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답이 없는 질문을 하는 선생님

첫 수업

by 한자루




중학교라는 정글에서 가장 잔인한 정글의 법칙 중 하나는, 내가 앞으로 1년을 함께 숨 쉬어야 할 옆자리 주인을 결정하는 데 있어 내 의사는 0.1%도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1988년의 그날, 담임 선생님의 손에 들린 출석부는 마치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단두대의 칼날 같았다.

기남이와 복도에서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돌아온 교실은 이미 묘한 서열 정리가 시작된 뒤였다.

칠판에는 분필 가루를 날리며 좌석표가 그려져 있었고, 내 이름 석 자 정서진은 창가 맨 뒷줄, 가장 구석진 곳에 박혀 있었다.

그곳은 햇살은 잘 들었지만, 선생님의 시선으로부터는 버림받은, 이른바 무법지대였다.

그리고 내 운명의 짝꿍은 이미 그곳에 삐딱하게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석두.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묵직한 돌덩이의 기운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석두는 우리 동네에서 영진이 형만큼이나 유명한 사고뭉치의 아이콘이었다.

실제 나이는 영진이 형과 동갑이었지만, 출생 신고가 2년이나 늦어진 덕분에 그는 열여섯의 육체로 열네 살의 교실을 점령한 일종의 생태계 교란종인 셈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교장 선생님의 분재를 축구공으로 박살 내고도 하품을 했다는 그 전설의 주인공이 지금 내 옆에서 가늘게 뜬 눈으로 88 올림픽 포스터 속 호돌이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하지만 낡은 나무 의자는 내 긴장감을 비웃듯 끼이익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석두의 고개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어이, 좁밥.”

석두의 첫마디는 영진이 형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녀석의 교복 상의 안쪽에는 학교 규정 따위는 가볍게 씹어버린 청룡 마크의 가짜 실크 셔츠가 살짝 비쳤다.

“너, 영진이 동생이지?”

그 질문이 구원일지, 아니면 사형 선고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2년의 세월을 가불 해서 미리 어른이 된 녀석 옆에서, 나는 내 몸보다 큰 교복 속에 파묻힌 채로 더 작아져만 갔다.

“... 어. 그런데? 형 닮아서 그런가, 너도 참... 옷이 크다? 무슨 낙하산인 줄 알았네.”

석두는 낄낄거리며 내 교복 소매를 툭 쳤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떡하니 커다란 카이카이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 안에서는 묵직한 쇠붙이 소리가 났지만, 나는 그게 필통 소리인지, 아니면 동네 양아치형들이 들고 다니던 자전거 체인인지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어른들은 중학교가 학문의 전당이라고 말했지만, 열네 살의 내가 마주한 첫 번째 수업은 생존이었다.

내 옆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석두가 있었고, 그 폭탄의 파편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가련한 내 운명이 놓여 있었으니까.

그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기남이가 뒤를 돌아보며 입 모양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야. 너. 좆. 됐. 다.'

나는 기남이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고 싶었지만, 석두가 내 팔을 툭 치는 바람에 그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야, 정서진. 너 공부 잘하냐?”

“뭐... 그냥, 보통.”

“잘됐네. 난 1교시부터 잘 거니까, 담탱이 오면 깨워. 아, 그리고 너 4반에 수진이라고 좀 아냐? 걔 좀 귀엽던데... 너희 집 옆집이 4반 반장 다연이네라며? 흠, 개도 좀 예쁘더라.”

석두의 입에서 '잘됐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4반의 전교 일등 수진이와 다연이의 이름이 동시에 나오는 순간 나는 느꼈다.

올 한 해가 올림픽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최루탄 가스보다 더 매캐한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열네 살의 사랑은 종종 수호기사의 서사시를 꿈꾸지만, 현실은 대개 광대의 슬랩스틱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특히 내 옆자리에 앉은 마석두처럼, 존재 자체가 재난인 녀석이 내 첫사랑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비극적인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는 것뿐이었다.


