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은밀한 특별 부록의 유혹

2차 성징의 사회학

by 한자루




1980년대 후반, 우리에게 ‘성(性)’이란 국가 기밀보다 엄격히 통제된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른들은 우리가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온한 데모처럼 여겼지만, 정작 우리 몸은 국가의 허락도 없이 매일 밤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장 근처 철제 선반 위에는 늘 육중한 금성(GoldStar) TV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었다.

평소에는 먼지 낀 덮개에 싸여 죽은 듯 침묵하던 그 기계가 깨어나는 날은 일 년에 몇 번 없었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올림픽 중계, 혹은 오늘처럼 특별 보건 교육 시간뿐이었다.

갓 부임한 보건 선생님은 하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검은색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교탁 위에 올려놓으셨다.

“자, 주목. 오늘은 시청각 자료를 통해 우리 몸의 변화를 알아볼 거예요.”

선생님이 긴 지휘봉을 뻗어 TV 덮개를 걷어내자, 뽀얀 먼지가 햇살 사이로 흩날렸다.

석두는 옆자리에서 “야, 진짜 틀려나 봐!”라며 마른침을 삼켰고, 나 역시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로 샤프 뒷부분을 딸깍거렸다.

선생님이 VTR 기계에 테이프를 밀어 넣자 ‘철컥’ 하는 기계음과 함께 TV 화면에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일었다. 곧이어 ‘인체의 신비’라는 투박한 자막과 함께, 어두운 방안을 비추는 브라운관의 푸르스름한 빛이 우리들의 상기된 얼굴 위로 쏟아졌다.

화면 속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경이로운 과정이 애니메이션으로 펼쳐졌지만, 우리 반 녀석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보건 선생님이 화면 옆에 서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갈 때마다 힐끔힐끔 보건 선생님의 하얀 가운 위로 봉긋 솟은 가슴 쪽을 훔쳐봤다.

“남학생들은 이 시기에 몽정이라는 걸 경험하게 돼요. 이건 마치 컵에 물이 가득 차면 넘치는 것과 같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선생님이 몽정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교실은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하게 얼어붙었다.

푸른 브라운관 빛에 반사된 보건 선생님의 하얀 가운은 평소보다 훨씬 눈부셨고, 그 단어는 어제 우리가 뒷골목에서 낄낄거리며 내뱉던 상스러운 욕설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짐짓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척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화면 옆에 선 선생님의 단정한 옆모습으로 미끄러졌다.


TV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교실. 눅눅한 땀 냄새와 80년대 특유의 비린내 나는 교실 먼지 속에서, 우리는 브라운관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에 취해 있었다.

성(性)이란 건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운동장을 뛰며 털어버릴 수 있는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밤마다 이불속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축축한 고독이었고, 보건 선생님의 하얀 가운을 보며 느끼는 정체 모를 경외심이었으며, 시청각 교육이 끝나고 TV 전원이 꺼진 뒤에도 한동안 가시지 않는 얼굴의 열기 같은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덮개가 씌워진 TV를 올려다보며, 우리는 시청각용 TV의 푸른빛 속에서,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애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물 수 없음을 선고받은 셈이었다.


시청각 교육이 남긴 여운은 생각보다 지독했다.

TV의 전원이 꺼지고 화면이 검은색으로 돌아갔지만, 내 망막에는 여전히 선생님의 하얀 가운과 ‘물이 차면 넘친다.’ 던 그 차분한 목소리가 잔상처럼 박혀 있었다.

교실 안의 공기가 너무 텁텁해서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마지막 수업 한 교시를 남기고 나는 배를 움켜쥐고 보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아까 TV 화면에서 봤던 푸르스름한 빛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보건실 문 앞의 보건실이라는 팻말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고 은밀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 선생님.”

보건실 안은 교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하얀 커튼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소리뿐이었다.

선생님은 책상 앞에 앉아 아까 사용했던 비디오테이프를 케이스에 넣고 있었다.

“어머, 서진이구나? 어디가 아파서 왔니?”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교실의 단상에서 내려다보던 시선과는 달랐다.

