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발 손 좀 떼주세요, 위험하니까!

37.5도의 고백

by 한자루




꿈속의 나는 다시 중간고사 시험지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교실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연병장 한복판이었다.

칠판 대신 거대한 철조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내 앞에는 책상 대신 투박한 군용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정서진 이병, 15번 문제를 푼다. 실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는 독사 선생님의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기도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OMR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카드 위의 빈칸들이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작은 구멍으로 변했다.

그 구멍 속에서 수천 명의 군인이 개미 떼처럼 기어 나와 대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숫자가 되어 있었다.

X 견장을 찬 군인들과 Y의 소총을 든 군인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집합을 만들었다.

나는 태경이 형이 가르쳐준 대로 교집합을 찾으려 애썼지만 내가 교집합의 원을 그리려 할 때마다, 군화 발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며 내가 그린 선을 짓밟아 뭉개버렸다.

“형! 태경이 형!”

나는 연병장 저 멀리,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형은 군용 배낭이 아나리 커다란 수학의 정석 책을 메고 있었다.

형이 뒤를 돌아봤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형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숫자 '0'만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내게 다가와 연습장 한 장을 찢어 건넸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결과값 : 미지수 X는 이제 이 식에서 존재하지 않음.

형이 멀어질수록 연병장에는 눈 대신 하얀 시험지 가루들이 흩날렸다.

나는 형을 잡으려 달려갔지만, 내 발은 이미 OMR 카드의 검은 마킹 구멍 속으로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늪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그 검은 구멍 속에서, 나는 석두의 비릿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번쩍 눈을 떴다.


번쩍 눈을 떴을 때, 어제와 같은 평범한 아침 햇살이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가에서 춤추는 먼지들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아직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열네 살이었다.

입안에서는 어제 당구장에서 먹었던 짜장면의 들큰하고 텁텁한 맛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 창밖을 보았다. 세상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꿈속의 그 공포스러운 ‘0’이었던 형의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았지만, 창밖의 눈부신 햇살은 그것마저 곧 지나갈 사춘기의 한 장면으로 치환해버리고 있었다.

'태경이 형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느지막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카시아 향기가 최루탄의 잔향을 간신히 덮기 시작하던 6월의 어느 오후였다.

태경이 형이 군에 입대한 지도 어느덧 한 달, 우리 동네는 형이라는 커다란 기둥 하나가 빠져나간 채 위태로운 초여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세상이 떠들썩하게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다연이네 집 대문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을 깨뜨린 건 우체부 아저씨의 날카로운 오토바이 경적 소리였다.

태경이 형이 자대 배치를 받은 후 보내온 첫 번째 편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학교로 가는 153번 버스 정류장에서 다연이는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선수처럼 태경이 형의 편지 봉투를 흔들며 내게 달려왔다.

“서진아! 태경이 오빠한테 편지 왔어. 우리 오빠 잘 지낸대. 군대 밥이 맛있어서 살도 쪘데.”

편지 속 형의 글씨는 여전히 정갈했고, 강원도 최전방의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동생을 걱정하는 다정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형의 편지를 자랑하는 다연이의 웃음 뒤로, 신문 1면을 장식한 시위 현장의 자욱한 연기와 비상계엄이니 시국이니 하는 어른들의 불길한 단어들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이 보였다.

형이 잘 지내고 있다는 그 안도감 섞인 편지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증명하는 가장 가녀린 증거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편지 몇 장에 안도하며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1988년의 교실은 대개 '성공해서 복수하자'는 식의 비장미 넘치는 급훈이 지배하는 거친 요새였다.

천방지축 열네 살 망아지 같은 학생들을 눈빛 하나로 움직이는 김도현 선생님은 그 요새 속의 유일한 휴게소 같은 분이었다.

그는 출석부 대신 낡은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고, 우리를 '야, 이놈들아' 대신 "각자 정한 별명을 부르는 외계인 같은 분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조회 시간, 김도현 선생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정중한 태도로 교실 문을 열었다.

그의 뒤에는 6월의 햇살을 한 움큼 베어 물고 온 듯한 낯선 여성이 서 있었다.

"자. 오늘 특별한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하겠다. 오늘부터 한 달간 우리와 함께 할 한수정 교생 선생님이다. 국어의 아름다움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태도 속에도 있다는 걸 이번 기회에 배우길 바란다."

김도현 선생님의 철학적인 소개는 사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았다.

50여 명의 사춘기 맹수들은 일제히 숨을 멈췄다.

그녀는 우리가 매일 보던 교복 입은 여자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체였다.

