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소수점 아래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리움의 공식

수학의 정석이라는 법칙

by 한자루




1988년의 대한민국에서 수학 점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들의 계급이었고, 부모님의 자부심이었으며, 때로는 한 집안의 평화를 결정짓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당시 나에게 수학의 정석'정석'이 아니라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이었고, 미지수 X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엄마는 옆집 천재에게 손을 내밀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 집 식탁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어머니는 밥알을 깨작거리는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내 중간고사 가정통신문을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돋보기를 고쳐 쓰며 가정 통신문 훑어내려 갔다.

“여보, 이대로는 안 돼요. 중1때 수학 못잡으면 서진이 고등학교 가기도 힘들대요. 그래서 말인데... 옆집 태경이한테 과외 좀 부탁하면 어떨까 해서요.”

아버지가 숟가락을 멈췄다.

옆집 태경이 형.

명문대생이자 우리 동네의 자랑이었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제일 질색하는 데모꾼이기도 했다.

“태경이? 그 녀석 요즘도 학교도 안 가고 데모하고 돌아 다닌다며? 그런 녀석한테 뭘 배워? 수학이 아니라 화염병 던지는 법이나 배우겠지!”

“아휴, 그래도 걔가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잖아요. 요새 시국이 흉흉해서 그렇지, 애는 착하잖아요. 서진이도 태경이 형이라면 잘 따르고.”

아버지는 여전히 젓가락으로 콩자반만 뒤적이며 침묵을 지켰다.

엄마는 이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바로 우리 집의 아픈 손가락, 아니 사실상 부러진 손가락이나 다름없는 영진이 형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었다.

“당신, 영진이 성적표 보고도 그래요? 걔는 이미 주판알을 튕겨봐도 답이 안 나오는 수준이잖아요. 영진이가 저렇게 공부 젬병으로 길을 정했으면, 우리 서진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죠."

영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버지의 미간이 단숨에 구겨졌다.

우리 집에서 영진이 형은 이미 회생 불가능한 자산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형의 성적표를 볼 때마다 휘발유 가격이 100원쯤 오른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계셨다.

엄마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비장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학원비보다 훨씬 싸게 해주기로 했어요. 태경이 엄마가 요새 태경이 용돈 끊었다고 걱정이 태산이더라고요.”

싸게라는 말에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아버지는 태경이 형의 사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혹여나 내 수학 성적이 당신의 월급보다 더 빨리 떨어질까 봐 걱정하고 계셨던 것 같다.

“...수학만 가르치는 거다. 딴소리 한마디라도 하면 그날로 끝이야. 알았어?”

아버지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며 숭늉을 들이켰다.

그렇게 나의 운명은, 최루탄 냄새를 묻히고 돌아오는 비운의 천재 태경이 형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영진이 형은 거실에서 TV를 보며 "넌 이제 끝났다."라고 비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 소리가 나를 향한 조롱인지, 아니면 먼저 자유를 찾은 탈영병의 환호성인지 알 수 없었다.

1988년의 5월, 나는 그렇게 영진이 형의 실패를 양분 삼아, 가장 위태로운 과외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학은 내게 제2외국어보다 더 낯선 언어였다.

피타고라스니, 인수분해니 하는 것들은 도대체 내 인생 어디에 쓰일지 알 수 없는 고대 언어 같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믿고 있었다.

숫자를 정복하는 자가 세상을 정복하고, 수학의 정석을 뗀 자가 화이트칼라의 낙원으로 입성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게 수학은 학문이 아니라, 내 존재의 유능함을 증명해야만 하는 잔인한 시험대였다.


학교 운동장의 흙먼지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최류탄 가스에 섞여 교실 창틀까지 올라오던 오후, 나는 쉬는 시간에도 수학의 정석을 펴놓고 끙끙대고 있었다.

기남이는 이미 문제집 한 권을 다 끝냈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마이크로 MIT 3000의 로고가 박힌 샤프를 찰칵찰칵 누르며 내가 푸는 문제를 보고 있었다

짙은 남색 몸체에 금색 클립이 빛나는 그 샤프는, 우리 반에서 일종의 성공한 남자의 징표와도 같았다.