눈앞에서 마주한 선생님의 눈동자는 훨씬 더 깊고 투명했던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배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게... 아까부터 속이 좀 울렁거리는 것 같아서요. 체한 걸까요?”

선생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운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적막한 보건실에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선생님은 내 이마에 손을 살짝 얹었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그 손길에, 나는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열은 없는데... 아마 아까 수업 내용이 조금 충격적이었나 보네. 사춘기 때는 마음이 몸을 앞질러 가느라 가끔 이렇게 몸이 놀라기도 하거든.”

선생님은 약장으로 가서 작은 알약 두 알과 종이컵에 물을 담아 왔다.

“서진아, 아까 TV로 본 것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건 네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네가 아주 건강한 소년으로 자라고 있다는 신호니까.”

선생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 손길은 아까의 긴장감을 눈 녹듯 녹여주면서도, 동시에 내 마음속에 정체 모를 커다란 구멍을 하나 더 뚫어놓는 것 같았다.

나는 약을 삼키고 보건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성(性)이라는 건, 비디오테이프 속의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소독약 냄새처럼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무언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복도 끝에서 석두가 퉁퉁 부은 얼굴로 보건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 서오릉에서 수진이를 감싸 안다 얻은 영광의 상처들 때문이었다.

벌에 쏘여 탱탱하게 부어오른 녀석의 목덜미와 팔뚝은 시간이 갈수록 붉고 단단하게 부풀어 올라, 마치 가죽점퍼 안에 숨겨진 진짜 갑옷처럼 보였다.

“야, 정서진! 보건 선생님 계시지? 이 내 상처 좀 봐라. 보건 선생님도 보시고 놀라서 빨리 보건실로 오라고 하시더라? 이렇게 많이 쏘이고도 어떻게 참았냐고. 이게 바로 사나이의 의리라는 거다, 인마.”

석두는 아픈 줄도 모르는지 부풀어 오른 팔뚝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평소 같으면 “그래, 너 잘났다.”며 대꾸했겠지만, 방금 전 보건실 안에서 선생님과 나누었던 그 밀도 높은 대화를 품고 나온 나로서는 녀석의 호들갑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래, 대단하다 마석두. 얼른 가서 약 바르고 수진이한테 자랑이라도 해라.”

내가 녀석을 밀치고 교실로 향하려던 찰나, 복도 반대편에서 다연이가 나타났다.

복도 끝에서 다연이가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연이는 복도 창가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는 평소라면 “안녕? 다연아!” 하고 먼저 아는 체를 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 서진이구나, 너 보건실 갔다 와? 석두 너는 얼굴이 그게 뭐야? 아직도 많이 부었네.”

다연이가 걱정스러운 듯 다가오며 내 얼굴과 석두의 부은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그때였다. 다연이의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마치 전과를 저지르고 검문소 앞에 선 범죄자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 전 보건실 안에서 선생님의 손길이 내 이마에 닿았을 때 느꼈던 그 전율, 그리고 아까 시청각 TV를 보며 나 혼자 품었던 그 은밀한 상상들이 죄다 들통날 것만 같았다.

수정 선생님을 향한 마음이 성당 같은 숭고함이었다면, 보건실에서 느낀 이 낯선 감각은 다연이에게 차마 고백할 수 없는 비겁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서진아, 어디 많이 아파?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아냐! 그냥 약을 좀 먹었더니 졸려서 그래. 나 먼저 들어간다!”

나는 다연이의 질문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교실로 뒤도 안돌아보고 뛰었다.


1988년의 복도, 하얀 소독약 냄새와 다연이가 늘 풍기던 비누 향기가 뒤섞인 그 공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비밀을 가진 소년이 되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소꿉친구에게 거짓말을 시작했다는 아픈 신호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 청소를 할 때 석두는 주위를 살피더니 나를 교실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녀석의 눈빛이 아까와는 다르게 번뜩였다.

석두는 주위를 살피더니 내 귓가에 입을 바짝 들이댔다. 녀석의 숨결에서 눅눅한 땀 냄새와 칼라민 로션 향이 섞여 났다.

“야.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진짜를 보러 가자. 만화로 만든 정자, 난자 놀이 말고, 진짜 어른들의 세계 말이야.”

