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다를 포기하고
바다가 되어 준 사람

아버지의 북극성

by 한자루




숙제는 여전히 공책 첫 줄에서 멈춰 있었다.

지우개로 문지른 흔적은 종이 위에 깊은 흉터를 남겼고, 연필심은 내 고민의 깊이만큼이나 뭉툭해져 있었다. 누군가를 '안다.'라고 생각했을 때는 쉬웠던 질문이, 사실은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닫는 순간 세상은 가장 어려운 숙제가 된다.

다행히 토요일은 이 혼란의 탈출구를 보여줄 실마리가 되어줄 예정이 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성역인 부림전자회사로의 방문을 허락받은 날이었던 것이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개교기념일은 열네 살 인생에 찾아온 합법적인 망명권 같은 것이었다.

평일 오전의 주택가는 기분 좋게 나른했고, 나는 어머니가 다리미로 정성껏 눌러 다려준, 평소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때, 거실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넘기던 형 영진이 '킥' 하고 썩소를 날렸다.

형은 마치 세상의 모든 비극을 이미 경험한 노병 같은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와, 정서진. 출정식이냐? 드디어 살벌한 자본주의 전쟁터로 끌려가는군. 가서 커피 타는 법이나 잘 배워와라. 부장님 고혈압 걱정한답시고 설탕을 줄였다간 자본주의의 매운맛을 보게 될 거다."

형의 이런 허세는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을 다 파악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잔뜩 묻어있었다.

"영진아, 너는 쉬는 날인데 네 방이나 좀 정리하렴. 그리고 네가 뭘 안다고 자본주의 타령이야?"

부엌에서 마늘을 까던 엄마가 꽥하고 쏘아붙였다.

엄마는 내 남방 소매를 한 번 더 접어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진아, 가서 아빠 귀찮게 하지 말고. 회사 사람들이 뭐라고 물으면 그냥 웃기만 해. 괜히 아는 척하다가 아빠 체면 깎아먹지 말고, 알았지? 그리고 이건 아빠 주머니에 넣어드려."

엄마가 내 손에 쥐여준 건 은박지에 정성스럽게 싼 껌 한 통과 비타민 알약이었다.

전장에 나가 있는 아버지를 위한 아내의 은밀한 보급품이었다.

나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현관문을 나섰다.

등 뒤로 영진이 형의 "살아서 돌아와라, 소년병!"이라는 낄낄거림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일하는 부림전자로 가기 위해 번호판에 먼지가 잔뜩 앉은 74번 좌석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땀 냄새와 매연이 뒤섞여 진동했지만, 그날만큼은 그 냄새가 대양을 건너는 배의 힘찬 디젤 엔진 냄새처럼 느껴졌다.

열 정거장쯤 지나자, 드디어 육중한 건물 외벽 위로 부림전자라는 황금색 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옥상의 거대한 냉각탑들이 쉴 새 없이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곳은 매일 아침 아버지를 집어삼켰다가 밤늦게야 녹초가 된 상태로 뱉어내는, 우리 가족의 평화를 위해 아버지가 매일 투항하는 거대한 회색 요새였다.


정문 옆, 유리창이 번쩍이는 경비실 앞을 지나려는데 누군가 창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어이, 학생! 여기 함부로 들어오는 데 아냐. 누구 찾으러 왔어?"

짙은 감색 제복을 입은 경비 아저씨의 눈매는 매서웠다.

대한민국에서, 평일 오전에 교복도 입지 않고 돌아다니는 중학생은 불량학생 아니면 가출 청소년 둘 중 하나로 분류되곤 했으니까 말이다.

"저... 정한수 부장님 뵈러 왔는데요. 아들이에요."

회사 건물 앞에 위축된 내 목소리가 작게 기어 나갔다.

경비 아저씨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내선 전화기를 들었다.

"해외영업부죠? 예, 여기 정문인데요... 어떤 학생이 정 부장님 아들이라고 왔어요.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아저씨의 표정은 마법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아주 정중하게 유리문을 열고 나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아이고, 정 부장님 자제분이 시구만! 어서 가 봐. 저기 본관 2층이야."

