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교생이 다 아는 '그 녀석'

거대한 상상력의 공장

by 한자루




1988년의 중학교 1학년 교실은 정보의 빈곤이 낳은 거대한 상상력의 공장이었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누군가의 연애 소식은 복도를 거치며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곤 했다.

기남이가 내 책상으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 앉았을 때, 녀석의 입술은 이미 근질거림을 참지 못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야, 정서진. 너 다연이 소식 들었냐?”

나는 짐짓 필통을 정리하는 척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다연이? 뭐. 걔가 수학 숙제라도 안 해왔대?”

“아니, 인마. 걔 지금 1학년 전체가 다 아는 그 녀석이랑 무슨 썸씽이 있는 것 같아.”

다 아는 그 녀석이라는 불분명한 대명사가 내 가슴 한구석을 쿡 찔렀다.

그 ‘다 아는 그 녀석’을 기남이도 나도, 그리고 우리 반은 물론 우리 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 가운데서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신기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짐짓 마이크로 샤프 뒷부분의 뚜껑을 열고, 가느다란 0.5mm 샤프심 한 알을 신중하게 집어넣는 척하며 시선을 주지 않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기남이에게 들키지 않으려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누군데?”

나는 최대한 건조하게, 마치 지나가는 뉴스 속보를 묻는 사람처럼 툭 던졌다.

그리고는 샤프 뒷부분을 딸깍, 딸깍, 딸깍 세 번 눌렀다.

기남이는 내 반응에 신이 났는지 목소리를 낮추며 내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름은 정확히 모르는데, 어쨌든, 보통 녀석이 아니래. 누구는 걔가 충암 중학교 야구부 주장이라 그러고, 누구는 벌써 고등학교 수학을 뗀 수학 천재라고도하고. 키가 180이 넘는다는 소문도 있어. 게다가 아버지가 방송국 국장이라 드라마 대본도 미리 본다나 봐. 다연이가 걔랑 종로 카페 골목에서 만나는 걸 봤다는 소문이 1학년 전체에 쫙 퍼졌어.”

썸씽이라는 단어가 내 고막을 때리는 순간, 힘을 너무 준 나머지 갓 나온 샤프심이 툭 하고 부러져 책상 위로 굴러갔다.

내 자존심의 한 조각이 부러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흥, 키가 180? 14살이 그렇게 크면 그건 거인증 아니냐? 그리고 방송국 국장 아들이면 뭐 해, 지가 조용필이나 이문세도 아니고..."

나는 부러진 샤프심 파편을 손톱으로 튕겨내며 짐짓 쿨하게 덧붙였다.

“나는 다연이 같은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별 관심이 없어. 개가 누구랑 만나든 사귀든, 내가 알 게 뭐야. 걔 수준엔 딱이네. 코흘리개 연애질이라니... 난 요즘 말이야, 좀 더... 뭐랄까, 정신적인 교감을 중시하는 어른스러운 사랑에 집중하고 있거든."

나는 짐짓 먼 산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기남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른스러운 사랑? 너 혹시 아직도 교생 선생님을..."

"쉬잇! 함부로 부르지 마. 한 선생님과 나는 이미 마음을 나누고 있는 사이니까."

내 말투는 뻔뻔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연이가 다른 녀석과 웃으며 길을 걷는 상상을 하자, 어제 수정 선생님과 석두네 집을 다녀오며 느꼈던 그 숭고한 감정들 사이로 지독하게 유치하고 따끔거리는 질투라는 가시가 돋아났다.

수정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이 종교였다면, 다연이는 내가 돌아가야 할 집 같은 것이었다.

교회에서 고결한 기도를 올리던 신자가 문득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당혹감.

나는 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내 교복 자락을 꼭 잡던 소꿉친구의 손길을 잃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남이 앞에서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별 관심 없는 표정을 보자 기남이는 발끈하며 말했다.

“야. 정서진! 넌 다연이가 남자친구 사귄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남자 친구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하마터면 애써 꺼낸 0.5mm 샤프심을 다시 부러뜨릴 뻔했다.

나는 샤프 끝을 책상 바닥에 대고 뾰족하게 날을 세우며, 짐짓 쿨한 척 덧붙였다.