“진짜 어른들의 세계?”

석두가 교복 주머니 안감 깊숙한 곳에서 낡은 지도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동네 형들에게 수소문해 알아낸, 청계천 5가 헌책방 골목의 보물지도였다.

"서진아. 청계천 5가 헌책방 골목에 가면 사진예술 과월호랑 선데이 서울 별책부록이 산처럼 쌓여 있대. 거기에 진짜 어른들의 세계가 있다는 거지. 내일 토요일이잖아. 수업 끝나고 바로 720번 타는 거다.”

석두의 눈빛은 비장했다.

어제 수진이를 구하려 벌떼에 뛰어들 때보다 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우리에게 성(性)은 보건실의 하얀 가운보다 헌책방의 누런 종이 냄새에 더 가까웠다.

보건 수업이 불을 지폈다면, 석두의 제안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수정 선생님의 고결함과 다연이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 이성은, 예술이라는 단어 앞에서 비겁하게 무너져 내렸다.

"예술... 그래, 사진 예술은 예술일 뿐이잖아? 공부에도 도움이 될 거야. 구도나 빛의 조절 같은 거."

내 비겁한 변명에 석두가 씩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임마! 우린 지금 불온서적을 찾는 게 아니라, 미(美)를 탐구하러 가는 거다. 기남이한테는 비밀로 해. 그 자식은 입이 가벼워서 안 돼."

나는 짐짓 진지한 눈빛으로 생각했다.

그래, 청계천의 그 어두운 책방 구석에서 이 혼란스러운 열병의 정체를 반드시 확인하고 말겠노라고.


그렇게 우리 중생들의 가련한 모험이 시작되었다.

부모님께는 '참고서를 사러 간다.'는 전형적인 거짓말을 내뱉고, 주머니에는 한수정 선생님의 남자 친구가 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를 찔러 넣은 채 우리는 금기된 낙원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88 올림픽 홍보 깃발들이 우리를 응원하는 것 같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다연이의 맑은 눈망울이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과연 우리는 그 헌책방의 어두운 구석에서 우리가 찾던 진리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굴욕의 역사만 쓰게 될까?


약간은 긴장한 눈 빛으로 창밖만 바라보던 나에게 석두가 말을 꺼냈다.

“잘 들어, 김서진. 청계천은 만만한 곳이 아냐. 거긴 우리 같은 중딩들이 전과나 사러 가는 광화문 교보문고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석두는 가래 끓는 목소리로 낮게 깔며 매뉴얼의 첫 번째 수칙을 읊었다.

"첫째, 기싸움에서 밀리지 마라! 책방 주인아저씨가 ‘뭐 찾니?’라고 물을 때, 절대 당황해서 ‘그... 거시기요’라고 하면 안 돼. 그럼 바로 쫓겨나. 무조건 미대 입시 준비하는 학생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어. 그리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사진예술 과월호, 인체 해부학적 구도가 강조된 걸로 좀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인체 해부학’... 이게 포인트다. 알겠냐?”

석두는 어디서 들었는지 수칙이 접힌 수첩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둘째, 시선은 45도 아래로, 손은 갈고리처럼! 책 더미를 뒤질 때는 눈을 부라리지 마. 주인 눈엔 우리가 뭘 찾는지 다 보이거든. 짐짓 지루하다는 듯이 전과나 소설책을 뒤적이다가, 45도 아래쪽 구석에 검은 비닐로 덮인 곳을 공략해야 돼. 그때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빠르게! ‘선데이 서울’이나 ‘주간경향’ 특보판이 잡히면 빛의 속도로 다른 책 사이에 끼워 넣는 거다.”

석두의 수칙 읽기는 성서를 읽는 신부처럼 위엄을 풍기며 멈추지 않았다.

"셋 번째, 샌드위치 기법!"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석두의 눈이 번뜩였다.