다연이가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수채화라면, 한수정 선생님은 깊이 있는 유채화의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화이트 톤의 단정한 블라우스 위로 비치는 쇄골 라인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이는 주름치마의 자락.

그것은 사춘기 소년들이 난생처음 마주한 성숙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였다.


"안녕, 얘들아. 한수정이라고 해. 국어과 교생으로 왔고 앞으로 한 달간 함께 공부할 거야. 잘 부탁해."

그녀가 첫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내가 앉아있는 왼쪽으로 15도쯤 살짝 갸웃했다.

그 찰나의 각도는 내 세계의 지축을 흔들어 놓았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면, 나는 그날 한수정 선생님의 고개 각도에서 심장의 쏠림 법칙을 발견했다.

내 마음은 이미 왼쪽으로 15도 기울어져, 그녀가 서 있는 그 지점으로 속절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저...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침묵을 깬 건 우리 반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무식했던 남기태였다.

평소라면 "선생님,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물었을 녀석이, 그날은 마치 셰익스피어라도 빙의한 듯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뭐야? 기태야."

한수정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기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녀석의 귀는 순식간에 잘 익은 석류처럼 붉어졌다.

"그... 담임 선생님께서 국어의 아름다움이 사람의 태도에 있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의 태도는... 너무... 국보급이십니다!"

교실 여기저기서 야유와 휘파람이 터져 나왔지만, 그것은 질투가 섞인 찬사였다.

"기태야, 너 방금 국보급 태도라고 했지?"

선생님이 천천히 기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태는 '아차' 싶었는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선생님의 눈빛에는 묘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얘들아.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건 본능이지. 하지만, 진짜 국보를 대하는 태도는 휘파람이 아니라 경외여야 한단다."

그는 교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창밖으로 번지는 6월의 초록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지금 내지르는 소리는 사실 한 선생님을 향한 찬사가 아니라, 너희 안의 서툰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뿐이야. 한 선생님은 너희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너희에게 언어의 결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다. 누군가를 정말로 존중한다면, 그 사람이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낼 수 있도록 침묵으로 응원할 줄도 알아야 해. 그게 남자의 국보급 태도고, 그게 진짜 국어다."

교실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아름다움을 대하는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자,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 1교시 국어 시간엔 침묵의 미학을 실천해 보자고. 한 선생님, 이 혈기 왕성한 맹수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김도현 선생님은 윙크 한 번을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창밖의 6월 햇살은 유독 눈부셨고, 교실 안은 여전히 땀 냄새가 났지만, 이제 그 냄새 속에는 이름 모를 비누 향기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짧았던 한 달, 그 찬란한 교생 실습의 계절이 개막하는 소리였다.


사춘기 소년의 뇌는 평소엔 멈춰있는 것 같다가도, '이성'이라는 연료가 주입되는 순간 나사(NASA)의 슈퍼컴퓨터보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 대상이 교생 선생님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일 때, 우리는 단순한 구애를 넘어선 치밀한 정치공학을 펼치기도 한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당시 나의 목표는 그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목표는 그녀의 일상 속에 나를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끼워 넣는 것이었다.


한수정 선생님이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우리 반의 권력 지형을 분석했다.

기태 같은 녀석들은 복도에서 괴성을 지르거나 턱걸이를 하며 근육을 과시하는 1차원적인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그런 건 선생님의 기억 속에 시끄러운 1학년 중학생으로 남을 뿐이었다.

나는 대신 열쇠의 권력에 주목했다.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라는 거대한 기계가 한수정 선생님이라는 눈부신 부속품을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할지 몰라 쩔쩔맸던 것 같다.

낡은 교무실은 이미 담배 연기와 시커먼 서류들로 포화 상태였고, 결국 학교가 찾아낸 타협점은 본관 3층 끝에 위치한 '도서실 부속 자료실'이었다.

그곳은 말이 좋아 자료실이지, 사실상 6.25 전쟁 직후부터 쌓여온 듯한 낡은 전집들과 곰팡이 핀 세계문학전집들이 유배되어 있는 창고나 다름없었다.

학교는 교생인 한수정 선생님에게 한 달간 그 고서들의 '도서 목록 카드'를 작성하라는, 우아해 보이지만 지독하게 먼지 날리는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나에게 그곳은 학교라는 감옥 안에 숨겨진 유일한 성역이었다.


나는 즉시 우리 반 환경부장 덕수를 매점으로 불러냈다.

"덕수야, 너 이번 주부터 도서관 청소 구역 맡았지? 나랑 바꾸자."