기남이가 일정한 리듬으로 샤프를 찰칵거릴 때마다, 0.5mm의 가느다란 샤프심이 마치 기남이의 여유로운 성적표처럼 한 발자국씩 뻗어 나왔다.

찰칵, 찰칵.’ 그 소리는 마치 내 수학 성적이 떨어지는 소리를 알리는 초시계처럼 잔인하게 들렸다.

“야, 기남아. 너는 이게 진짜 이해가 가냐? 사과 세 개를 주고 두 개를 뺏으면 그냥 기분이 나쁜 거지, 왜 X니 Y니 하는 걸 붙여서 사람을 괴롭히냐고.”

기남이는 찰칵거리던 샤프를 멈추고 나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길 잃은 어린양을 보는 목자의 그것과 같았다.

“이 샤프 노크 소리 들려? 수학은 박자를 타야 하는 거야. 너처럼 볼펜 똥이나 닦아가며 억지로 문장을 쥐어짜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지. 수학 문제는 연애랑 똑같아. 네가 매달리면 도망가고, 네가 여유를 부리면 알아서 답을 내준다고. 수학은 감정이 아니라 논리야. 세상 모든 일에는 정해진 답이 있거든.”

“정해진 답? 우리 아빠가 엄마 몰래 비상금 숨기는 곳도 수학으로 찾을 수 있어? 아니면 내가 왜 영어보다 수학 성적이 더 안 나오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돼?”

기남이는 안경태를 치켜올리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건 확률의 문제지. 하지만 서진아, 분명한 건 이번 중간고사 수학 성적이 이번 달 용돈의 함수가 될 거라는 사실이야.”

1988년의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종종 매질의 동의어이기도 했다.

기남이가 말한 함수 그래프의 종착역이 용돈의 액수였다면, 우리 집 그래프의 종착역은 거실 구석에 놓인 사랑의 회초리였다.

그랬다, 수학은 논리였다.

그것은 x축의 성적이 하락할수록 y축의 비명이 비례해서 커지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함수였다.


그날 저녁, 우리 집 작은방에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냄새는 평소 우리 집에서 나던 된장찌개 냄새와는 사뭇 달랐다.

낡은 헌책방의 종이 냄새,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매캐한 최류탄 냄새.

옆집 태경이 형이었다.

형은 낡은 청바지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 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명문대생의 아우라보다는, 방금 전까지 거리에서 무언가와 싸우다 온 투사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자, 서진아. 정석 펴봐.”

형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깨끗하다 못해 광택이 나는 수학의 정석을 내밀었다.

형은 책장을 툭툭 넘기더니 피식 웃었다.

“너, 집합만 열심히 했구나? 원래 대한민국 중학생들은 집합만 보면 세상 모든 수학을 다 정복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든. 근데 말이야, 세상은 집합처럼 딱딱 나눠떨어지지 않아.”

형은 문제집의 여백에 커다란 원 두 개를 그렸습니다.

“이게 국가고, 이게 개인이야. 가끔 이 두 원이 겹치는 부분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지. 수학도 마찬가지야. 교집합을 찾는 건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찾는 거야.”

나는 형이 수학을 가르치는 건지, 철학을 가르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의 설명은 기남이의 무미건조한 공식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서진아, 시험 문제는 너를 틀리게 하려고 나오는 게 아냐. 네가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묻는 거지. 자, 이 X를 봐. 이 녀석이 왜 여기 숨어있는지 한번 찾아내 봐.”

형의 손가락 끝에 밴 옅은 최류탄향과 이름 모를 열기가 내 방 안을 채웠다.

그건 아버지가 뿌리던 쾌남 스킨 향보다 훨씬 더 어른의 냄새 같았고, 동시에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형이 내준 문제를 풀기 시작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수학 문제보다 더 큰 미지수가 생겨나고 있었다.

'태경이 형은 왜 데모를 하는걸까?' 하는 질문 이었다.


시험을 앞둔 중학생의 밤은 낮보다 훨씬 길고 잔혹했다.

뇌세포 사이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은 공식들은 밤이 되면 제멋대로 뒤엉켜 괴물이 되곤 했다.