중학교의 첫 수업 종이 울렸다.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던 교실은 종소리 한 번에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 앉으며, 이제 막 배정받은 자신의 영토를 확인하느라 분주했고. 50명의 소년이 뿜어내는 눅눅한 열기와 새 책상에서 나는 거친 나무 냄새, 그리고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 속에 부유하는 먼지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교실 앞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1학년 중학생에게 담임 선생님이란 단순한 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1년 동안 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할 절대 군주이자, 내 생활기록부라는 성경에 예언을 새겨 넣을 예언자였다.

나는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인자한 성자와 같은 스승이 걸어 나오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인생을 단숨에 박살 낼 파괴자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교복 소매 끝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는 여전히 올림픽 준비로 분주한 세상의 소음이 들려왔지만, 이 정적에 휩싸인 교실 안에서만큼은 오직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구두 굽 소리만이 유일한 우주의 리듬이었다.

과연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나의 방패가 되어줄 것인가, 아니면 나를 이 정글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어 넣을 포식자가 될 것인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모든 학생의 시선은 권력의 정점인 교탁과 그 옆에 입을 벌리고 있는 앞문을 향해 쏠려 있었고, 우리는 그 문이 열리는 찰나에 결정될 우리들의 서열과 운명을 예견하려 애썼다.

하지만 우리 반의 담임, 김도현 선생님은 우리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갔다.

우리가 숨을 죽이고 앞문을 주시하며 포식자의 등장을 기다릴 때, 정작 발소리는 우리들의 무방비한 등 뒤에서 들려왔다.

뒷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곳에는 출석부를 옆구리에 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앞문이라는 화려한 무대 장치를 거부하고, 학생들의 가장 추레한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뒷문을 선택했던 것이다.

칠판을 향해 꼿꼿이 세운 우리의 척추가 아니라, 책상 밑에서 꼼지락거리는 발가락과 헐거운 바지춤을 먼저 보겠다는 선전포고 같았다.


당시의 교사들에게 몽둥이는 우리들의 비뚤어진 영혼을 단숨에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종의 마법 지팡이였다. 그들은 그 단단한 나무 막대기로 소년들의 머리통을 리드미컬하게 몇 번 두드리기만 하면, 세상 어떤 말썽꾸러기도 단숨에 조신한 학자로 변할 거라 믿는 연금술사들이었다.

선생님들은 복도를 지날 때마다 그 지팡이로 손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공포의 박자를 만들어내면서 공기를 가르는 그 위협적인 소리만으로도, 막소년의 요동치는 아드레날린을 단숨에 잠재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난 김도현 선생님은 먼지 자욱한 도서관에서 방금 빠져나온 서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빳빳한 정장 대신 소매 끝이 닳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코끝에 걸린 안경 너머로는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종류의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당시 교육계에는 조용한 태풍이 불고 있었다. 이른바 참 교육이라는 이름의 물결이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을 한 명의 존엄한 인간으로 보겠다는 이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발상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결성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뜨거운 불씨였다.

김도현 선생님은 바로 그 불씨를 가슴에 품고, 낡은 교실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데우러 온 사람 같았다.


그는 교탁으로 걸어가는 대신, 맨 뒷자리에 앉은 나와 석두 사이의 통로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내 너무 긴 교복 소매를 빤히 쳐다보더니, 아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첫마디를 던졌습니다.

“옷이 참... 넉넉하구나. 마치 너희들이 채워야 할 미래처럼 말이야.”

그것은 1988년의 중학생이 들어본 가장 세련되고도 당혹스러운 농담이었다.

우리는 그가 휘두를 몽둥이에 대비해 몸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언어라는 무기로 우리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교탁으로 가더니 분필을 잡았다.

그리고 칠판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아주 짧은 한 문장을 적었다.

몽둥이와 기합이 지배하던 1988년의 교실에서, 그 문장은 마치 금지된 주문처럼 칠판 위를 하얗게 수놓았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시작하자.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선언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해진 정답만을 외우라고 강요했고, 올림픽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질문하는 법을 잊으라고 속삭였지만 오 선생은 그 짧은 문장 하나로, 우리가 갇혀 있던 번호의 감옥에서 우리를 꺼내 주었다.

