들어봐! 내가 어디 책에서 봤는데 마이클 잭슨이나 엘비스 같은 외국 가수들도 외계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어. 어쩌면 사람들 중에 정말 외계인이 숨어있을지 누가 알아?”

기남이의 헛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거기 신입생. 길에서 누가 잡담하래! 흠 근데 니들 표정들이 왜 그 모양이야. 야, 설마 일진한테 삥이라도 뜯겼냐?”

형. 영진이었다.

“아니. 형” 기남이가 대신 대답했다.

“형, 김도현 쌤 알지요?”

“알지. 그 양반, 우리 때도 유명했지. 니네 반 담임이라며? 고생문이 훤하겠군. 야, 근데 그 숙제... 대충 써라. 열심히 할수록 귀찮게 하는 양반이니까. 나 봐라, 대충 사니까 이렇게 멀쩡히 살아남았잖아.”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형에게 말했다.

"형은 원래 모든 걸 대충 하잖아..."

순간 형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이 자식이...”

형은 내 뒤로 와서 팔을 내 목에 걸었다.

헤드락이라고 하기엔 너무 느슨하고 풀어주기엔 애매한 각도였다.

형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야, 이게 대충이야? 이건 전략이거든. 살아남기 전략.”

내 머리는 순식간에 헝클어졌고 기남이는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킥킥대고 있었다.

형은 괜히 더 힘을 주는 척하다가 여학생들이 놀라서 쳐다보자 슬쩍 팔을 풀었다.

그 모습이 꼭 자기가 이긴 싸움처럼 어깨를 으쓱이는 사람 같아서 괜히 더 얄미웠다.


버스 안에서 기남이가 갑자기 나를 툭 치며 물었다.

“야.”

“왜?”

“근데 너네 아버지는 회사에서 뭐 하시는지 알아?”

“뭐 그냥... 회사 다니시지.”

기남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그러니까. 회사에서 뭐 하시냐고? 과장인지, 대리인지, 부서 같은 거 있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부림전자이라는 회사에 부장이라는 것 외에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우리 집이라는 일일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정작 카메라 앞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숨겨진 같은 존재였다.

엄마의 대사 속에서 아버지는 늘 전지전능하고 두려운 주인공이었다.

“아빠 오시면 그때 말해.”, “아빠 퇴근하실 때까지 숙제 다 끝내놔라.”, “이건 아빠 허락받아야 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그 거물급 주인공이 현관문을 열고 실물을 드러낼 때쯤이면, 우리들의 연극은 이미 막을 내리고 조명까지 꺼진 뒤였다. 실체는 없는데 영향력은 막강한 사람.

한 번도 제대로 대화해 본 적 없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결정권을 쥐고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

그때 형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야, 우리 아빠?”

형은 괜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욕먹는 꼰대라고나 할까.”

“아침에 출근해서 욕먹고, 점심 먹고 욕먹고, 저녁엔 회식하면서 또 욕먹고.”

기남이가 킥 웃었다.

“그럼 일은 언제 해요?”

“욕먹는 게 일이지. 욕먹으면서 일하고.” 형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게 직장인의 기본 스킬이라는 거야. 니네 아버지는 안 그런 거 같아?”

나는 웃으면서도 괜히 가슴 한쪽이 찔렸다.

형이 나를 힐끔 보며 물었다.

“웃기는... 그럼 너는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알아?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네?”

내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알거든.” 괜히 말이 빨라졌다.

“단지... 정확한 표현이 안 떠오를 뿐이지.”

형은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내 머리를 한 번 헝클었다.

“아. 그러시겠지. 좁밥 양반.”

나는 버스에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같은 생각만 했다.

'근데... 진짜 뭐 하시지?'

아버지는 분명 매일 집에 보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모르는 장소에 하루의 대부분을 두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배경이었지, 한 명의 인간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나는 집에 가자마자 책가방을 방에 던져놓고 TV를 켰다.