“우리 같은 미성년자가 그걸 맨몸으로 들고 나오는 건 자살행위야. 그래서 샌드위치가 필요해. 겉표지가 아주 건전한 책, 이를테면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 종합영어’ 헌 책을 하나 골라. 그리고 계산하기 직전에 그 두꺼운 책 사이에 우리가 찾은 보물을 끼워 넣는 거지. 아저씨가 가격 물으면 ‘정석이랑 영어책 합쳐서 얼마예요?’라고 묻는 거야. 그럼 아저씨도 귀찮아서 대충 훑고 넘어가거든.”

석두는 긴장한 듯 숨을 길게 내쉬고 마지막 수칙을 읽어나갔다.

"마지막, 퇴로 확보와 은폐! 계산 끝나자마자 바로 뛰어나가지 마. 그럼 의심받아. 아주 느긋하게 책방을 한 바퀴 돌다가 나오는 거야. 그리고 가방 깊숙이 넣은 뒤엔 절대로 버스 안에서 꺼내 보지 마라. 720번 버스엔 우리 학교 애들이나 선생님이 탈지 모르니까.”

석두의 매뉴얼은 치밀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면서도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졌다.

보건 선생님이 말했던 자연스러운 과정이 왜 이렇게 범죄 작전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야, 석두야. 근데 아저씨가 신분증 까보라고 하면 어떡하냐?” 나의 소심한 질문에 석두는 코웃음을 쳤다. “야, 인마. 내가 아는 형님이 그랬어. 돈 앞엔 장사 없다고. 우리가 만 원짜리 한 장 딱 보여주면, 아저씨들은 우리가 중학생인지 대학생인지 관심도 없어. 다만 우리 표정이 졸아 있으면 검문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어깨 딱 펴고 이 형님만 믿어, 임마!”


버스가 종로 5가에 들어서자 멀리 평화시장의 낡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연 냄새가 섞인 청계천의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이쳤다. 나는 가방끈을 꽉 쥐었다.

석두의 매뉴얼대로라면 우린 오늘 어른의 세계를 정복할 영웅들이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선 여전히 ‘다연이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라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청계천 5가,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좁은 헌책방 골목에 들어서자 눅눅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석두는 가죽점퍼의 깃을 한 번 더 추스르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정서진. 쫄지말고. 내 뒤만 잘 따라와.”

우리는 고성서점이라는 빛바랜 간판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입구부터 천장까지 쌓인 누런 전과와 소설책들이 마치 우리를 감시하는 병사들처럼 서 있었다.

책방 깊숙한 곳,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신문을 읽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굵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애들은 가라. 전과랑 정석은 저 앞 골목이 싸다.”

첫마디부터 매뉴얼에는 없던 거절이었다.

나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석두는 역시 석두였다.

녀석은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발을 내디디며 연습했던 낮은 목소리를 꺼냈다.

“아저씨, 저희 참고서 사러 온 거 아닙니다. 그... 사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 예술 서적 좀 보러 왔는데요.”

아저씨가 신문을 내리고 우리를 훑어보았다. 돋보기너머의 눈빛이 예리했다.

“예술? 사진? 중딩 놈들이 무슨 사진이야.”

“아, 저... ‘인체 해부학적 구도’가 강조된 사진예술 과월호를 찾고 있습니다. 빛의 명암이나 근육의 움직임 같은 걸 연구해야 해서요.”

석두의 입에서 인체 해부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옆에 서 있던 나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녀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치 고뇌하는 예술가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아저씨는 잠시 침묵했다.

중학생의 입에서 나온 해부학이라는 단어가 기가 찼는지, 아니면 석두의 가죽점퍼와 부은 얼굴이 만드는 기묘한 분위기에 압도됐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는 혀를 한 번 쯧 차더니 턱짓으로 책방 가장 깊숙한, 검은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구석 선반을 가리켰다.

“예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기 구석 아래 칸 뒤져봐라. 과월호들 쌓여 있으니까. 대신, 밖으로 꺼내서 보지 마라. 딴 손님들 눈에 띄면 바로 쫓아낼 줄 알아.”

“... 감사합니다.”

석두가 내 팔을 꽉 잡았다. 녀석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매뉴얼 1번이 먹힌 것이다.