정답을 맞히지 못해 고개를 숙였던 소년들에게, 틀려도 좋으니 너희만의 목소리를 내보라는 그 문장은 그 어떤 혁명보다 뜨겁게 내 가슴에 와닿았다.

교실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석두는 여전히 삐딱하게 앉아 있었지만, 녀석의 시선은 칠판에 적힌 정답이라는 글자에 박혀 있었다.

아마 녀석 역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정답이라는 단어와 친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날, 국어 교과서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우리 삶의 첫 번째 질문을 넘기고 있었다.

선정중학교 1학년 1반의 칠판 위에는 낡은 권위의 가루가 아니라, 우리가 채워가야 할 넉넉한 미래의 가루가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담임 김민호 선생님은 분필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 오늘 첫 번째 질문이다. 이 중에서 자기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있니? 혹은, 이름 말고 다르게 불리고 싶은 사람?”

침묵은 생각보다 길고 무거웠다. 50여 명의 소년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책상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당시, 교실에서 ‘선생님께 질문을 받는다.’는 건 정답을 맞혀서 위기를 모면하거나, 틀려서 매를 맞는 것 둘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 정적을 깬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내 옆에서 시종일관 올림픽 포스터를 삐딱하게 노려보던 석두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녀석의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이미 인생의 쓴맛을 다 알아버린 듯한 거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오... 석두? 그래, 석두야. 넌 이름 말고 뭐라고 불리고 싶니?”

오 선생의 부드러운 질문에 석두는 의자를 끼익 소리 나게 뒤로 밀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교복 안쪽에 살짝 비치는 그 조잡한 실크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석두 말고, 청룡이라고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교실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이내 폭탄이 터진 것처럼 웃음바다가 되었다.

녀석의 이름 ‘석두’가 말 그대로 돌머리라는 뜻이었기에, 동네에선 조롱 섞인 별명으로 쓰이곤 했다. 하지만 청룡이라니.

그건 당시 가장 잘 나가던 프로야구팀의 이름이자, 동네 형들이 문신으로 새기던 허세의 정점이었다.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녀석의 눈이 진심으로 간절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두에게 청룡은 단순히 촌스러운 깡패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는 칠판에 적힌 ‘정답이 없는 질문’ 옆에 커다랗게 '청룡' 두 글자를 적었다.

“좋다, 청룡. 오늘부터 이 교실에서만큼은 넌 마석두가 아니라 청룡이다. 자, 청룡. 네가 생각하는 청룡은 어떤 존재니?”

석두, 아니 청룡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더니, 마치 평생을 고민해 온 철학자처럼 아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 청룡은요... 그냥 힘센 뱀 같은 게 아닙니다. 청룡은... 하늘에 혼자 떠 있어도 하나도 안 심심한 놈입니다.”

교실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낄낄거리던 아이들도 녀석의 진지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석두는 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청룡은요... 땅바닥에 있는 놈들이 아무리 돌머리라고 돌을 던져도, 구름 속에 숨어 있으니까 하나도 안 아픈 겁니다. 그리고... 너무 높이 날고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 집이 어떤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런 비루한 거 하나도 못 보게 하는, 그냥 시퍼런 불꽃같은 놈 말입니다. 밑에선 그냥 ‘와, 저게 청룡인가 보다’ 하고 고개 아프게 쳐다만 보게 만드는... 그런 거요.

그것은 1988년, 선정중학교 1학년 1반에서 나온 가장 서글프고도 위대한 정의였다.

석두에게 청룡은 남을 때려눕히는 괴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 멀리 달아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던 것이다.

2년이나 늦게 도착한 중학교 교실에서, 녀석은 돌머리라는 지상에서의 별명을 버리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구름 위로 자신을 유배시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교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그것은 14살 소년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시리고, 16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고독한 고백이었다.

