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한 일상이 만들어낸 공동의 환상
지퍼를 열자마자 가방 안에서 맴돌던 진한 백설햄의 향기가 수류탄처럼 터져 나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찌그러진 일회용 알루미늄 도시락을 꺼냈다.
“... 아!”
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얇은 알루미늄 통의 왼쪽 모서리가 아줌마 보따리에 정면으로 찍혀 45도 각도로 처참하게 꺾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처참한 잔해를 조심스레 들춰본 순간, 나는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불행 중 다행, 아니 우주의 섭리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도시락의 찌그러진 모서리 쪽에는 김밥 꼬다리 두 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삐져나온 단무지와 게맛살 덕분에 부피가 컸던 그 녀석들이 에어백처럼 몸을 던져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낸 것이다.
덕분에 수정 선생님께 바칠 정중앙의 정갈한 김밥들은 약간 옆으로 쏠렸을 뿐, 아름다운 단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우려했던 삶은 계란은 가슴팍으로 꼭 안고 있었던 덕분에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당시 김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어머니들의 자존심 대결이자 아이들의 꿈이 말린 두루마리였다.
햄이 두꺼울수록 기가 살았고, 게맛살이 들어있을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시절.
나는 그 고소한 냄새가 다연이와 수정 선생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사춘기의 소란을 잠재워주길 바랐다.
서오릉안에 집결 장소에 도착하자 풍경은 장관이었다.
야생에 풀려난 고삐 풀린 14살 사내 녀석들은 조선 왕릉의 능침을 미끄럼틀 삼아 타고 내려오다 학생 주임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혼쭐이 났고, 한쪽에서는 더블 데크 카세트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리듬에 맞춰 장기 자랑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느긋하게 햇살을 즐기는 교생 선생님들 사이에서, 수정 선생님은 아이들의 사고를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 눈에는 눈부신 6월의 햇살 속의 여신처럼 보였다.
드디어 소풍의 꽃인 장기 자랑 시간이 되었다.
우리들의 장기자랑은 예술의 경연이라기보다는, 누가 더 장엄하게 망가지는가를 겨루는 공동체적 투신의 장이었다.
"어젯밤에 난 네가 미워졌어!"
노랫소리가 터지자마자, 전교에서 춤 좀 춘다는 녀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흙먼지 날리는 공터로 모여들었다.
하얀 면바지를 입고 앞머리에 무스를 잔뜩 바른 3학년 형들이 정원관처럼 공중제비를 돌 때마다,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서오릉 소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1학년의 장기자랑은 그 환호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카세트 데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건전지가 다 되어가는지 묘하게 피치가 낮아져, 소방차 형님들의 목소리를 마치 지옥에서 온 저음 가수들처럼 들리게 했다.
그 기괴한 리듬에 맞춰 우리 반 ‘삼총사’가 튀어나왔다.
몸무게가 70kg은 나갈 법한 뚱뚱한 경수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멸치 상철이, 그리고 박자 감각이라곤 태어날 때부터 분실한 기남이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펭귄들처럼 뒤뚱거리며 소방차의 시그니처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하이라이트인 텀블링 순서가 왔을 때, 경수는 공중제비 대신 흙바닥에 거대한 메주처럼 처박혔고, 그 충격으로 서오릉의 해묵은 흙먼지가 원자폭탄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자지러졌고, 담임 선생님은 웃다 못해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하지만 그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나만은 냉전 시대의 첩보원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지금인가? 저 소나무 뒤에서 180cm의 괴물이 꽃다발을 들고 튀어나올 타이밍인가?’
내 눈에는 경수의 뒤뚱거리는 몸개그보다 숲 속의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가 더 위협적이었다.
다연이가 개그 삼총사를 보며 웃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혹시 프러포즈를 기다리는 설렘의 전조 증상이 아닐까 싶어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장기 자랑이 정점으로 치달아 기남이가 바지가 터지는 줄도 모르고 다리를 찢을 때, 나는 가방 속의 ‘백설 88 햄’ 도시락을 꽉 쥐었다.