1988년의 교육열은 뜨겁다 못해 아이들의 꿈마저 붉게 달궈진 인두로 지져놓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내 잠자리를 지배한 건 평화로운 미래가 아니라, 풀리지 않는 미지수 X가 휘두르는 날카로운 낫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거대한 OMR 카드 위에 서 있는 꿈을 꿨다.

하늘에서는 우박 대신 시뻘건 가 쏟아졌고, 바닥에 뚫린 검은 구멍들은 내가 마킹하지 못한 문제들처럼 나를 집어삼키려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정서진, X값을 구하지 못하면 너는 평생 이 괄호 안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수학의 정석 책 표지에 그려진 투박한 글씨들이 거인처럼 일어나 나를 쫓아왔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을 때, 내 방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책상 위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방정식이 비웃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험 스트레스는 열네 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고밀도의 독극물같은 것이었다.


태경이 형과의 과외는 나쁘지 않았다.

어려웠던 개념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었고 문제가 풀리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날 무렵 태경이 형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내 연습장을 체크하고 있었고, 나는 형의 손가락 끝에 묻은 거뭇한 인쇄 잉크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죠.

그때였다. 드르륵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쟁반에 담긴 깎은 참외를 내밀며 들어왔지만, 눈빛은 이미 사냥꾼처럼 방 안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엄마가 해도 될 일을 아버지는 굳이 불온한 정신 교육이라도 벌어지고 있지 않나 탐색하러 온것이었다.

"태경이, 고생이 많네. 우리 서진이 녀석이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닌데, 누굴 닮았는지 영 숫자에 약해서 말이야."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검사의 서류 가방처럼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아버지가 참외 쟁반을 책상에 놓으려는 순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책상 밑에 놓인 태경이 형의 낡은 캔버스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독재 타도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박힌 시위 전단지 뭉치가 혓바닥처럼 비죽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허리를 숙여 쟁반을 놓다가 동작을 멈췄다.

아버지의 시선이 바닥을 향해 고정되었다.

태경이 형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나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태경아, 너 요새도... 바쁘게 다니는 모양이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조금 전의 인자한 이웃 아저씨는 간데없고, 원칙을 고수하는 서슬 퍼런 안기부 정부장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손을 뻗어 그 전단지를 집어 들려 했다.

"아, 아버지! 그, 그거 형이 나 이해하기 쉽게 그리면서 가르쳐준 건데!"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형의 가방을 발로 툭 걷어찼다.

전단지는 다시 가방 안으로 숨어들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코끝이 가늘게 떨렸다.

형의 옷에 배어 있던 미세한 최루탄 가루가 아버지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참외 쟁반을 놓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고요하고도 묵직했다.

태경이 형은 조용히 가방 지퍼를 올렸습니다.

"서진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형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보았다. 문제를 풀 때보다 더 깊게 패인 형의 미간을.

그날 밤, 아버지는 안방에서 늦도록 전화기를 붙잡고 계셨고, 나는 다시 한번 OMR 카드 속에 갇히는 악몽을 꿔야 했다. 이번 꿈에는 수학 괴물 대신, 헌병대 차에 올라타는 태경이 형의 뒷모습이 나왔다.


1988년의 교실은 매일 아침 거대한 세탁기처럼 돌아갔다.

우리는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단발머리와 빡빡머리를 한 채, 정답이라는 이름의 세제에 몸을 맡긴 채 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중간 고사가 시작되었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타고 운명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험 시간이 되었다. 바로 수학 시험이었다.

그날 내게 주어진 미션은 단 하나였다.

태경이 형이 알려준 X의 비밀을 하나라도 더 풀어내어, 부림전자 부장님이신 아버지의 퇴근길 발걸음을 가볍게 해드리는 것.

하지만 세상엔 공식보다 무서운 변수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수학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날카롭게 교실을 갈랐다.

칠판 앞에는 독사라고 불리는 수학 선생님이 안경알을 번뜩이며 서 있었다.