딱 맞춰 동물의 왕국이 시작될 시간이 있었다.

형은 "야. 또 동물의 왕국이야? 중학생이 되고도 변하질 않네. 넌 나중에 아프리카에서 살면 딱이겠다."

그리고는 책가방을 방에 던져 놓고는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 나 친구 좀 만나고 올게요."

"영진아. 집에 오자마자 또 나가는 거니?" 그러나 이미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 늘 똑같은 성우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렀다. 낮고, 건조하고, 감정을 싣지 않는 그 목소리.

'저 아저씨도 어느 집의 아버지겠지?'

나는 별스럽지 않은 생각을 하며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화면에는 해가 기울어가는 초원이 나오고 있었다.

'해질 무렵, 초원의 가장자리에서 하이에나 무리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늘 사냥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네요. 무리 가운데 한 마리의 수컷이 다른 개체들과 약간 거리를 둔 채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무리에 환영받지 못하는 이 수컷은 먹이를 물고 오지 못했군요.
사냥에 실패한 하이에나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화합니다.
다른 개체들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오갑니다.
암컷들은 굳이 다가가지 않고 새끼들은 본능적으로 장난을 멈춥니다.
무리 전체가 이 수컷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수컷 하이에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실패했다고 해서 내일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라는 걸.'

해설자는 조금 느리게 말을 잇는다.

하이에나는 초원의 가장자리를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강한 포식자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 살아남는 종 중 하나입니다.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을 먹고, 다시 다음 날을 준비합니다.

엄마는 찌개 냄새를 풍기며 밥을 먹으라 재촉했지만, 나는 동물의 왕국에 하이에나가 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에 TV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저녁밥 먹고,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주방 옆에 서서 물었다.

“엄마.”

“응?”

“아빠 직업 뭐야?”

“회사 다니시잖아.”

“그건 알지. 근데... 회사에서 뭐 하시냐고. 부서 같은 거.”

엄마가 수세미를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왜, 학교에서 물어보디?”

“응. 국어 숙제인데 아빠에 대해 써야 되거든. 근데 뭐라고 써야 하나 해서.”

엄마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부림전자... 알지? 거기 해외영업부 물류 관리 부장이야.”

“해외영업부? 물류 관리?” 단어들은 길고 복잡한데 머릿속에는 그림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뭐 하는 건데?”

“음... 쉽게 말하면 말이지...”

엄마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결국 이렇게 정리했다.

“외국에 나가는 텔레비전, 비디오, 그런 것들 배에 잘 실려 나가게 하고, 문제 생기면 책임지는 사람.”

“오...!”

왠지 굉장히 대단해 보였다.

외국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근데 그때, 거실 TV에서 뉴스가 바뀌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자, 자동차 수출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컨테이너가 실린 배들이 부두를 떠나는 장면이 나왔다.

엄마가 말했다.

“저거 봐라. 뉴스에서 말하는 그 수출 말이야. 거기에 아빠 회사도 조금은 끼어 있겠지.”

순간 가슴이 좀 두근거렸다. 우리 아빠, 뉴스에 나오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이구나.

그때 형이 옆에서 툭 끼어들었다.

“야, 너무 멋있게 생각하지 마. 현실은 그냥 물건 제때 못 보내면 욕먹는 자리니까.”

엄마가 형을 째려봤다.

“영진아. 형이 돼서 동생한테 그게 무슨 말이니. 아빠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못써.”

형은 씩 웃으면서도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뭐, 욕먹고 돈 받아오는 직업도 나쁘지 않지.”

그래도 내 궁금증은 끝나지 않았다.

뉴스도, 엄마의 설명도 어쩐지 다 겉모습 같았다. 정말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9시 뉴스가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퇴근하셨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거실 형광등을 끄고 혼자 TV 앞에 앉았다.

소파 옆 탁자에는 벌써 소주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엄마, 불 안 켜?”