만약 베일에 싸인 '그 녀석'이 나타난다면, 안중근 의사처럼 이 묵직한 도시락통을 던져서라도 다연이를 지켜내겠다는 비장한 결의였다.
14살 소년의 눈에 비친 장기 자랑은 그렇게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흙먼지 날리던 장기 자랑이 끝나고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승리한 로마 군대처럼 당당하게,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긴장한 눈빛으로 떨며 수정 선생님을 찾았다.
'아. 그녀가 저기 보인다.' 거대한 노송 그늘 아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려앉는 그곳에 한수정 선생님이 서 있었다.
나는 선생님 앞으로 다가가서 품 안의 은빛 방주 같은, 일회용 알루미늄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것은 159번 버스의 시련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나의 자존심이자 연애편지였다.
“선생님... 이거 아침에 저희 어머니가 싸주신 건데, 좀 눌렸지만 맛은 보장합니다.”
선생님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어머, 서진아. 선생님 것까지 준비했어?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선생님은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살짝 찌그러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과 백설햄의 위엄 있는 자태가 숲의 공기를 점령해 갔다.
선생님은 하얀 손가락으로 가장 예쁘게 말린 김밥 한 알을 집어 들더니, 내 입술 끝으로 가져왔다.
“자, 나의 다알링- 아-해봐. , 달링부터 한 입!”
순간, 서오릉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내 귓가엔 이문세의 '시를 위한 시'가 풀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울려 퍼졌고, 내 몸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유덕화의 오토바이를 타고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입안에서 백설햄의 육즙이 팡 터지는 순간, 은하수를 가로지르던 유덕화의 오토바이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비명을 질렀다.
감미롭던 이문세의 선율은 레코드판이 긁히는 듯한 기괴한 불협화음으로 변해갔다.
그때였다. 내 눈앞에서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던 한수정 선생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경 너머로 살벌한 안광을 뿜어내는, 우리 학교 최악의 빌런 독사 선생님이 서 있었다.
“나의 다알링~ 서진아... 어때? 억수로 맛있제? 그치만 네 수학 성적표를 보면 내 마음은 참 찢어진단다? 어서 먹으렴. 이게 네 인생의 마지막 영광일지도 모르니까. 히히히.”
다시 한번 한수정 선생님의 맑은 목소리가 찬물처럼 쏟아졌다.
"서진아! 괜찮아? 갑자기 왜 멍하게 있어?"
"앗... 네? 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대답했다.
불길한 환상 같은 것이 깨지며 현실로 돌아왔다.
한수정 선생님은 소나무 앞쪽에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며 소리쳤다.
“얘들아! 여기 서진이가 맛있는 김밥 가져왔는데 다들 이리 와서 같이 먹자!”
선생님의 그 외침 한마디에 숲 속 여기저기서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남이부터 시작해 팩 음료수를 든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선생님 주변을 에워쌌다.
나의 '프라이빗 라운지'는 순식간에 '재래시장'이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석두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녀석은 자기 가방에서 터진 삶은 계란을 우물거리며 내 도시락을 빤히 쳐다봤다.
“와, 선생님! 이 김밥 선생님 거예요? 진짜 맛있어 보이는데... 저 한 개만 먹어도 돼요?”
석두의 그 무례한 질문에 내 가슴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더 기막힌 건 선생님의 반응이었다.
선생님은 특유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 영혼이 담긴 그 도시락 통을 석두에게 통째로 밀어주었던 것이다.
“그래 석두야, 우리 도시락 꺼내서 모두 함께 먹자.”
“우와! 선생님 최고! 잘 먹겠습니다!”
