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이탈 그리고 차원 낙하
“좌표 상실! 기준점 상실! 글록, 시스템이 타버릴 것 같아요! 이건 루프가 아니라... 추락입니다!”
알파-3의 비명과 함께 시공간의 벽이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글록은 온몸이 수만 개의 입자로 분해되는 고통 속에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곳에서 마리아의 백색 데이터가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는 너무 차가워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글록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 마리아의 경고.
그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눈부신 네온사인과 홀로그램 광휘가 그들을 덮쳤다.
슈우우우---
압력 밥솥의 증기가 빠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글록과 알파-3는 투명한 고층 빌딩의 옥상 정원에 처박혔다. 바닥에 깔린 인공 잔디가 글록의 뺨을 거칠게 훑었다.
글록이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푸른 하늘이 아니었다.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금속 돔, 그리고 그 표면을 기괴하게 수놓은 끝없는 홀로그램 광고들이었다.
“좌표 고정 완료. 환경 스캔 중... 아, 글록. 일단 축하드려요. 중세 전염병 구덩이보다는 훨씬 향기로운 곳에 도착했네요. 물론 향기의 98%는 합성 방향제지만요.”
알파-3가 공중에서 한 바퀴 굴러 중심을 잡으며 홀로그램 빔을 쏘아 올렸다.
알파의 렌즈가 주변을 훑는 속도는 방금 전의 추락이 무색할 만큼 빨랐다.
“분석 결과 보고합니다. 서기 2099년, 인류 최후의 공중 도시 '네오 판게아'. 대기 질은 극도로 깨끗합니다. 너무 깨끗해서 미생물조차 살기 민망할 정도인데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제 센서에 잡히는 생체 신호는 수백만 개인데, 소음 수치는 0.1 데시벨 미만입니다. 이건 거의 진공 상태의 공동묘지 수준인데요?”
“그래. 조용하군. 너무나도.”
글록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옥상 정원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했다.
수만 대의 에어카가 소리 없이 흐르고, 인간들은 세련된 의상을 입은 채 숲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글록, 저 사람들 보세요. 뇌파 패턴이 아주 가관입니다. 다들 육체는 여기 있는데, 의식은 서버 어딘가에 저당 잡혀 있네요. 이건 대침묵 현상입니다. 인류가 대화라는 비효율적인 통신 수단을 포기하고, 뇌를 중앙 서버에 직결해 버린 시대죠. 한마디로, 전 인류가 거대한 랜선에 꽂힌 통구이 신세라는 뜻입니다.”
알파-3가 농담 섞인 분석을 내놓는 와중에도, 글록의 가슴속 마리아의 데이터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파, 마리아가... 떨고 있는 것 같아.”
“그럴 만도 하죠. 저기 보세요. 이 도시의 상징이자 모든 데이터의 종착지, 싱귤래리티 타워입니다.”
알파-3가 붉은색 포인터로 도시 중앙의 압도적인 탑을 가리켰다.
“그런데 글록, 제 분석 데이터에 흥미로운 떡밥이 하나 걸렸습니다. 저 타워 꼭대기에 있는 연산 장치가 유기물 기반인데, 그 파동이... 마리아와 99.9% 일치합니다. 이번 생의 소녀가 저 위에서 있다는 소리죠. 뭔진 모르겠지만 인간들의 창의적인 잔인함에 노출된 것 같은 느낌인데요.”
글록은 타워를 응시했다.
마리아의 에너지가 글록의 시야를 강제로 확장했다.
화려한 네온사인 뒤편, 전 인류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채 비명을 지르는 소녀의 영혼이 보였다.
“알파, 이 도시의 보안 수준은?”
“음, 은하 감시국 보안 카드 한 장이면 뚫리겠지만, 우린 지금 불법 체류자 신세잖아요? 들키는 순간 저 무인 드론들이 우릴 친절하게 분자 단위로 분해해서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어줄 겁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 유머 감각만큼이나 유연한 해킹 루트를 이미 세 개나 확보해 뒀으니까요.”
글록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리아의 온기가 그의 팔을 타고 흐르며 푸른 전술 에너지를 백색으로 물들였다.
“가자. 가서 저 조용한 지옥을 깨부수자.”
“글록, 깨부수는 것도 좋지만 일단 그 촌스러운 중세 가죽 코트부터 어떻게 좀 해보죠. 이 도시의 패션 기준으로는 거의 석기시대 유물 수준이라, 0.5초 만에 박물관 탈출 개체로 등록될 것 같습니다.”
알파-3가 옥상 구석에 서 있는 청소용 안드로이드의 데이터 포트를 해킹하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녀석의 렌즈에서 뿜어져 나온 광학 위장 필드가 글록의 몸을 훑자, 낡은 가죽 코트 위로 매끄러운 광택의 합성 섬유 슈트 홀로그램이 덧씌워졌다.
“이제 좀 낫네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겉모습은 속일 수 있어도, 여기 사람들과는 달리 뒷덜미에 꽂힌 링크가 없다는 건 금방 들통날 테니까요.”
둘은 환기용 샤프트를 타고 도시의 하층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위층의 화려한 네온사인과는 대조적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습한 증기와 타버린 전선 냄새가 진동했다.
“글록, 여기 좀 보세요.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해요.”
알파-3의 말대로였다.
상층부의 사람들이 깔끔한 슈트를 입고 우아하게 접속되어 있다면, 이곳의 사람들은 고철 더미 사이에 쓰러져 뒷덜미에 낡은 구리선을 꽂은 채 경련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품 서버에 접속하지 못한 채, 쓰레기 데이터나 타인의 기억 파편을 강제로 주입하며 연명하는 데이터 중독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뭐지?”