서걱거리는 샤프 소리 사이로, 나는 태경이 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서진아, 모르는 건 일단 넘어가. 미련을 갖는 순간 숫자가 너를 잡아먹을 거야.'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넘어가다보면 5분도 안되어 마지막 문제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15번 문항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방정식과 집합이 묘하게 뒤섞인 그 난공불락의 요새 앞에서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등 뒤에서 낮고 투박한, 마치 덜 닦인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야... 기남아... 박기남...”

석두였습니다. 이 동네에서 주먹 하나로 통하는 석두에게 수학 시험지는 그저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석두는 앞자리에 앉은 기남이의 빳빳하게 풀 먹인 교복 등을 향해 간절한 구애의 손짓을 보냈다.

하지만 기남이는 마치 수도승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남이의 펜 끝은 오직 정답만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뿐이었죠.

“기남아... 15번...제발... 한 번만...”

기남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다음 장으로 시험지를 넘겼다.

'촤악' 하는 그 소리는 석두의 실낱같은 희망을 찢어발기는 소리 같았다.

거절당한 짐승의 눈빛이 이제 내 뒤통수에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정서진.”

석두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건 협박이라기보다 일종의 선고였다.

“서진아, 너 요즘 수학 과외 받는다며? 15번부터 20번까지... 알지? 좋은 말로 할 때 OMR 카드 오른쪽으로 좀 빼라. 안 그러면 오늘 방과 후에 옥상... 알지?”

내 등에 닿은 석두의 샤프 끝이 쿡쿡 찌를 때마다, 어젯밤 꿈속의 괴물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오른쪽엔 성적이라는 이름의 아버지가, 왼쪽엔 생존이라는 이름의 석두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독사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태경이 형이 알려준 함수 공식을 떠올리려 애썼다.

석두의 거친 숨소리가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수학 시험은 내게 정답을 묻는 게 아니었다.

내 등이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살다 보면 도덕적 올바름보다 누군가의 영웅이 되고 싶다는 유혹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열네 살에게 정의란 교과서 속에 박제된 죽은 문장이었지만, 내 등을 쿡쿡 찌르는 석두의 투박한 샤프 끝은 살아있는 실체였다.

그날 나는 반듯한 기남이의 길 대신,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석두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비극의 서막인 줄도 모른 채, 나는 의리로 뭉친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이되었다.


내 등 뒤로 석두의 뜨거운 숨결이 터지기 직전이 되었을 때였다.

15번부터 20번까지, 태경이 형이 짚어준 덕분에 간신히 풀어낸 소중한 숫자들 위로 땀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때, 대각선 앞에 앉은 기남이와 눈이 마주쳤다.

기남이는 사색이 된 얼굴로 미친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서진아! 그러다 너까지 죽어!'라고 외치는 듯한 그 필사적인 수신호.

기남이의 안경알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쿨하게, 마치 스파이 영화의 암호 전달 책이라도 된 양 OMR 카드를 오른쪽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자, 가져가라 석두야. 이게 내 우정의 무게다.'

석두의 거친 숨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사각사각 석두가 답을 옮겨 적는 소리가 승전보처럼 들려왔다.

나는 이미 정의의 사도라도 된 기분이었다.

석두의 성적이 내 손가락 두 개에 달렸다는 전능함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맹수는 곧바로 다음 사냥감을 요구했습니다.

“야... 서진아... 주관식, 주관식 2번!”

석두의 욕심이 커질수록 기남이의 아우성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기남이는 이제 거의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채,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내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미친놈아! 그만해! 독사한테 걸리면 죽는단 말이야!'

그 순간, 교실 앞쪽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박기남. 너 방금 뭐 했어?”

독사 선생님의 매서운 눈빛이 기남이의 정수리에 꽂혔다.

부정행위를 막으려던 기남이의 그 현란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선생님의 눈에는 앞자리 서진이에게 답을 알려주려는 비열한 몸짓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 아니요! 선생님! 그게 아니라... 저는...”

“야. 박기남. 조용히 해! 다른 애들 시험보는거 안보여? 시험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

아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기남이에게 쏟아졌다.

"야. 모두 집중. 지금 시험시간이야. '이 때다.' 하고 고개 돌리지 말고!"

독사 선생님은 당구 큐대를 알맞게 잘라 만든 몽둥이로 교탁 옆부분을 꽝하고 치며 소리쳤다.