석두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큼지막한 김밥 두 알을 한꺼번에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내가 수정 선생님을 위해 사수했던 한성 게맛살과 백설햄의 정예 부대들이 석두의 거대한 구강 속으로 무기력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텅 비어 가는 알루미늄 도시락 통과, 그 곁에서 아이들과 환하게 웃고 계신 수정 선생님을 보며 생각했다. '유덕화라면 이 상황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석두를 치고 나갔을까? 아니면... 아니지, 이건 전격 Z작전의 키트라도 불러야 하는 상황인가?'
하지만 키트는 미국 차라 이 좁은 서오릉까진 못 올 게 뻔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수정 선생님의 미소는 천국이었지만, 비어버린 도시락 통은 지옥이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건 소풍 전날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주신 김밥 속 햄 같은 건지도 모른다.
가장 맛있는 부분을 친구 녀석에게 홀랑 뺏겨버리고, 남은 단무지만 씹으며 "이게 다 인생의 쓴맛이지"라며 폼 잡아야 하는 중학교 1학년 소년의 숙명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유덕화의 비장미를 흉내 내며 짐짓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한수정 선생님은 나를 보며 "서진아, 넌 왜 안 먹니?"라고 물었지만 난 그저 미소만 지으며 속으로 말했다.
'선생님, 인생은 원래... '쇼 비디오 쟈키'처럼 웃다가도 갑자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처럼 눈물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제 김밥은 이미 선생님의 미소 속에서 영생을 얻었으니까요...'
물론 내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지만, 나는 끝까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유덕화식 고독한 카리스마를 유지하려 애썼다.
1988년 6월의 햇살은 잔인하리만큼 눈부셨고, 내 가방에서는 이제 더 이상 고소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서오릉의 햇살이 나른하게 퍼질 무렵, 석두는 다시 한번 ‘유덕화 무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풍 가방을 옆으로 메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쥬시후레쉬 껌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4반의 노란 카디건을 입은 귀여운 수진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야, 전교 1등. 소풍 와서까지 그렇게 깨알 같은 글자만 파고 있으면 인생이 좀 안 불쌍하냐? 인생은 말이야, 이런 종이때기 안에 있는 게 아니야. 저 뜨거운 태양, 그리고 저기 흐르는... 어, 저 개울물 같은 뜨거운 의리에 있는 거라고. 알겠냐?"
석두의 목소리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수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성문 종합영어 단어장은 마치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견고해 보였다.
석두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듯 가죽점퍼의 깃을 바짝 세우고는, 수진이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너, 내가 이 점퍼를 왜 한여름에도 안 벗는지 알아? 이건 내 영혼의 갑옷이야. 너처럼 온실 속 화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거친 세계가 있다고. 어때, 소풍 끝나고 내가 오토바이 좀 태워줄까? 뒷자리에 타는 순간, 넌 이 지루한 서오릉이 아니라 홍콩 뒷골목 같은 신세계를 보게 될걸?"
그제야 수진이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석두에게 드디어 엄청난 심판이 떨어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수진이의 눈빛은 뙤약볕 아래 방치되어 상해버린 우유를 바라보듯 석두를 바라보다가 영어 단어장을 ‘탁’ 소리가 나게 덮으며 일어섰다.
"마석두. 난 너 같은 양아치한텐 조금도, 1밀리미터도 관심 없으니까 좀 비켜줄래? 네 그 쉰내 나는 영혼의 갑옷을 잘 가지고 어디든 가주면 안 되겠니?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말이야."
석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수진이의 화력 지원이 이어졌다.
"그리고 너, 아까부터 의리 타령인데, 네 성적표랑은 의리 안 지키니? 네 성적표는 벌써 너랑 의리 끊고 가출한 것 같던데. 공부 좀 해. 그래야 성적표가 너랑 의리를 지키든, 협상을 하든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석두는 마치 링 위에서 턱에 정통 카운터를 맞은 복서처럼 멍한 표정이 되었다.
유덕화의 비장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수진이의 독설에 너덜너덜해진 중학교 1학년 아이들 속에 파묻힌 16살 또 다른 소년만 남았다.