우리는 아저씨의 시선이 다시 신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전리품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구석,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잡지 더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학교나 집에서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던, 금기된 어른들의 세계가 날카로운 긴장감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장 아래쪽에 깔린 낡은 잡지 한 권의 모서리를 잡았다.


아저씨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책방 구석, 낮은 선반 앞으로 몸을 숙였다.

바닥에선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고,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석두는 매뉴얼 2번대로 짐짓 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위에 놓인 월간 낚시자동차 생활 같은 잡지들을 건성으로 들춰냈다.

“야, 정서진. 밑에다. 밑에.”

석두의 낮은 속삭임에 나는 가장 아래쪽, 검은 비닐이 덧대어진 뭉치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손 끝에 닿는 종이 질감이 유독 눅눅했다.

조심스럽게 비닐을 걷어내자,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맨 원색의 표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의 청계천은 단순한 헌책방 거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지옥과 천국이 조잡한 종이 냄새를 풍기며 공존하는 거대한 미로였다.

석두와 내가 그 미로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보건 선생님의 하얀 가운만큼이나 눈부시고도 위험한 네 개의 금기였다.

먼저 나타난 것은 이른바 빨간 책들이었다. '요정', '장미', '애인' 같은 촌스러운 제목들이었지만, 그 조잡한 인쇄물 뒤편에 실린 성인 소설과 펜화들은 14살 소년의 상상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그 누런 종이들은 마치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그때 석두가 옆구리를 꾹 찌르며 낮게 소리쳤다.

"야, 정서진. 이거 봐라. 일본 잡지다!"

석두가 호들갑을 떨며 꺼낸 것은 일본의 '헤어 누드' 밀수본이었다.

당시 일본 문화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부산항을 타고 넘어온 그 잡지들은 청계천의 어둠 속에서 핵무기 같은 권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국산과는 차원이 다른 선명한 종이 질과, 보건 선생님의 차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적나라한 사진들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그 옆에는 미군 부대 근처에서 흘러나온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과월호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영어 문장은 한 줄도 읽지 못했지만, 화보의 스케일만큼은 압도적이었다.

석두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야, 미제는 역시 다르구먼.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맛이네. 죽여주지 않냐?"

마지막으로 내 손에 잡힌 것은 교과서 밑에 숨기기 딱 좋은 크기의 포켓 가요였다.

겉표지엔 최신 가요 가사집이라 적혀 있었지만, 중간을 펼치자 뜬금없는 선정적인 만화와 사진들이 툭 튀어나왔다.

수업 시간, 선생님의 눈을 피해 교실 안에서 가장 은밀하게 유통되던 그 야만화의 실체를 마주한 순간, 나는 내 가방 속의 성문 종합영어가 이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말을 잃었다.

보건 선생님의 TV 화면에서 보던 해부학적 선과는 다른, 당시 어른들의 서글픈 욕망과 원색적인 호기심이 박제된 종이 뭉치들.

석두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중 가장 두툼한 녀석 하나를 골라잡았다.

“매뉴얼 3번이다. 빨리 건전한 놈으로 찾아.”

나는 서둘러 옆 칸에 꽂혀 있던 낡은 성문 종합영어 한 권을 꺼냈다.

당시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가방에 넣고 다녀야만 했던, 그 딱딱하고 권위적인 책.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두꺼운 영어 참고서의 중간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석두가 건넨 잡지를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른바 샌드위치 작전이었다.

성문 종합영어라는 겉껍질은 우리를 지켜줄 유일한 방패이자 위장막이었다.

잡지가 삐져나오지 않게 정렬하는 내내 손등에 땀이 맺혔다.

책의 두께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낡은 참고서라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아저씨, 이거 두 개 살게요. 영어책은 공부하려고요.”

석두가 계산대로 걸어가며 짐짓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주인아저씨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손으로 책의 모서리만 대충 훑었다.

“종합영어랑 사진 잡지냐? 사진 잡지는 부록 빠진 거라 싸게 줄게. 삼천 원만 내라.”

아저씨의 무심한 대꾸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아저씨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이 가련한 중생들의 수작을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걸까.

석두가 꼬깃꼬깃한 돈을 내미는 순간, 내 시선은 아저씨의 손가락 끝에 고정되었다.