그 짧은 순간, 나는 이라는 것의 위력을 실감했다.

아버지는 이 거대한 요새 안에서 통행증 없이도 문을 열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던 셈이다.


본관 2층, 해외영업부라고 적힌 육중한 나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수십 대의 전화기가 합창하듯 울려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사내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사무실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의 한복판, 가장 안쪽 책상에서 전화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채 서류에 뭔가를 거칠게 휘갈기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버지였다.

그는 평소 집에서 보던, 신문 뒷장에 가려져 있던 그 무기력한 중년 남성이 아니었다.

그는 빗발치는 포탄(전화벨) 속에서 냉정하게 좌표를 찍는 지휘관처럼 진지해 보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아버지는 전화기에 대고 "오케이, 그럼 로테르담항으로 바로 쏴!"라고 외친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순간, 지휘관의 날카로운 눈빛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어, 왔냐?"

아버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대리, 과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 부장님 아드님이세요? 와, 얼굴이 똑 닮았네~”

“안녕하세요...”

“몇 학년이야?”

“중1입니다.”

나는 어색하게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집에서는 TV 앞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사람이 여기서는 부장님으로 불리며 사람들을 움직이는 중심이었다.

좀 멋있는데? 그게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아버지 자리에는 커다란 책상과 서류 더미, 전화기 두 대와 빨간색, 파란색 버튼이 잔뜩 달린 교환기가 있었다.

“여기 좀 있어봐.” 아빠는 책상 옆에 있는 가죽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근데 책상 위에 서류 건드리진 말고.”

아버지는 양복 재킷을 뒤에 걸린 의자에 앉더니 소매를 다시 걷어붙이자 금방 얼굴이 달라졌다.

집에 있을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고, 말 속도가 빨라졌다.

“필요하면... 4분기 물류 보고서 다시 뽑고요. 아, 네. 그 자료는 최상무 님 방으로 바로 올려 보내세요.”

“예, 예. 이번엔 제때 나가야 됩니다. 지난번처럼 늦으면 우리 쪽이 다 뒤집어써요.”

전화기를 바꿔 들고, 때로는 수화기를 목 밑으로 잠시 내리고 옆 사람에게 짧게 지시를 내렸다.

“어제 그 분기 집계표, 숫자 다시 확인해 보라고 해요. 저쪽에서 또 뭐라고 하면 이번엔 절대 못 넘어갑니다.”

왠지 같은 사람인데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우리 아빠가... 여기서는 꽤 중요한 사람 같은데?'

나는 난생처음으로 아버지가 이 거대한 회사의 부품이 아니라, 이 회사를 돌리는 엔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틈이 나자 아버지는 내 쪽을 돌아봤다.

“어때.”

“와... 멋있는데.”

“멋은 무슨 멋이야. 그냥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거지.”

아버지에게 짧은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아버지는 사무실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미스 김, 여기 기운 나게 커피 믹스 한 잔이랑, 우리 아들 줄 코코아 한 잔만 부탁해!” 하고 외쳤다.

잠시 후, 탕비실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굽은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달콤한 코코아가 내 손에 쥐어지기도 전에, 복도 저편에서부터 공기의 흐름을 깨뜨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싸구려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는 태생부터 다른, 규칙적이고 서늘한 구두 굽 소리였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는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거침이 없었다.

넥타이를 단단히 바짝 조여 매고, 안경 너머로 숫자를 계산하는 듯한 예리한 눈빛을 뿜어내는 젊은 사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반질반질한 그의 이마는 사무실의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매끄러운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 것 같이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버지는 조금 전까지의 여유를 지우고 서둘러 넥타이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버지는 그를 보며 "이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그는 인사도 받지 않고 화가 난 표정으로 아버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 부장님, 이게 뭐예요?”

그 사람은 말끝을 ‘요’로 끝내면서도 전혀 공손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떤 부분 말씀하시는 건지...”

“4월 수출 물량 집계 말입니다. 이게 왜 아직도 확정이 안 나 있냐는 겁니다.”

아버지가 서류 몇 장을 급히 뒤적였다.