나의 뜬금없는 제안에 덕수는 먹고 있던 샤니 크림빵을 손에 들고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나'라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야, 도서관엔 먼지가 장난 아니라서 다들 싫어하잖아. 자료실 안쪽은 귀신 나온다고 아무도 안 가려고 해서 내가 짬 처리당한 건데, 바꿔달라고? 진심이야?"

덕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 도서관 자료실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유배지가 지금 한수정 선생님이라는 눈부신 존재가 머무는 파라다이스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나는 최대한 비장하고도 고독한 표정을 지으며, 미리 준비한 80년대식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덕수야, 사실은 내가... 요즘 비염이 심해져서 그래."

"비염? 비염인데 왜 먼지 구덩이로 가?"

"그게...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고 들어봤냐? 먼지에 정면으로 맞서서 내 코를 단련시키기로 했어. 난 그냥... 고독하게 먼지나 쓸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주변을 살핀 뒤, 덕수의 코끝에 그것을 살며시 들이밀었다.

그것은 바로 로드쇼 6월호에서 갓 뜯어낸, 잉크 냄새조차 가시지 않은 소피 마르소의 4단 브로마이드였다.

"덕수야, 잘 봐라. 이건 그냥 소피 마르소가 아니야. 뒷면엔 피비 케이츠의 수영복 사진이 양면으로 인쇄된, 올해 최고의 레어템이다."

덕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나는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나는 가방 가장 깊숙한 곳, 땀 냄새 밴 체육복과 수학 정석 사이에서 낯선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것은 투박한 복사본의 질감을 가진, 일본어 제목이 날카롭게 박힌 해적판 드래곤볼이었다.

대원동화의 ‘아이큐 점프’가 창간되어 별책부록으로 우리를 흔들어놓기 전, 명동 수입 상가 뒷골목이나 아는 형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돌던 급하게 찍어낸 해적판이었다.

“야, 이건 문구점에서 파는 그 500원짜리 낱권이랑은 차원이 다른 거다. 우리 삼촌이 일본 출장 갔다가 세관 눈 피해 몰래 가방 밑바닥에 숨겨온 진짜 원판이라고. 너 저 제목 읽을 줄이나 아냐? 이게 드래곤볼이야.”

나는 마치 일급 기밀문서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조잡한 복사 상태였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은 압도적이었다.

“자, 봐라. 무천도사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에네르기파 쏘는 장면이다. 이건 교과서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 거북선보다 훨씬 대단한 거라고. 이거 일주일 빌려줄게. 어때?”

덕수의 손에서 크림빵이 툭 떨어졌다.

녀석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소피 마르소의 브로마이드와 조악한 인쇄 상태의 드래곤 볼 만화책을 손으로 더듬으려 했다.

"야, 야! 손 씻고 만져야지. 어떠냐? 이번 주 도서관 청소 구역, 나랑 바꾸는 거다. 이걸로 퉁치는 거다?"

덕수는 잠시 갈등하는 듯했다.

하지만 소피 마르소의 눈빛과 손오공의 에네르기파라는 이 거대한 유혹 앞에, 녀석의 환경부장으로서의 사명감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서... 서진이.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매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비록 주머니는 텅 비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세상 그 어떤 부자보다 풍요로웠다.

나는 교복 상의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본관 3층으로 향했다.

빗자루를 든 나의 뒷모습은, 마치 성배를 찾아 떠나는 중세의 기사만큼이나 비장했다.


방과 후, 노을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도서관 자료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쪽 창을 타고 넘어온 노을은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 위로 무겁게 내려앉아, 면직물의 거친 질감조차 실크처럼 부드럽게 바꿔놓고 있었다.

역광을 받은 그녀의 실루엣은 가장자리가 눈부시게 타오르는 한 장의 인화지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도서 목록 카드를 적을 때마다, 어깨너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동이 노을빛을 머금어 구리색으로 반짝였다.

그 찰나의 반짝임은 마치 6월의 태양이 그녀의 머릿결 속에 숨겨둔 비밀 같았다.

집중하느라 살짝 오므린 입술과,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 비치는 눈동자는 맑은 호수에 저녁노을이 잠긴 듯 깊고 고요했다.

그녀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낡은 종이 냄새와 그녀의 손목에서 배어 나오는 옅은 비누 향기가 섞여 공기 중을 유영했다.

그 공기는 너무나 밀도가 높아서, 숨을 쉴 때마다 내 폐부가 그녀라는 존재로 꽉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한수정 교생 선생님이 문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노을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던 그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묘한 신비감을 만들어냈다. 그 찰나의 각도는 중학생 소년의 심장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어? 서진이니?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아... 그냥요. 아니... 도서실 청소함에 빗자루를 두고 간 것 같아서요.”