억울함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기남이를 뒤로한 채, 나는 태연하게 펜을 내려놓았다.

기남이의 희생(?) 덕분에 석두와 나의 비밀 작전은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던 것이다.


시험 종료 종이 울리고, 교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묵직한 손바닥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석두였다.

“야, 정서진. 너 오늘 좀 멋있더라? 나중에 떡볶이 한 번 쏠게.”

석두의 그 투박한 칭찬 한마디에 나는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버지가 해외 바이어에게 계약을 따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씩씩거리며 교실을 나오는 기남이가 우리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야! 너희들 진짜 이럴 거야? 나 교무실 불려가게 생겼단 말이야! 엄마가 알면 난 죽는다고.”

그러자 석두가 기남이의 가방끈을 툭 건드리며 비죽 웃었다.

“에이, 박기남. 쫄기는. 아직도 엄마 눈치보면서 사냐? 사나이가 그렇게 좁밥처럼 살아서 되겠냐? 서진이 반만 좀 닮아봐라, 이 쫄보 새끼야.”

'쫄보'라는 말에 기남이는 입을 뗐다 다물었다 하며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정직한 모범생 기남이의 분노보다, 콧수염이 거뭇 거뭇한 석두의 인정이 훨씬 더 달콤했다.

나는 왠지 내가 어른들의 세계, 그 비릿하고 거친 진짜 사나이들의 리그에 입성한 것 같은 묘한 뿌듯함에 젖어 들었다.

복도 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 보이기 까지 했다.


반듯했던 기남이가 교무실에서 독사 선생님의 맞춤형 당구대로 손바닥을 맞으며 도덕적 붕괴를 경험하고 있을 때, 비겁한 승리자였던 나는 석두의 거친 날개 아래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에 취해 있었다.

교무실 문이 열리고 걸어 나오는 기남이의 얼굴은 흡사 나라를 잃은 망국의 선비 같았다.

평생을 모범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온 기남이에게, 부정행위자라는 누명은 그 어떤 신체적 체벌보다 굴욕적이었다.

“정서진... 너 진짜... 내가 너 때문에...”

기남이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석두가 넉살 좋게 기남이의 목을 팔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야, 쫄보 박기남. 너 오늘 액땜 제대로 했다. 기분이다. 형님이 진짜 어른들의 세계를 보여줄게. 학교 뒤 아리랑 당구장 알지? 거기 가서 짜장면 한 그릇에 큐대 좀 잡아보자고. 어때? 형님이 쏠테니까 돈 걱정은 말고. 사나이들끼리 비밀 하나 만드는 거지.”


1988년 중학생에게 당구장은 어른들이 출입하는 금지된 성소이자, 불량 학생들의 소굴이었다.

나는 당연히 반듯한 기남이가 “미쳤어? 거긴 불량배들이나 가는 곳이잖아!”라며 소리를 지를 줄 알았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학생의 본분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지만 내 머릿속을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내 무의식은 이미 아버지가 휘두르는 사랑의 회초리가 날아오는 궤적을 계산하고 있었다.

“어... 어... 석두야. 그래도 당구장은 좀 거시기하지 않냐? 우리 아직 중학생인데, 그 칙칙한 초크 가루 속에서 인생을 낭비하기엔 오늘 햇살이 너무 아깝지. 차라리 오락실이나 분식집 떡볶이가 더 어울리는 날씨잖아.”

나는 최대한 세련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더 거대한 파국을 막기 위한 전술적 후퇴였다.

“나도 가고 싶긴한데... 사실 오늘 태경이 형이랑 과외도 있거든. 알잖아, 그 형 시국이 흉흉해서 내가 없으면 공부가 안 된다나 뭐라나. 자본주의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커피 타는 법이라도 미리 전수받아야 하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핑계가 내 입술 사이로 모나미 볼펜 똥처럼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나는 짐짓 아쉽다는 듯 미간까지 찌푸렸지만, 내 발가락은 이미 집 방향을 향해 15도 각도로 정밀하게 틀어져 있었다.

석두가 의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끝까지 주윤발의 고독한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은근슬쩍 꼬리를 내리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던 그 찰나.