“그건... 지난번 선적이 늦어져서 저쪽 확인만 받으면...”

“선적이 늦어지면 전화라도 한 통을 하셨어야죠. 저는 위에다 이미 보고를 올린 상태인데 밑에서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곤란합니다, 정 부장님.”

아버지의 손등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안으로 정리해서 다시...”

“오늘 안? 지금도 늦었어요. 두 달 사이에 이런 일이 세 번째예요. 부장님이 직원을 잘못 다루시는 건지, 아니면 관리가 안 되는 건지...”

사무실이 한층 더 조용해졌다. 전화기 소리도, 타자기 소리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옆에 조용히 서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집에서 항상 우리를 야단치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에게 일방적으로 눌려 있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윗선에서 또 얘기 나오면 저도 곤란합니다. 아셨죠?”

그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숨을 쉬고 자리를 떠났다.

아버지는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옆자리 직원이 눈치를 보며 다가와 말했다.

“부장님... 제가 중간에 확인했어야 하는데...”

“아냐. 내 책임이지 뭐.”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자. 오늘 토요일입니다. 다들 점심 먹고 조금만 더 힘냅시다.”

사무실이 다시 원래의 소음으로 돌아갔지만 내 귀에는 아직도 방금 전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믿고 싶었던 함대 사령관은 그저 가족이라는 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보다 나이 어린 상사의 모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평형수를 채우고 있는 고독한 항해사였을 뿐이다.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 아빠가 제대로 된 돈까스 한번 쏴주마."

아버지가 호기롭게 재킷을 걸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우리가 첫걸음을 떼기도 전에, 책상 위에 육중한 검은색 전화기가 울렸다.

"잠깐만."

아버지는 멈칫하더니 걸음을 돌려 수화기를 낚아챘다.

"예, 해외영업부 정한수입니다."

수화기를 귀에 대는 순간, 아버지의 등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부하 직원들에게 로테르담항으로 물건을 쏘라며 호령하던 함대 사령관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는 수화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보이지도 않는 상대방을 향해 허리를 약간 숙였다.

"아, 상무님! 예... 예, 그렇습니다. 아, 그 건은 지금 컨테이너 박스 넘버 확인 중입니다. 예? 아... 하지만 그건 현지 사정 때문에..."

상대방의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와 내 귀에까지 날카롭게 꽂혔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포격에 가까웠다.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비어 있는 손으로 책상 위의 서류를 미친 듯이 뒤적이며 모나미 153 볼펜을 입에 물었다가 다시 내뱉었다.

아버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글프게 반짝였다.

"예... 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예, 상무님, 사무실로 올라가겠습니다."

마침내 수화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무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아버지는 한동안 수화기 위로 손을 얹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포격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진 병사처럼.

"서진아."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빠가 급한 일이 있어서... 금방 안 끝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먼저 가서 먹고 있을래? 아니면... 여기서 좀 기다릴래?"

나는 손바닥 안의 만 원짜리 지폐를 꽉 쥐었다.

아버지는 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재킷을 고쳐 입고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아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나는 주인이 떠난 정한수 부장의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의자의 가죽은 아버지의 체온이 남아 있어 미지근했고, 등받이에서는 아버지가 아침마다 뿌리던 쾌남이라는 스킨 향취와 묵은 담배 냄새가 묘하게 섞여 났다.

당시 대한민국 모든 가장의 아침은 이른바 ‘착-착-!’ 하는 파열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투박하고 묵직한 유리병에 담긴 푸른색 액체.

아버지는 손바닥에 그 액체를 한가득 덜어내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출정식을 치르듯 양 볼에 사정없이 두드려 발랐다.

그것은 남자의 화장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각성제에 가까웠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알코올 향은 덜 깬 잠을 단숨에 몰아냈고, 뒤이어 올라오는 묵직한 머스크 향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짊어진 무게만큼이나 진하고 고집스러웠다.

어린 내가 그 향을 맡으면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가 나오곤 했지만, 아버지의 의자에 앉아 맡는 그 냄새는 사뭇 달랐다.