나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빗자루를 슬며시 내밀어 보였다.

누가 봐도 이미 내 손에 들려 있는 빗자루를 찾으러 왔다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빗자루? 그거 지금 네 손에 있는 거 아니니?”

수정 선생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황해서 빗자루를 마치 굴렁쇠 소년의 막대기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 이게… 그러니까… 이건 제 건데, 청소함에 있는 학교 것이랑 헷갈려서 확인하러 온 거예요. 제 빗자루가 좀 더… 길을 잘 들었거든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 길이 잘 든 빗자루 따위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수정 선생님은 내 빤한 거짓말을 꾸짖는 대신, 책상 위에 쌓인 먼지 쌓인 책들을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래? 마침 잘 됐네. 길이 잘 든 빗자루를 가진 정서진... 아니, 럭키보이. 너 학급에서 별명이 럭키보이라면서? 잘됐다. 선생님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났는데 도서 목록 작성하는 것 좀 도와줄래?”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쌓여있는 도서 카드를 가리켰다.

"서진아, 여기 도서 명이랑 저자, 그리고 발행 연도를 적으면 돼. 글씨 예쁘게 쓸 수 있지?"

그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내 교복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갔습니다.

여름 공기는 분명 후텁지근했을 텐데, 그녀의 곁에서만큼은 서늘한 비누 향기가 섞인 맑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네, 선생님. 저... 서예 학원 다녔거든요."

사실 그 서예학원은 한 달 내내 ‘한 일(一)’자만 긋다가 먹물 냄새가 지겨워 도망쳤던, 내 유년의 짧고도 불명예스러운 기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노을 아래서, 나는 졸지에 묵향의 깊이를 아는 고결한 선비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모나미 볼펜을 쥐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 때문에 손가락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계문학전집이라고 적어야 할 칸에 '세.. 계.. 무..ㄴ..'까지만 적고는 잉크 똥만 커다랗게 남기고 말았다.

"어머, 서진아. 어디 아픈거 아니니? 손이 떨리네?"

그녀의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내 이마에 닿은 그 감촉은 마치 섭씨 40도의 폭염 속에 떨어진 한 조각 얼음 같기도 했고, 내 안의 모든 수줍음을 태워버리려는 올림픽 성화 같기도 했다.

그 찰나, 내 뇌세포들은 일제히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심장은 자기 멋대로 뛰었고, 내 혈관 속 피들은 갈 곳을 잃고 한꺼번에 얼굴로 몰려들었다.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그것을 부정맥이나 안면홍조라 부르겠지만, 그때의 나에게 그것은 온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자전을 멈춰버린 듯한 거대한 발열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옅은 비누 향기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나는 이대로 내 몸이 녹아내려 자료실 바닥의 먼지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이 열기로 폭발해서 저 낡은 세계문학전집의 한 페이지 속으로 영원히 박제되고 싶었다.

"어머, 서진아.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얼굴이 빨간데?"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밀착해 왔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이마에 닿아있던 그 시간은, 내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손은 기분 좋게 서늘했고, 반대로 내 이마는 펄펄 끓는 양은 냄비처럼 달궈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넋이 나간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얼간이 같은 소년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소년은 지금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을 쉴 때마다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입을 열면 고백이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사춘기의 비명 같은 게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눈을 질끈 감으며, 겨우 이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선생님, 저... 저 지금 되게 위험하니까, 제발, 제 이마에서 손을 떼 주시면 안 될까요?"

"위험해? 서진아, 어디가 어떻게 위험한데?"

그녀가 놀라 손을 떼며 물었다.

나는 얼굴이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빗자루를 꼭 쥐고 대답했다.

"몰라요. 그냥... 그냥 지금 제 근처에 있으면 선생님도 감기 옮을지 몰라요. 저 지금 진짜... 진짜로 몸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료실을 뛰쳐나왔다.

복도를 달리는 내내, 내 발소리가 방과 후 도서관의 정적을 깨뜨리는 경보음처럼 크게 울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느낀 위험함은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소년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무너져 내리는 감각에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한 게 아니었다.

내 지독한 짝사랑이 그녀에게 들통나, 이 평화롭고 눈부신 오후가 산산조각 날까 봐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창문에 이마를 갖다 댔을 때 차가운 유리창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식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988년의 여름은 그렇게, '위험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와 함께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계절로 기록되고 있었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