석두는 말을 마치자마자 쑥스러운 듯 교복 재킷을 여미어, 그 조잡한 청룡 셔츠를 다시 어둠 속에 가두었다. 녀석의 귓가는 88 올림픽 포스터의 붉은 배경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도현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적힌 청룡이라는 두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셨다.

아마 선생님은 그 글자 뒤에 숨은 한 소년의 멍든 가슴과, 그 가슴을 데우기 위해 스스로 내뱉은 시퍼런 숨결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 청룡. 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너만의 하늘을 가졌구나.”

김민호 선생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교실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석두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가죽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흔히 강해 보이는 것들은 승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날 나는 어떤 강함은 오직 들키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구멍 난 양말보다, 자신의 부서진 자존심보다 더 높이 날아올라, 세상이 자신을 동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열여섯 살 석두가 선택한 슬픈 비행이었다.

석두는 쑥스러운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의 어깨가 아까보다 조금 더 펴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복도 창문을 살짝 훔쳐보던 교무주임 최익현 선생님의 오래된 안경이 번쩍였다.

그는 멈춰 서서 칠판의 청룡과 럭키보이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김도현 선생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청룡이 옆에 정서진? 너는? 너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니?”

나는 잠시 복도 끝 1학년 4반에 있을 다연이를 생각했다.

아침 버스 안에서 나를 향해 “서진아!”라고 불러주던 그 목소리.

하지만 그때 그녀가 부른 것은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옆집에 사는, 바지춤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린 동생 같은 껍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저는... 럭키보이요. 럭키보이라고 불리고 싶어요.”

교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네가 럭키치약이냐?” “럭키금성 선전하냐?” 같은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칠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럭키보이지?” 선생님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오늘 아침에... 정말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았거든요. 버스에서 제가 좋아하는 애가 바로 앞에 서게 됐고, 그 애가 제 이름을 불러줬어요. 비록 제 꼴은 엉망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그 애 앞에서만큼은 늘 행운의 남자가 되고 싶어요.”

그것은 14살 소년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용기 있고도 오글거리는 고백이었다.

행운아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고, 운 좋은 놈이라고 하기엔 너무 투박해서 선택한 단어, 럭키보이.

아이들의 놀림은 더 커졌지만, 선생님은 칠판에 적힌 청룡 옆에 아주 정성스럽게 럭키보이라고 적었다.

그해 봄, 나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대신, 내가 스스로 선택한 나의 운명을 칠판 위에 새겼다.

담임 선생님은 분필 가루를 털어내고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좋다, 럭키보이. 네 행운이 이 교실 밖에서도 유효하길 빈다.”

그날 이후, 우리 반의 출석부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름들이 하나둘 새겨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람보가 되었고, 누군가는 맥가이버가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이 되어, 낡은 교실의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조금씩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 담임은 교탁 위에서 분필 가루 묻은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그는 칠판에 적힌 청룡과 럭키보이, 람보등, 세상 어디에도 없는 출석부를 한 번 더 따뜻하게 훑어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우리를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말과 생각을 가르친다. 올 한 해 잘 부탁한다.”

그 말은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들렸다.

정답을 외우는 법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침묵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그 선언 같은 한마디가 몽둥이가 지배하던 우리들의 야만적인 계절을 한순간에 멈춰 세웠다.

담임은 앞문이 아닌 뒷문을 열고 들어왔던 것처럼, 나갈 때도 우리들의 딱딱하게 굳은 등 뒤에 그 온기 어린 문장을 남겨두고 유유히 사라졌다.


교실은 한동안 고요했다.

내 옆의 ‘청룡’ 석두는 여전히 책상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죽 장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녀석의 굽은 등은 아까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녀석은 이제 더 이상 돌머리 마석두가 아니라, 자신의 아픈 가정사와 비루한 가난 위로 웅장하게 날아오른 청룡이었으니까.

교실 안에는 담임이 남긴 하얀 분필 가루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긴 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칠판을 보았다. 그곳엔 럭키보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아니 올해는 정말 운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