“뭐, 중학생이 사귀어봤자 떡볶이 먹는 거 말고 더 있냐. 난 관심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귀는 이미 기남이의 입술 방향으로 0.5mm쯤 기울어져 있었다.

기남이의 입에서 나올 모두가 아는 그 녀석의 구체적인 스펙, 이를테면 신는 운동화 브랜드나, 가지고 다니는 워크맨 모델명 같은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기남이는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한 소식통이었다.

자기의 특종이 내 철벽 같은 무관심에 막히자, 김 빠진 콜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래? 그럼 관둬라. 난 또 네 소꿉친구 일이라서 특별히 먼저 알려주려고 했더니만. 넌 계속 그 정신적 교감인지 코딱지인지 뭔지 하는 거나 계속 파라. 난 다른 애들한테 가서 말해줘야지. 걔네는 지금 환장하고 기다리고 있거든.”

기남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교실 뒷문 쪽, 이미 서너 명이 모여 쑥덕거리고 있는 무리로 걸어갔다.

기남이가 그곳에 합류하자마자 “야, 대박!” “진짜?” 하는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홀로 남겨진 책상에서 다시 애꿎은 샤프만 딸깍 눌러댔다.

기남이를 붙잡고 “아까 그 180cm 녀석, 나이키 신었대?”라고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방금 내뱉은 정신적 교감이니 어른스러운 사랑이니 하는 말 따위가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되어 내 입을 막고 있었다.


기남이의 주변으로 모여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내 샤프심은 점점 더 길게 뽑혀 나오고 있었다.

질투는 그렇게 소리 없이 쌓여가는 것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짓 다 쓴 연습장 한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북- 찢어 쥐고는, 교실 뒤쪽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기남이네 무리가 모여 있는 그 금단의 구역을 슬쩍 지나가 볼 요량이었다.

14살 소년의 자존심이란, 이렇게 뻔히 보이는 핑계 뒤에 숨어 근근이 버티는 가련한 것이었다.

쓰레기통 앞에 서서 나는 최대한 천천히 종이를 버렸다.

그리고는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게시판에 붙은 '춘계 소풍 안내 : 서오릉' 공고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준비물인 '도시락, 돗자리, 그리고 답사 보고서용 필기도구, 자율복장, 편안한 운동화' 따위의 글자를 해독하는 척했지만, 내 고막은 이미 0.5mm 샤프심보다 날카롭게 세워져 기남이의 입술 끝을 향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걔가 이번 소풍 때 공개적으로 사귀자고 발표한대! 다연이한테 말이야!

기남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공개 프러포즈라는 단어는 교실 뒷벽을 맞고 튀어나와 내 가슴팍에 정면으로 꽂혔다.

중학생들에게 프러포즈란 결혼을 약속하는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전교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오늘부터 1일이다.”라고 땅땅땅 선언하는, 일종의 영토 점령 선포식과 같은 것이었다.

“야, 서오릉 그 넓은 능 앞에서 꽃다발이라도 들고 나타나는 거 아냐? 진짜 대박이다, 그 녀석.”

아이들의 감탄사가 이어질수록 내 눈앞의 소풍 안내문은 점점 흐릿해졌다.

소풍 게시물에 편안한 운동화라는 글자가 마치 ‘도망칠 준비나 해라.’는 조롱처럼 보였다.

180cm의 거구가 서오릉의 소나무 숲 사이에서 꽃다발을 들고 다연이에게 다가가는 광경...

그것은 내가 꿈꾸던 한수정 선생님과의 고결한 소풍을 단숨에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바꿔놓기에 충분한 공포였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기남이가 전해주는 소문은 복도를 한 번 거칠 때마다 '그 녀석'의 키를 1cm씩 키웠고, 계단을 하나 오를 때마다 '그 녀석'의 집안 배경은 업그레이드되어 갔다.

교실 뒷자리는 그렇게 실체 없는 거인을 만들어내는 신화의 발상지였다.

“야, 들었어? 걔 어제 다연이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더라. 엄청 비싼 외제 가방을 메고 있었데.”

“아니야, 내 사촌 형 친구의 친구가 그러는데 걔 아버지가 KBS 방송국 국장이래.”