기남이가 갑자기 코를 훌쩍이더니, 가방끈을 고쳐 매며 석두를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 그래? 가지 뭐.”

“뭐?”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남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돌아봤다.

“왜, 정서진. 너 쫄았냐? 자식...쫄기는. 사나이가 그렇게 좁밥처럼 살아서 되겠냐? 겁나는건 아니지?”

“아니, 겁나는 게 아니라... 거긴 담배 연기도 심하고, 혹시라도 학생부 선생님이라도 뜨면...”

“에이, 정서진. 너 진짜 실망이다. 알고 보니 개쎈척한게 다 뻥이었구만.”

기남이가 끼어들며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석두가 내게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도발적인 목소리로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정서진. 너, 보기보다 완전 쫄보구나? 겁나면 그냥 집에 가서 엄마 치맛자락이나 잡고 있던지. 거기 가서 얌전하게 뽀뽀뽀나 보면서 학생의 본분을 지키면 딱 좋겠네, 안 그래?”


사춘기 사내놈들에게 엄마뽀뽀뽀라는 단어의 조합은 치명적인 독설이었다.

기남이는 내가 가장 공들여 쌓아온 쿨한 도시 소년의 가면을 단숨에 벗겨내고, 그 안에 숨어있던 유약한 겁쟁이를 광장 한복판에 세워버린 것이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우정이라는 건 함께 공부할 때가 아니라, 함께 나쁜 짓을 저지를 공범의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기남이는 지금 나에게 그 비릿한 공범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아니면 영원히 아이들의 세계에 남으라고 잔인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석두에게 답을 넘겨주며 사나이들의 의리를 지켰다고 뿌듯해하던 내 자존심이 단숨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두는 옆에서 “오오, 박기남! 살아있네? 이 자식 서진이랑 다르게 깡다구까지 있네!”라며 박수를 쳤고, 기남이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석두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남이에게 쫄보라고 불리는 치욕이 더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자욱한 담배 연기가 뒤섞여 있었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나는 내가 알던 세상과 영영 이별하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전율을 느꼈다.

기남이는 주저 없이 문을 열어젖혔고, 초록색 당구대 위로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우리는 생전 처음 보는 금지된 풍경을 마주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중학생이 당구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일탈을 넘어 사회적 파문에 가까운 행위였다.

당구장은 ‘미성년자 출입 금지’라는 붉은 푯말이 선명한, 어른들만의 자욱한 해방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법보다 강력한 건 ‘아는 형님’의 존재였다.

우리가 그 금단의 지하 세계로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우리 중 두 살이나 나이가 많고 가장 빨리 어른의 세계에 발을 담근 석두 청룡님 덕분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큐대를 잡는 법보다 비겁한 자의 용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먼저 배우고 있었다.


“아, 형님! 저 왔습니다!”

계단 끝에서 석두가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소리를 질렀다.

당구장을 아르바이트로 맡아 운영하던 동네 양아치, 종수 형은 ‘형님’이라 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돌려 석두를 봤다.

자욱한 담배 연기 너머로 노란 머리의 종수 형이 나타났다.

석두는 구석에 모여 있던 험악한 인상의 형들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 청룡이! 오랜만이네. 근데 이 젖비린내 나는 샌님들은 뭐냐?”

“아유, 형님. 제 친구들인데 한 수 배우러 왔습니다. 아시죠? 잘 좀 부탁드립니다.”

청룡이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종수 형에게 건네며 거드름을 피웠다.

종수 형은 그런 청룡이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툭 치더니,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4번 당구대를 가리켰습니다.

“야, 4번 다이 비었으니까 거기 가서 놀아. 대신 사장님 들어 오면 잽싸게 큐대 놓고 구석에 박혀 있어라. 알았냐?”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어른들의 비밀 결사에 가입이라도 한 양 으쓱해졌다.

청룡이의 그 ‘빽’ 덕분에 우리는 법과 도덕의 경계선을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종수 형의 그 친절한 미소 뒤에는, 훗날 청룡이가 감당해야 할 지독한 이자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짜장면 냄새와 소음이 가득한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쿨한 사나이가 된 금단의 기분을 만끽했다.