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면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오늘은... 건드리지 말자.”


어두운 거실, 낡은 금성 TV의 푸른빛만이 아버지의 지친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화면 속엔 아까 봤던 하이에나 대신 서울 시내의 복잡한 야경과 화려한 앵커의 모습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내 눈엔 여전히 아까의 그 굶주린 하이에나가 아버지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거실 불이 꺼진 채로 TV만 켜져 있을 때는 아무 말도 걸지 말아야 한다는 걸.

하지만 그날 밤, 어린 나의 심장 속엔 그 무거운 정적을 깨뜨릴 만큼의 무모한 절박함이 들끓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숙제를 끝내기 위한 초조함이 아니라, 내 생애 가장 낯설고 거대한 수수께끼인 아버지라는 이름의 문을 처음으로 두드려보고 싶다는 본능적인 갈망이었다.

나는 결연한 눈빛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뉴스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 아빠에게 다가갔다.

아빠는 30분째 아무 움직임도 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빠."

내 목소리에 아빠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응. 왜 안 자고."

"학교 숙제를 해야 하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아빠, 하루 종일 회사에서 뭐 하세요?”

“뭐?”

“그러니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시냐고요.”

아빠가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겁게 입을 뗐다.

“남들이 싸지른 똥이나 치우고 다니지. 너희들 굶기지 않으려고 말이다.”

흐아... 이건 너무 구체적이라 더 이상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내 눈을 피하며 덧붙였다.

“별거 없다. 부산항에 산더미처럼 쌓인 텔레비전 박스들, 그거 제때 배 안 오면 다 쓰레기 되는 거야. 그러면 외국 놈들은 사기꾼이라고 소리 지르고, 윗사람들은 내 목줄을 죄지. 아빠는 그 사이에서 하루 종일 전화기 붙잡고 비는 거야. 제발 배 좀 보내달라고, 제발 한 번만 봐달라고. 고개 숙이고, 도장 찍고, 또 비는 거. 그게 내 일이다. 네가 생각하는 대단하고 화려한 게 아니라고. 그 정도면 숙제 쓸 만큼은 되지 않냐?”

아버지는 비워낸 소주잔을 내려놓고는 삐걱거리는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셨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낡은 관절이 내뱉는 소리는 어딘가 무거운 닻을 올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버지는 창고에서 빛바랜 천에 싸인 하얗고 긴 망원경을 꺼내 드셨다.

아버지는 정말 안 좋은 날이면 뒷마당으로 나가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오래 바라보셨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버지를 따라나갔다.

1988년의 서울 하늘은 지금보다 훨씬 낮고 어두웠으며, 그만큼 별들은 더 가깝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뒷마당 한가운데에 망원경을 세우고는 한참 동안 렌즈 속에 한쪽 눈을 파묻고 계셨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폭풍우가 지나간 뒤 길을 잃은 노련한 항해사의 뒷모습이었다.

내가 쭈뼛거리며 옆으로 다가서자, 아버지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읊조리셨다.

“아까는 미안했다. 아빠가... 좀 피곤해서 말이 거칠게 나간 것 같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과였다.

아버지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까 거실에서 풍기던 서늘한 술 냄새 대신 밤공기의 차분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아니에요. 저도 죄송해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물어봐서...”

“내일모레가 토요일이지?”

아버지가 갑자기 망원경 렌즈를 나에게 양보하며 물으셨다.

나는 엉겁결에 눈을 갖다 댔다.

렌즈 너머로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빛나는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네. 토요일이에요.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에 안 가요.”

“그래? 그러면 잘됐네. 점심시간에 아빠 회사로 한번 와라. 점심이나 같이 먹게.”

망원경 너머의 별이 흔들렸다.

“아빠 회사요? 부림전자요?”

“그래. 와서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네 눈으로 직접 봐봐.”

비록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처음으로 살짝 웃으셨다.

그것은 분명 소년 같은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