88년의 봄,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학교의 ‘독사’ 선생님도, 중간고사 성적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짝사랑하는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논리적인 팩트 폭격이었다.
수진이에게 '성적표와 의리를 지키라.'는 일침을 맞은 석두는 마치 엔진 꺼진 오토바이처럼 맥없이 풀밭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석두를 뒤로한 채, 어떻게든 한수정 선생님의 관심을 끌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유덕화가 비극적인 영웅이라면, 나는 적어도 선생님의 눈에 띄는 귀여운 제자라도 되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선생님, 선생님! 저기 소나무 위쪽에 가지 좀 보세요! 저렇게 구석진 데 숨겨놓은 건 안 봐도 1등 보물 종이예요. 다른 반 애들이 채가기 전에 선생님이 솜씨 좀 보여주세요. 선생님이 딱 집어 주시면 우리 반 오늘 완전 축제잖아요!"
나의 호들갑에 선생님은 하얀 손등으로 햇빛을 가리며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진짜로 종이 한 장이 아슬아슬하게 나풀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청바지의 허리띠를 졸라맸다.
“어머, 진짜네? 서진아, 선생님이 저거 꼭 찾아줄게. 우리 반이 1등 해야지!”
선생님은 조심스레 소나무 둥치를 딛고 올라섰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녀린 체구에 그 가지는 너무나 위태로웠다.
선생님의 하얀 손가락이 종이에 닿으려던 찰나, ‘뚝’ 하는 불길한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어... 어머!”
선생님은 중심을 잃고 덤불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선생님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나는 내 머릿속의 모든 회로가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이 떨어진 그 덤불은 마침 서오릉을 지배하던 말벌들의 요새였으니까.
‘웅-’
낮고 불길한 진동음이 소오릉의 고요한 공기를 찢고 솟구쳤다. 선생님이 떨어지며 박살 낸 건 단순한 덤불이 아니라, 성난 말벌들의 요새였다.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른 말벌 떼는 지옥에서 온 전투기처럼 공중을 선회했다.
아이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운명의 장난은 가장 가혹한 곳에서 멈춰 섰다.
그 아수라장의 한복판, 석두와 수진이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 수진이가 입고 온 화사한 노란색 카디건이 문제였다.
성난 말벌들의 눈에 그 노란색은 거대한 표적이자,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한 가장 눈에 띄는 적이었다.
말벌 떼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수진이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수진이를 향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좁혀오는 벌들의 날갯짓 소리는 거대한 전동 드릴처럼 수진이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수진이는 단어장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개나리 같은 노란 카디건 위로 검은 말벌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수진이는 정지 화면처럼 그 자리에 박박 주저앉아 버렸다.
“수진아! 피해! 최수진!”
내 목소리는 벌들의 웅성거림에 묻혀버렸다.
수진이의 눈에 공포가 서리는 그 찰나의 순간,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바로 마석두였다.
그는 수진이에게 무시당했던 그 쉰내 나는 가죽점퍼를 단숨에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몸을 날려 수진이를 통째로 덮어버렸다.
“유덕화는... 여자를 혼자 두지 않아!”
석두는 뻣뻣한 인조 가죽점퍼 아래로 수진이를 밀어 넣고, 자신은 등 뒤로 쏟아지는 벌들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인조 가죽점퍼가 수진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빈틈없이 가려주는 방패가 되었다.
“아악!”
점퍼 너머로 석두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벌들의 침이 석두의 목덜미와 팔뚝을 사정없이 찔러댔지만, 석두는 수진이를 품에 안은 팔에 더 힘을 줬다.
그러더니 괴성을 지르며 벌들을 유인하기 위해 반대편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들아! 나 여기 있다! 나를 쏴라!”
석두의 뒷모습이 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넋을 잃고 서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석두를 걱정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발목을 움켜쥐고 신음하는 한수정 선생님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입니다.