태경이 형과의 마지막 과외 날, 형은 평소와 다르게 청바지가 아닌 빳빳하게 다려진 면바지를 입고 왔다.

형의 손에 들린 건 수학의 정석이 아니라 작은 카세트테이프였다.

“서진아, 오늘 시험 끝났지? 잘봤어?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오늘 공부는 좀 쉬자. 대신 이거 들어볼래?”

태경이 형이 워크맨에 연결된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조심스레 끼워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틱' 하는 투박한 기계음과 함께 테이프가 돌아가는 미세한 마찰음이 들리더니, 곧이어 맑은 어쿠스틱 기타 선율이 정적을 깼다.

그것은 ‘동물원’이라는 이름의 그룹으로 갓 데뷔한, 아직은 풋풋한 청년 김광석의 목소리였다.

당시 라디오를 장악했던 조용필의 화려한 창법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목소리였다.

기교 하나 없이 담백하게, 하지만 폐부 깊숙한 곳을 긁어내는 듯한 그 떨림은 1988년의 그 들뜬 공기를 단번에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어폰 너머로 ‘거리에서’의 서글픈 하모니카 선율이 흐르자, 나는 왠지 모를 코끝의 찡함을 느꼈다.

“형. 이 가수 누구에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슬퍼요?”

내 물음에 형은 대답 대신 나직이 가사를 읊조렸다.

“서진아, 가끔은 소리 지르는 것보다 조용한 게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있어.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땐, 이런 노래가 정답지보다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하거든.”

작은 폼 이어폰을 통해 전해지던 김광석의 온기는 형의 체온과 닮아 있었다.

“서진아, 사람들이 왜 수학 문제집에서 그렇게 기를 쓰고 X를 구하려고 하는지 알아? 그건 단순히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는 게 아니야. 세상이 꽁꽁 숨겨놓은 비밀번호를 하나씩 풀어가는 연습을 하는 거지. 그 번호를 모르면, 우린 평생 남들이 짜놓은 판 위에서만 살아야 하거든.”

형은 잉크가 번진 내 모나미153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마치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해 쩔쩔매는 옆집 동생을 다독이는 듯했지만, 동시에 다시는 그 답을 가르쳐줄 수 없다는 슬픈 선언처럼 보이기도 했다.

“...형, 내일 군대 간다. 과외는 오늘이 마지막이야.”


평소 비장한 구호를 외치던 형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저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의 그 씁쓸한 미소가 내 가슴에 박혔을 때, 그것은 내가 소년의 문턱을 넘어 마주한 첫 번째 어른스러운 슬픔이었다.

형은 가방 깊숙한 곳에서 누렇게 변색된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이거, 공부하다 지칠 때 들어봐. 유재하부터 시작해서, 들국화... 그리고 가끔은 큰 소리로 부르면 안 되는 노래들도 좀 섞여 있어.”

형이 건넨 60분짜리 테이프 안에는 1988년의 진짜 심장 박동 소리가 담겨 있었다.

유재하의 애절한 미련과 들국화의 거친 절규, 그리고 최루탄 연기 속에서 어깨를 걸고 부르던 금지된 노래들까지.


"형. 군대간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그게 벌써 내일이었어?"

나는 책꽂이에서 아직도 다 읽지 못한 어린왕자 책을 꺼내며 물었다.

"이거. 전에 형이 빌려준 어린왕자.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형은 내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너 가져. 아... 그리고, 나 없는 동안 다연이 좀 잘 챙겨줘라."

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방의 낡은 형광등 불빛 속으로 짧게 깎은 머리를 들이밀며 걸어 나갔다.

형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릴 때 느껴졌던 그 투박한 손마디의 거친 온기, 그리고 형이 건네준 '어린 왕자'의 빛바랜 종이에서 나던 헌책방 냄새는 1988년의 그 밤을 정의하는 유일한 좌표였는지도 모른다.

형이 내게 남긴 마지막 X를 구하는 공식은 수학의 정석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오직 가슴으로만 풀 수 있는 기묘한 수식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태경이 형이 내게 가르쳐준, 소수점 아래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리움의 공식이기도 했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