혹시라도 아저씨가 책장을 넘겨보지 않을까, 그 샌드위치 속살이 들통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예리하게 심장을 찔러댔다.

다행히 아저씨는 책을 검은 비닐봉지에 거칠게 담아 건네주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예술도 적당히 하고.”

아저씨의 묘한 끝인사를 뒤로하고 책방을 나섰을 때, 청계천의 매연 섞인 공기가 유독 시원하게 느껴졌다.

가방 안에서 묵직하게 자리를 잡은 성문 종합영어의 무게는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720번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제 승리의 축배를 들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우리 동네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어이, 이 정서진. 그리고 너 마석두 아니냐? 니들 어디 갔다 오냐?”

골목 어귀 전봇대 옆, 신발 끝으로 바닥의 돌멩이를 툭툭 차고 있던 영진이 형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형은 석두와 동갑이지만, 석두와 달리 이미 중학교 3학년의 노련함을 장착한 존재였다.

석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방을 뒤로 숨겼다.

“아, 영진아... 그게... 마음 잡고 공부 좀 하려고 책 좀 샀지.”

“공부? 네가?”

영진이 형이 비스듬히 다가와 석두의 가방을 툭 쳤다.

평소엔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이렇게 ‘선배’ 노릇을 할 때면 석두의 얼굴은 벌에 쏘였을 때보다 더 붉게 달아오르곤 했다.

영진이 형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가방까지 훑어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이거... 헌책방 냄새인데? 야, 너희 참고서 사이에 뭐 끼워왔지? 샌드위치 작전? 중딩 놈들이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석두와 나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영진이 형은 압수할 기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형의 눈빛은 금지된 보물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번뜩였다.

“오호... 사진예술 아니야? 야, 이거 구하기 힘든 건데. 아저씨가 웬일로 이걸 너희한테 줬대? 이거 구도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영진이 형은 마치 자기가 사진작가라도 되는 양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석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고쳐 멨다.

“영진아, 이거 진짜 예술 공부하려고 산 거야. 인체... 뭐 그런 거.”

석두가 쥐어짜듯 내뱉은 변명은 애처로웠다.

하지만 영진이 형은 그 비겁한 퇴로를 차단하는 대신, 오히려 그 길 위에 레드카펫을 깔아주었다

“해부학적 구도 말이지? 인마, 그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야, 이리 와봐. 저기 세탁소 옆 평상 비어있더라. 이 형님이 특별히 검수해 줄게. 너희 같은 애들은 이런 거 잘못 보면 눈만 버려. 형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페이지만 골라줄 테니까.”

결국 상황은 기묘하게 흘러갔다.

은밀한 비밀을 들킨 도망자들이 형사에게 취조를 당하던 긴박한 현장이, 순식간에 골목길 감상회의 서막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홀린 듯 영진이 형을 따라 평상으로 향했다.

성문 종합영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진 청계천의 네 가지 금기들이, 드디어 은평구의 노을 진 골목길 아래에서 그 조잡한 속살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치환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초도 되지 않았다.

영진이 형은 마치 전장에 투입되는 베테랑 지휘관처럼 비장하게 가방 지퍼를 열었다.

우리 셋은 평상 위에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았다.

그 모습은 흡사 국보급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들 같았지만, 사실 우리는 그저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엉덩이를 들썩이는 가련한 중생들에 불과했다.

평상의 나무 판재는 낮 동안 머금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열기는 잡지를 꺼내는 석두의 손끝으로 고스란히 옮겨갔다.

영진이 형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마치 대단한 선언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형이 '예술'과 '외설'의 한 끗 차이를 보여주마. 눈 크게 뜨고 봐라."

영진이 형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마치 대단한 비법서라도 펼치듯 경건한 손길로 그 첫 장을 넘겼다.

조잡한 갱지 위로 잉크 냄새가 훅 끼쳐왔다.

“자, 봐라. 이게 바로 빛의 대비라는 거다. 알겠냐? 이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인체의 곡선, 이건 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조각이야.”