“정서진! 반장 명호랑 같이 한 선생님 모시고 당장 병원으로 가라! 선생님은 여기 상황을 좀 정리하고 뒤 따라가마.”
나는 죄책감에 짓눌린 채 반장 명호와 함께 선생님을 부축했다.
선생님의 가녀린 어깨가 내 몸에 닿았을 때, 원래라면 심장이 터질 듯 설레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저 눈물만 나올 것 같았다.
인구 1,000만 명을 돌파했다는 1988년의 서울이었지만, 서오릉 인근의 정형외과 대기실은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소리만이 어색한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 돌아보면, 그날의 정적은 폭풍전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열네 살 소년이 쌓아 올린 견고한 환상이 단 한 번의 경적 소리에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고요함 말이다.
“선생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려야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나는 부어오른 선생님의 발목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비장한 기사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수정 선생님은 자꾸 시계를 보며 괜찮다고만 했다.
“서진아, 명호야. 이제 정말 괜찮아. 너희도 소풍 마무리하러 가봐야지. 어서 가봐.”
선생님의 간곡한 거절이 의아해질 무렵, 병원 앞마당에서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울렸습니다.
빵, 빵-
갑자기 병원 유리문이 벌컥 열리더니 빳빳하게 풀 먹인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수정아! 괜찮아? 소식 듣고 바로 왔어.”
선생님의 얼굴에는 하루 종일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교생 선생님의 미소가 아닌,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설고 수줍은 여자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너희가 우리 수정이 도와준 학생들이구나? 고맙다. 자, 이건 가는 길에 맛있는 거 사 먹어라."
그는 명호와 나의 손에 빳빳한 지폐 한 장씩을 쥐여주었다.
예의 바른 중학생이라면 모름지기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넙죽 튀어나와야 했을 텐데, 내 목소리는 가느다란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기만 했다.
내 시선은 이미 병원 문밖, 오후의 햇살을 받아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물건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던 은색 현대 엑셀 자동차에 완전히 못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 그 현대 엑셀 자동차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중산층의 꿈이자, 주머니에 든 버스 회수권 한 장이 전 재산인 소년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남자가 한수정 선생님을 조수석에 태우고 능숙하게 기어를 변속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정성껏 준비한 햄 가득한 김밥도, 빗자루를 들고 도서실을 서성이던 그 지독한 진심도, 저 매끄러운 자동차 보닛 위로 미끄러지는 오후의 햇살보다 가벼웠다는 사실을.
엑셀의 엔진 소리가 멀어질수록,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열병 같은 짝사랑의 온도가 급격히 식어갔다.
나는 선생님의 고독을 함께 짊어진 비장한 보디가드가 아니라, 그저 빳빳한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열네 살 중딩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야, 정서진! 너 왜 그렇게 넋이 나갔냐? 선생님 가셨으니까 우리도 가야지. 가방도 서오릉에 그대로 두고 왔잖아. 얼른 가서 찾아와야 해. 빨리 가자.”
반장 명호의 재촉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지금 그 소풍 가방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마음은 이미 찌그러진 알루미늄 도시락 통보다 더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반장, 너 먼저 가라. 난 좀 걷고 싶어.”
“야! 여기서 서오릉까지 30분은 더 걸려. 걸어간다고?”
반장의 외침을 뒤로하고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노을은 서오릉의 소나무 숲 뒤편으로 피를 흘리듯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왁자지껄하던 소풍의 흔적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으로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터벅터벅 보도 블록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붉은 노을을 등진 채 걸어오고 있었다.
다연이었다.
다연이는 한쪽 어깨에 자기 소풍 가방을, 다른 한쪽 어깨엔 내 소풍 가방을, 메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의 그 얄미웠던 표정 대신, 다연이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서진아, 너 가방 놓고 갔잖아. 소풍 끝날 때까지 안 와서 내가 가져왔어.”
다연이는 내 쪽으로 가방을 내밀었다.
“... 선생님은? 많이 다치셨어?”