단 한 명도 그 녀석의 실체를 본 적이 없었지만, 소문 속의 녀석은 이미 88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완벽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칠판지우개를 털러 나가면서도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의 대화에서 작은 정보라도 얻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야, 다연이랑 사귄다는 그 녀석 이름이 뭐야?”

“몰라, 성은 김 씨라던데? 아니 이 씨였나?”

아이들은 서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 불확실함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때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그 녀석’의 실체는 사실 우리들의 열등감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연이가 좋아하는 그 아이가 우리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이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야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한 다연이를 이해할 수 있었고, 거울 속 내 초라한 모습에 면죄부를 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방과 후,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방구석으로 내팽개쳤다.

머리가 꽉 막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사실 그게 머리인지 가슴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 눅눅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무작정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왔다.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 소리가 났다. 그것은 마치 내 속 좁은 질투심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고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담벼락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정서진!” 나를 부르는 다연이의 목소리였다.

다연이는 나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처럼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손짓조차 내일 있을 공개 프러포즈를 축하해 달라는 것처럼 보여 속이 뒤틀렸다.

나는 자전거 브레이크를 소리 나게 잡으며 짐짓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어, 다연이구나. 여기서 뭐 하냐?”

“뭐 하긴, 내일 소풍이잖아. 간식이랑 엄마 심부름으로 김밥 재료 좀 사가는 길이야. 집에 가는데 네가 보여서 불렀지. 근데 너 왜 그렇게 넋이 나간 사람처럼 페달을 밟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뭐? 안 좋은 일이 있냐고?'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자전거 핸들을 괜히 좌우로 흔들었다.

“안 좋은 일 무슨. 그냥 내일 소풍 장소인 서오릉의 역사적 고립감에 대해 생각 좀 하느라 그랬다. 넌 내일 소풍 준비 다 했냐?”

“뭐 대충... 너 내일 몇 시에 갈 거야? 7시 반에 버스 정류장에서 애들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기남이랑, 우리 반 선주도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갈래?”

다연이의 말에 기남이가 전해준 그 녀석의 프러포즈 계획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그 녀석이랑 같이 가면 될 것을, 다연이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짐짓 차갑게 대꾸했다.

“글쎄, 난 내일 한수정 교생 선생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거든. 선생님이 서오릉이 어딘지 잘 모르신다고 해서 내일 일찍 학교에서 선생님이랑 만나서 같이 기로 했어. 그나저나 다연이 너, 요즘 바쁜 모양이더라? 뭐라더라... 그 녀석이랑 사귄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나는 최대한 관심 없는 척 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연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운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내 자전거 안장을 툭 쳤다.

“너까지 진짜 왜 그래? 그 녀석은 또 누구고...? 너 설마 애들이 떠드는 그 헛소문... 믿는 거 아니지?”

'헛소문인지 진실인지는 내일 서오에서 밝혀지겠지.' 내 속에선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의 냉철한 대사가 읊조려지고 있었어.

"몰라. 그런 소문 같은 것에 관심 없어. 난 바빠서 이만. 내일 도시락이나 잘 싸라.”


그때 내가 부렸던 그 차가운 허세는 사실 “제발 그 소문이 가짜라고 말해줘.”라는 비겁한 애걸복걸이었다.

다연이가 지었던 그 서운한 표정은 붉은 노을 속에 그대로 박제되었고, 나는 페달을 밟으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자전거 체인 소리는 아까보다 더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침은 알람 소리가 아니라, 주방 도마 위에서 경쾌하게 울리는 어머니의 칼질 소리로 시작되었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아직 잠 덜 깬 공기를 가르고 있었지만, 집안은 이미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일 년에 딱 한 번, 소풍날에만 허락되는 특별한 향기였다.

나는 엄마를 졸라 한수정 선생님을 위한 특별 도시락까지 준비했다.

그건 평범한 김밥이 아니었다.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햄과 맛살을 두 배로 넣고, 무려 방울토마토로 데코레이션까지 마친, 1988년형 하이엔드 도시락이었다.

엄마는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비장하게 식탁 위에 음식 재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커다란 양은 양대기에는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밥이 참기름과 깨소금에 버무려진 채 대기 중이었고, 그 옆으로는 노란 단무지와 초록색 시금치,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들인 백설햄한성 게맛살이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엄마의 칼끝에서 썰려 나가는 김밥은 단면부터가 예술이었다.