사실 사진의 ‘ㅅ’자도 모르는 영진이 형이었지만, 14살 동생 앞에서 인생의 선배 노릇을 하는 그 짜릿한 쾌감을 놓칠 리 없었다.

형의 손가락이 화보 속 모델의 어깨선을 따라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우리들의 시선도 자석에 이끌리듯 그 궤적을 쫓았다.


1988년의 토요일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은평구의 좁은 골목길 평상 위에는 기묘한 풍경이 완성되어 있었다. 수정 선생님을 향한 숭고한 동경이나 다연이의 맑은 눈망울은 어느새 노을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그곳엔 오로지 미지의 세계를 처음 마주한 중생들의 뜨거운 호흡과, 그 호흡을 예술이라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포장하려는 영진이 형의 허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우리는 그 조잡한 인쇄물 속에서 무언가 대단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한 척 숨을 죽였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예술의 정수가 아니라, 금지된 선을 넘었다는 짜릿한 해방감이었다.

영진이 형의 엉터리 강의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우리가 조금 더 어른에 가까워졌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그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강아지들처럼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고 있었다.


평상 위의 공기는 영진이 형의 근거 없는 해설로 이미 뜨겁게 달궈져 가고 있었다.

“자, 이 선을 봐. 이게 바로 미켈란젤로가 말한 곡선의 미학이라는 거다. 너희 중딩들은 이게 그냥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엔 이게 하나의 건축물로...”

영진이 형의 허세가 절정에 달해 건축물의 기초 공사를 설명하려던 찰나, 골목 저편에서 불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우리 반의 인간 안테나, 정보국장 기남이었다.

녀석은 멀리서부터 특유의 킁킁거리는 콧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야! 너희 여기서 뭐 하냐? 석두 너랑 서진이, 어? 영진이 형도 있었네? 아까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는 거 다 봤어! 근데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는 거야? 같이 보자!”

기남이는 눈치를 챌 틈도 없이 평상 위로 몸을 날렸다.

영진이 형이 급하게 잡지를 덮으려 했지만, 기남이의 매의 눈은 이미 성문 종합영어의 벌어진 틈새를 포착한 뒤였다.

“허! 야! 이거... 이거 사진예술 아냐? 너희끼리만 예술하기냐? 영진이 형, 혼자만 보지 말고 같이 좀 봐요!”

결국, 평상은 비좁아졌다.

석두와 나, 영진이 형, 그리고 기남이까지 네 명의 중생이 머리를 맞대고 성문 종합영어라는 성경책 속에 숨겨진 금단의 복음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기남이는 옆에서 “우와, 이 누나 코가 진짜 높다!” 같은 천박한 감탄사를 내뱉어 영진이 형의 고결한(?) 강의 흐름을 자꾸 끊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서진아? 석두야? 너희들 여기서 뭐 해? 기남이도 있구나? 영진이 오빠 안녕?”

그것은 구원의 목소리이자, 동시에 사형 집행관의 목소리였다.

골목 모퉁이에서 하얀 비닐봉지에 두부 한 모를 소중히 들고 나타난 건, 다연이었다.

순간, 평상 위는 정지 화면이 되었다.

영진이 형은 본능적으로 잡지를 등 뒤로 숨겼고, 석두는 갑자기 손바닥으로 평상을 닦기 시작했으며, 기남이는 먼 산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들 불룩해진 아랫도리 때문에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평상을 사수하며, 사춘기라는 거대한 태풍 앞에 노출된 소년들의 비참한 방어 기제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나는 그저 내 가방 지퍼가 열려 있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굳어버렸다.

“어... 어, 다연이구나. 엄마 심부름으로 가는 길이구나?”

내 목소리는 변성기 소년의 비명처럼 갈라졌다.

다연이는 천천히 다가와 우리 네 명의 수상쩍은 대형을 살피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 아까부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영진이 오빠는 왜 여기 있고? 석두야, 너 아직 집에 안 갔어?”

다연이의 시선이 영진이 형의 등 뒤로 삐져나온 성문 종합영어의 두툼한 옆구리에 머물렀다.

14살 소녀의 직관은 때로 국가안전기획부보다 예리했다.