“살짝 인대가 늘어나셨데. 남자 친구가 차를 가지고 와서 가셨어. 남자 친구 차 타고.”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연이는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자기 가방 속에서 도시락 하나를 건넸다.
“야, 너 오늘 점심도 못 먹었잖아. 엄마가 김밥을 많이 싸줘서 다 못 먹었어. 좀 남았는데 먹을래?"
나는 천천히 다연이가 내민 손을 보다가 알루미늄 도시락을 멍하니 받았들었다.
다연이는 쑥스러운지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내 손바닥에 닿은 도시락 통의 묵직한 무게감은 조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그 실체 없는 불안감을 단숨에 밀어냈다.
“야, 다연아. 그래서... 혹시... 그 녀석 만났어?”
“누구?”
“그러니까... 오늘 너한테 장미꽃 들고 프러포즈하겠다던 그 녀석 말이야. 기남이가 전교생이 다 안다고 난리 났던...”
다연이는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너까지 그 말을 믿고 있었던 거야? 아침부터 애들이 하도 물어봐서 귀찮아 죽는 줄 알았네. 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난 오늘 하루 종일 너희들이랑 같이 있었잖아. 보물찾기 할 때도, 벌떼 때문에 무서워서 숨었을 때도...”
그랬다. 그날 소풍에서는 서오릉의 노을이 산등성이에 걸릴 때까지,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장미꽃 백 송이를 든 충암 중학교의 야구부 주장도, 180cm의 엄친아도, 방송국 국장의 아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소나무 숲 어디에서도 뜨거운 고백의 함성은 들리지 않았고, 다연이는 그저 친구들과 깔깔 대며 흙먼지 묻은 운동화를 털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그 소문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기남이의 과한 상상력이었을까, 아니면 다연이를 짝사랑하던 어떤 녀석이 내뱉은 혼잣말이 와전된 걸까?
어쩌면 그 시절 우리들의 무료한 일상이 만들어낸 공동의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설레는 로맨스가 필요했고, 우리 같은 녀석들에게는 확인받고 싶은 질투의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길가에 핀 강아지풀을 툭툭 치며 걷던 나는, 가슴속에 뭉쳐있던 질문 하나를 기어코 꺼내 놓았다.
“다연야!”
“응?”
“만약에 말이야. 진짜로 그런 녀석이 나타났으면...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막 장미꽃 백 송이 들고 와서 사귀자고 하면... 너 사귈 거냐?”
내 목소리는 짐짓 무심한 척했지만, 끝부분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연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연이는 신고 있던 운동화 코끝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모르긴 왜 몰라? 그런 녀석이라면, 웬만하면 사귈 거 아냐?”
나는 괜히 다그치듯 물었다.
확답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부정의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다연이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노을빛을 머금은 다연이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깊어 보였다.
“진짜로 모르겠어. 사귀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그런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누구일지 나도 궁금하거든. 근데 서진아...”
다연이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오며 되물었다.
“너라면 어때? 진짜 예쁜 여학생이 너한테 사귀자고 하면... 넌 어떡할 건데?”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순간, 내 머릿속은 하얗게 지워졌다.
수정 선생님을 향한 나의 숭고한 짝사랑, 그리고 유덕화의 비장미 넘치는 로맨스.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 역시 내 앞에 서 있는 다연이의 운동화 끝에 시선이 머물 뿐이었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 나도 몰라.”
무책임하고 바보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당시 열네 살 소년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변이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가 내 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매일 아침 교실 문을 열 때 그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서운해지는 그 묘한 감정의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바보. 너도 모르면서 나한테는 왜 물어보냐?”
다연이가 피식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도 녀석의 보폭에 맞춰 발을 맞췄다.
초여름,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는 대답 속에 수만 가지 가능성을 숨긴 채 소년과 소녀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가 함께 걷는 길 위에는 이름 모를 소문보다 훨씬 선명한 서로의 그림자가 나란히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