하얀 쌀밥의 바다 한가운데, 색색의 재료들이 황금 비율로 박혀 있는 그 모습은 열네 살 소년인 내가 봐도 하나의 예술이었다.

특히 밥알 하나하나에 코팅된 오뚝이 참기름의 번들거리는 윤기는, 6월의 아침 햇살을 받아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향기로운 참기름 냄새에 영진이 형이 중독이라도 된 듯 비틀거리며 부엌에 나타났다.

형은 어젯밤에 무얼 했는지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에 거뭇한 다크서클을 단 채, 어머니가 갓 썰어놓은 김밥 재료 중에서 백설햄과 게맛살을 입으로 가져갔다.

“야, 영진아! 서진이는 벌써 준비 다 끝냈는데 넌 이제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김밥 재료를 먹으면 어떡하니?”

어머니의 잔소리에 형은 입안 가득 백설햄을 우물거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엄마, 나 요즘 연합고사 준비로 칼로리가 부족하다고요. 수험생의 고충을 엄마는 몰라도 너무 몰라요. 서진이 얘는 좋겠네, 1학년이라 입시 걱정도 없고.”

형은 입안 가득 햄을 우물거리며, 제법 비극의 주인공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비장한 표정 너머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형의 책상 위에 놓인 문제집의 본문은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아 눈부시게 깨끗했지만, 정답과 해설지 부분만은 손때가 묻어 누렇게 변색되어 있던 그 기묘한 불균형을 말이다.


어머니는 영진이 형의 그 수험생 코스프레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대신, 어머니는 일회용 알루미늄 도시락 통의 뚜껑을 집어 들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툭 던지셨다.

“영진아, 그만 먹어. 그러다가 도시락 쌀 것도 없겠다. 그리고 칼로리는 머리가 아니라 입이 쓰고 있는 거 같은데, 양심이 있으면 그만 집어 먹고 가서 세수나 해.”

어머니의 냉엄한 댓구에 형은 햄을 씹다 말고 멈칫했다.

형은 억울한 듯 가슴을 쳤지만, 어머니의 서슬 퍼런 칼질 소리에 기가 죽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도 내 접어 올린 바짓단을 보더니 얄밉게 한마디를 보탰죠.

“야, 서진아. 바지 그렇게 접는다고 네가 유덕화처럼 보일줄 아냐? 차라리 서오릉 흙이라도 파먹어라. 그게 너한테는 더 도움 될 거다.”

어머니가 등짝 스매싱을 날리려 손을 치켜들었지만, 형은 날렵하게 몸을 피하며 기어이 햄 한 줄을 통째로 입에 물었다.


당시 우리 또래들에게 소풍은 단순한 야외활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복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오직 '옷' 하나로 나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치열한 런웨이기도 했다.

바짓단을 단순히 접어 올리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바지의 옆선을 팽팽하게 당겨 남는 천을 뒤로 겹친 뒤, 발목을 조이듯 두 번 단단하게 말아 올리는 이른바 핀롤 작업이 핵심이었다.

바지통은 좁아지고 발목은 날렵해지는 이 실루엣이야말로 당시 우리들의 신이었던 유덕화가 보여준 홍콩 누아르의 완성이었다.

핀롤로 날을 세운 바짓단을 보고 있으면, 내가 지존무상이나 열혈남아 속 유덕화라도 된 양 금방이라도 오토바이 굉음을 내며 거울 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던 시절이었다.

형은 햄을 시가처럼 입에 문 채,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긁으며 유유히 제 방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런 형의 뒷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도마 위 김밥들이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만든 김밥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김밥 꼬다리였다.

김밥 꼬다리는 향기로운 재료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마치 화려한 꽃 같았다.

마침내 차곡차곡 쌓인 김밥들이 얇은 쿠킹 호일 같은 일회용 알루미늄 도시락 통 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혹시라도 뚜껑이 열릴까 봐 그 위에 노란 고무줄을 십자로 튕겨 단단히 마무리했다.

나는 그 묵직한 도시락 가방을 챙기며 생각했다.