쾌남 스킨의 그 날카로운 알코올 기운이 아버지의 등판에서 뿜어져 나온 눅눅한 땀 냄새, 그리고 손가락 끝에 밴 88 담배의 구수한 향과 섞이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냄새가 완성되었다.

그 미지근한 가죽 의자 위에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그 독한 스킨을 얼굴이 벌게지도록 바르며 견뎌냈을 그 발버둥의 냄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휘갈겨 쓴 서류들을 보았다. 로테르담, 앤트워프, 함부르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항구의 이름들이 숫자들과 엉켜 전장 지도처럼 펼쳐져 있었다.

"서진이라고 했지? 부장님 금방 오실 거야. 배고프면 이거라도 좀 먹을래?"

옆자리 김대리라는 아저씨가 서랍에서 크라운 산도 과자 한 봉지를 꺼내 건넸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자 긴장이 풀린 듯, 사무실 여기저기서 낮게 읊조리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부장님, 오늘 또 상무님한테 깨지겠네. 저번 주에도 물량 밀린 것 때문에 한참 고생하셨는데..."

다른 직원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나는 아버지의 서랍을 몰래 조금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업무 서류들 사이로 낡은 잡지 한 권이 끼어 있었다.

'해양한국'. 겉표지는 이미 너덜너덜해졌지만, 거대한 유조선이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사진만은 선명했다.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에도, 이 서랍 속 푸른 바다를 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때였다. 닫힌 상무실 문 너머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정 부장! 당신 정신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전 나라가 수출에 목을 매고 있는데, 배를 못 구했다는 게 말이 돼?!"

사무실의 모든 전화벨 소리가 순간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움찔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한참 뒤,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고치고 사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는 헝클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지도 못한 채, 땀에 젖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보자 아버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어 보였다.

"어... 먼저 가서 먹고 있지, 안 가고 기다렸어? 배 고프지?"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어깨 위에 얹어진 아버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집에서는 무뚝뚝한 바위 같던 아버지의 손이, 사실은 이렇게나 가늘고 떨리는 평범한 인간의 손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웠다.

"아빠... 나 돈까스 말고 짜장면 먹고 싶어. 회사 앞 중국집, 맛있어 보이던데."

나는 돈까스 대신 짜장면이 먹고 싶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날은 왠지 경양식 집에 가서 칼질을 하기엔,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나 난도질당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인마, 아빠 회사까지 와서 짜장면이 뭐야. 너 돈까지 좋아하잖아. 돈까스 먹으러 가자."

아버지는 다시 힘을 내어 내 어깨를 꽉 쥐었다.

나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인생이라는 항해는 별을 보며 나아가는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라, 형광등 밑에서 고함을 견디며 한 발자국씩 진흙탕을 헤쳐 나가는 고된 노 젓기라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그 노를 한 번도 놓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두꺼운 경양식 레스토랑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버터 냄새와 약간은 눅눅한 카펫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아버지는 익숙한 듯 웨이터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고, 우리는 창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 상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정 부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재킷 깃을 세우고 메뉴판을 든, 이 테이블의 절대 권력자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 돈까스 정식 두 개. 아, 아들건 곱빼기로요."

아버지는 마치 거창한 무역 협상이라도 타결하듯 비장하게 주문을 마쳤다.


“아빠.”

“응.”

“아빠는… 어릴 때부터 이런 일 하고 싶었어?”

아버지는 물이 든 컵을 들어 올리다 말고 잠깐 웃었다.

“누가 어릴 때 물류 관리 부장이 꿈이겠냐?”

“그럼... 진짜 꿈은 뭐였는데?”

아버지는 조용히 창밖을 한 번 봤다.

“배.”

“배?”

“응. 큰 배. 큰 배를 타고 세상을 다니는 마도로스.”

아버지의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옛날에는 TV도 없고 그랬잖냐. 라디오로만 세상 소식을 듣던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세대 이야기였다.

“그때 라디오에서 먼 나라 얘기 나오면 상상하곤 했지. ‘언젠가 저 바다를 건너볼 수 있을까.’ 그래서... 한때는 진짜 항해사가 되고 싶었어.”

“우와...”