“그 책... 성문 종합영어네? 근데 왜 그렇게 두꺼워?”

“아, 이거! 이건 말이지, 다연아. ‘성문 종합영어 특별 한정판’이라 그래. 부록이 아주 많이 들어있거든.”

석두의 말도 안 되는 임기응변에 영진이 형이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맞아, 다연아. 이게 요새 강남 애들이 보는 입체 영어라는 건데, 오빠가 지금 애들 독해 좀 봐주고 있었어. 너는 몰라도 돼.”

다연이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우리를 한 명씩 훑었다.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차라리 지구가 멸망해서 청계천 헌책방 거리가 통째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연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손에 든 두부 봉지를 고쳐 쥐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서진아. 너 어제 보건실에서 체했다고 했잖아. 지금은 좀 괜찮아? 아직 얼굴이 좀 빨간데... 약 먹었으면 집에 가서 일찍 자. 이런 데서... 부록 같은 거 보지 말고.”

다연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다연이의 뒷모습에서 묘한 실망감이 뚝뚝 묻어나는 것 같아 아릿해졌다.

다연이가 사라지자마자, 영진이 형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잡지를 평상 위에 내동댕이쳤다.

“야, 다연이 쟤... 다 눈치챈 거 아냐? 눈빛이 장난 아닌데?”

기남이는 그 와중에 다시 잡지를 펼치려 했지만, 나는 녀석의 손을 뿌리치고 잡지를 낚아채 가방 깊숙이 쑤셔 넣었다.

토요일 저녁, 노을은 지독하게 붉었고, 나의 위대한 예술 탐구는 다연이의 두부 한 모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날 밤, 나의 방은 청계천에서 풍겨오던 그 눅눅한 종이 냄새와 다연이가 남기고 간 서늘한 두부의 향기가 기묘하게 뒤섞인 전쟁터였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굳게 닫힌 방문을 한 번, 그리고 가방 깊숙이 처박힌 성문 종합영어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평소엔 쳐다보기도 싫던 성문 종합영어가 오늘따라 왜 이리 음란한 유혹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마침내 가방 지퍼를 열고, 마치 국가 기밀문서를 꺼내듯 조심스럽게 그 특별 부록을 책상 위에 올렸다.

평상 위에서 영진이 형이 예술이라 설파하던 흑백의 화보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아까의 그 뜨겁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브라운관 조명 아래서 보던 보건 선생님의 하얀 가운도, 영진이 형의 침 튀기는 해설도, 형광등 불빛 아래선 그저 잉크 냄새나는 종이 조각일 뿐이었다.

오히려 자꾸만 화보 위로 다연이의 그 맑은 눈망울이 겹쳐 보였다.

'서진아, 약 먹었으면 집에 가서 일찍 자.' 다연이의 그 말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지키려던 소년의 순수함이 툭 부러져 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잡지를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14살의 우리는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지만, 정작 어른의 세계로 통하는 그 낡은 잡지 한 권을 감당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몽정과 변성기라는 몸의 반란에 떠밀려 낯선 정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미꽃 백 송이나 180cm의 키가 아니라, 눈 부시게 맑은 날 함께 자전거를 타던 소꿉친구의 변함없는 눈빛 같은 것이었다.

"서진아, 안 자니? 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은데 불 끄고 자라."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화들짝 놀라 잡지를 이불 밑으로 쑤셔 넣었다.

"네, 엄마! 이제 자요!" 나는 황급히 전등 스위치를 껐다.


우리는 매일 밤 몽정이라는 이름의 반란을 겪으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사실 우리는 아직 자기 가방 속에 든 낡은 잡지 한 권의 무게조차 이기지 못하는 겁쟁이들이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눅눅한 종이 냄새 사이로 다연이가 건넸던 따뜻한 걱정의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보건 선생님의 하얀 가운이 경외의 대상이었다면, 다연이의 그 서늘한 눈매는 내가 돌아가야 할 정직한 거울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성인 잡지를 이불 밑에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쳐보는 짜릿함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한 뼘 더 자라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일 아침, 이 무거운 특별 부록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1988년의 밤은 그렇게 지독하게 깊고도 푸르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