‘다연아, 넌 알 수 없는 그 녀석과 꽃다발을 나누렴. 난 이 백설햄의 육질과 게맛살의 풍미가 담긴 도시락을 한수정 선생님께 바칠 테니.’


집을 나선 나는 선진운수 159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육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버스는 오늘따라 거대한 전함처럼 위풍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선진운수 159번 버스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압착기나 다름없었다.

뒷문 계단 끝까지 사람달이 매달려 대롱거릴 때마다, 버스는 육중한 비명을 지르며 서오릉을 향한 거친 비포장도로를 헤치고 나갔다.

그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나는 유덕화 같은 고독한 킬러의 포즈는커녕 임신부보다 더 조심스러운 자세로 가방을 품에 안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오늘 내 인생의 향방을 결정지을 전략 물자들이 들어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일회용 알루미늄 도시락이었다.

쿠킹 호일보다 아주 조금 두꺼울 뿐인 그 연약한 은색 상자는, 옆에 선 아저씨의 엉덩이 압박 한 번이면 사랑의 김밥이 햄-게맛살 비빔밥으로 변해버릴 게 분명했다.

“야, 정서진. 너 지금 보물찾기 쪽지라도 미리 삼킨 표정이다? 왜 그렇게 가방을 보물지도처럼 안고 있어?”

기남이는 이 지옥 같은 만원 버스 안에서도 기어이 초록색 ‘봉봉’ 캔의 뚜껑을 따더니, 캔 밑바닥을 손바닥으로 ‘탁! 탁!’ 치며 마지막 남은 포도 알갱이를 사냥하면서 물었다.

“... 조용히 해. 지금 내 등 뒤에 계신 아저씨 뱃살이 내 가방을 45도 각도로 압박하고 있단 말이야. 여기서 한 번만 더 덜컹거리면, 수정 선생님께 드릴 내 김밥은 ‘게맛살 죽’이 된다고!”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버스가 코너를 돌 때마다 사람들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렸고, 내 가방은 그 거대한 인간 파도 사이에서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특히 걱정되는 건 맛소금 비닐 뭉치와 삶은 계란이었다. 만약 여기서 계란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가방 안은 온통 하얀 소금 가루와 노른자 가루로 도배될 것이고, 그건 일 년에 한 번뿐인 소풍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가방을 가슴팍으로 최대한 밀착시키며, 내 갈비뼈가 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시락의 직사각형 형태만큼은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그때였다. 선진운수 159번 버스가 비포장도로의 요철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급정거를 했다.

내 앞에 서 있던 아줌마의 묵직한 보따리가 관성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내 가방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아악!”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내 갈비뼈라도 부러진 줄 알고 일제히 나를 쳐다봤지만, 내가 살핀 건 내 뼈의 안위가 아니었다.

가방 안에서 들려온, 그 불길하고도 선명한 ‘바스락’ 소리.

그것은 얇은 알루미늄 도시락 통이 외부의 무지막지한 압력에 굴복하며 내뱉은 비명이자, 내 로맨스가 찌그러지는 소리였다. 이어 가방의 지퍼 틈새로 묵직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도시락 통 안에 갇혀 있던 백설햄과 오뚝이 참기름의 농축된 향기가 찢어진 종이 뚜껑 사이로 ‘훅’ 하고 탈출하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야, 서진아. 도시락 터진 거 아니야?”

옆에서 ‘봉봉’ 캔을 흔들던 기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버스 안의 소음보다 더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렀다.

코끝을 스치는 이 압도적인 고소함. 그것은 소풍의 승리를 알리는 전주곡이 아니라, 얇은 알루미늄 도시락 통이 뚜껑을 내던지며 내보내는 항복의 신호였다.


버스가 드디어 서오릉 입구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을 때, 나는 탈진한 군인처럼 비틀거리며 내렸다.

서오릉 매표소 앞,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정거장에 내려서자마자 나는 누가 볼세라 가장 거대한 노송 뒤로 몸을 숨겼다.

가방 지퍼를 열기 전, 나는 마치 전사자의 유품을 확인하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내 로맨스가 담긴 그 은빛 상자는 과연 어떤 몰골을 하고 있을까 바짝 긴장한 시선으로 가방이 열리고 있었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