“밤에 갑판에 서서 별 보고 방향 잡고, 새벽에 안개 걷힐 때 어딘지 모를 항구가 눈앞에 보이고...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그런데 왜... 안 했어?”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러게.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아버지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군대 제대하고, 배 타는 학교 가려고 알아보다가... 등록금도 그렇고, 집 사정도 그렇고... 이래저래 꼬이다 보니 그냥 서울 올라와서 회사에 들어갔지.”

“그래서 부림전자에...?”

“처음엔 창고에서 박스 나르는 막일부터 했지. 그러다 선배 한 명이 ‘너 숫자는 빠르네, 사무 쪽으로 와서 해볼래?’ 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거고.”

아버지는 웃었다.

“인생이 원래 그래. 배 타러 나왔다가 회사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거지.”

웃음 속에 알 수 없는 무게가 섞여 있었다.

“후회해?”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후회라...”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끔 밤에 별 볼 때면 ‘저 별을 배 위에서 봤으면 어땠을까’ 생각은 하지.”

그리고는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나쁜 인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왜?”

“너희가 있잖냐.”

너무 뻔한 대사인데도 그 말이 나올 줄 몰랐던 나는 그냥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라는 게 말이다, 배처럼 멋지게 파도를 가르는 것 같아도 사실은 밑바닥에서 누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쳐야 나가는 거거든. 누군가는 싫어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거고."


그때 웨이터가 커다란 접시에 갈색 소스가 듬뿍 뿌려진 왕돈까스를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정성스럽게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썰어놓은 고기 한 점을 내 접시에 놓아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를 타야만 마도로스는 아니지. 서류 뭉치들이 내 배고, 너희 엄마랑 너, 영진이가 내 선원이지."

나는 아버지가 썰어준 고기를 입에 넣었다.

평소보다 훨씬 짭짤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버지가 흘린 땀과 비굴함을 견뎌낸 굳은살의 맛이었던 것 같다.

"서진아, 넌 나중에 별을 보며 항해하는 사람이 돼라. 형광등 밑에서 숫자 세지 말고. 알았냐?"

아버지는 다시 마도로스의 눈빛을 하고는 남은 돈까스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가족이라는 이름의 작은 돛단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거대한 자본주의의 바다로 뛰어드는 가장 고독하고도 용감한 항해사였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수출을 외치는 트럭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고, 식당 안에서는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도로스가, 입가에 돈까스 소스를 묻힌 채 껄껄 웃고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뒷마당에서 망원경을 들고 하늘을 보고 계셨다.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아버지 옆에 섰다.

"아빠, 또 별 봐?"

"아직 안 잤어? 저기 유난히 밝은 거 보이지? 저게 북극성이다. 옛날에 뱃사람들은 길을 잃으면 저 별을 보고 돌아왔지."

나는 망원경 속 별보다 아버지의 옆얼굴을 더 오래 보았다.

낮에 보았던 그 굴욕적인 순간과, 지금 별을 설명하는 평온한 얼굴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빠의 북극성은 뭐야?"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더니, 낮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왠 갑자기 철학적인 질문을?"

"TV에서 그러더라고 누구나 자신의 북극성 같은 게 있다고."

"글쎄... 예전엔 배였고, 그다음엔 월급날이었는데... 지금은 너희들이지 뭐. 너희가 제자리에 잘 있는지 확인해야 아빠도 길을 안 잃으니까."

그 말이 너무 교과서 같아서가 아니라 너무 아버지 같아서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숙제 공책에 적었던 문장들을 모두 지웠다. 그리고 딱 한 줄을 적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바다를 포기하고 우리의 바다가 되어준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 상처들을 말없이 삼키고는, 밤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었다.

1988년의 밤은 깊어갔고, 아버지는 여전히 망원경을 조절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알았다.

아버지가 가끔 TV 앞에서 '침묵의 기적'을 시연할 때, 그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바다로 나갈 힘을 모으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아버지가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 작아 보이기도 하고, 조금 더 크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하늘을 보았다.

별은 무수히 많았고, 그중 하나가 유난히 반짝이며 우리 집 낡은 담벼락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길 잃은 모든 항해사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주려는 듯이.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