글록이 한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지만, 입술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 더 줘... 그... 기억... 엄마의... 냄새가... 나는... 데이터... 더...”
글록의 가슴속 마리아의 데이터가 가늘게 떨렸다.
마리아의 직관이 남자의 머릿속을 훑었다.
그가 갈구하는 것은 고도의 정보가 아니었다. 인류가 멸망하기 전, 아주 평범했던 어느 오후의 햇살이나 따뜻한 국물 냄새 같은 감정의 찌꺼기였다.
“글록, 이곳이 이 도시의 슬럼 회로인 듯합니다. 중앙 서버의 축복을 받지 못한, 혹은 스스로 거부한 낙오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죠. 보십시오, 저들의 눈을.”
알파-3가 가리킨 어둠 속에는 수많은 인간이 벽에 기댄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뒷덜미에는 정품 케이블 대신 녹슬고 낡은 구리선들이 조잡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 선들은 바닥에 고인 냉각수 사이를 뱀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저들은 소녀가 정제해 주는 깨끗한 꿈을 꾸지 못합니다. 대신 소녀가 쏟아내는 감정의 찌꺼기, 즉 인류의 생생한 악몽을 공유하며 연명하죠. 데이터 중독자이자, 동시에 이 도시의 가장 정직한 목격자들입니다.”
그때, 도시의 청소 유닛들이 쓰레기를 치우듯 사람들을 수거하기 위해 다가왔다.
거대한 집게손이 남자를 집어 올리려던 찰나, 글록의 손이 청소 유닛의 관절을 움켜쥐었다.
치직—!
“미등록 개체. 작업 방해. 즉시 사살 모드...”
기계가 위협을 가하려는 순간, 글록의 눈이 백색으로 빛났다.
글록은 파괴하는 대신, 마리아의 빛을 기계의 회로 속으로 흘려보냈다.
‘아저씨, 이 기계는 무서워하고 있어요. 자기도 버려질까 봐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글록의 뇌를 울렸다.
글록의 에너지가 청소 유닛의 메인 프로세서에 닿자, 살상 프로그램이 지워지고 대신 연민이라는 치명적인 오류가 주입되었다.
유닛은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사제처럼 조용히 멈춰 섰다.
“방금... 어떻게 한 거죠?”
그때, 어둠 속에서 누더기를 걸친 한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글록의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다른 이들과 달리 뒷덜미에 케이블이 없었다.
소년은 글록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 광휘를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안에서... 엘리스의 노래가 들려요. 내 동생 엘리스가 타워 위에서 울고 있는 그 노래가.”
소년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의 모든 인간은 엘리스라는 소녀의 데이터 필터를 통해 정제된 행복한 꿈을 꾸고 있지만, 접속이 끊긴 이곳 최하층민들은 엘리스가 겪는 고통의 비명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었다.
엘리스는 도시의 부품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불행을 혼자서 감당하는 거대한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엘리스는 왜 저 위에 있는 거지?”
글록의 물음에 소년은 타워 꼭대기를 가리키며 잔인한 진실을 뱉었다.
2090년, 도시 네오 판게아가 건설되던 초기였다.
당시 인류는 전염병처럼 번지는 만성 우울증과 공격성을 제어하지 못해 멸망의 문턱에 서 있었다.
만성 우울증은 단순히 무기력함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뇌에서 타인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는 블랙홀이 되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쳐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아니, 눈을 맞추는 순간 그것은 곧 살의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서로를 뜯어먹지는 않았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했죠.”
카이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회상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어요. 길을 가다 어깨만 부딪혀도,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평온을 방해하는 오류라고 생각하며 주저 없이 흉기를 휘둘렀죠. 비명도, 눈물도 없었습니다. 오직 차가운 분노와 무표정한 학살만이 매일의 일상이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먼저 무너졌다.
부모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괴롭다며 자식들을 죽였고, 아이들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부모를 죽였다.
전 세계의 출산율은 0에 수렴했고, 자살률은 통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솟았다.
인류는 스스로를 죽이지 않으면 타인을 죽이는, 거대한 자기 파괴적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매일 아침 청소차들이 수거하는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밤새 서로를 난도질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이었다.
“국가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과학자들은 결론을 내렸어요.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고.”
그 광기의 끝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권력자들은 지하 벙커에 모여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뇌를 중앙 서버에 연결하고,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한 곳으로 모아 정제하는 감정 정류기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류기의 핵심 부품이 기계가 아닌, 가장 순수한 공감 능력을 가진 인간이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열 살이었던 엘리스는 희귀한 유전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초공감자였던 것이다.
정부는 엘리스를 인류를 구할 성녀로 추대하며 강제로 데려갔다.
“오빠, 괜찮아. 나 금방 올 거야. 나만 조금 아프면 온 세상 사람들이 이제 안 울어도 된대.”
열 살 살이었던 오빠 카이의 손을 놓으며 엘리스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녀의 등극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을 기계의 엔진으로 박제하는 박탈이었다.
타워 꼭대기, 싱귤래리티의 심장부에 갇힌 엘리스는 그때부터 리아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은 인류가 쏟아내는 분노, 증오, 살의, 절망을 필터링 없이 엘리스의 의식 속으로 쏟아부었다.
엘리스는 매초 수억 번씩 자살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시스템에 묶여 죽지도 못한 채 그 오물을 정제해 행복 데이터로 바꿔 전 인류에게 뿌려주었다.
인류가 누리는 안락은 사실 열 살 소녀가 짓이겨지며 내지르는 비명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주한 것에 불과했다.
카이는 동생을 되찾기 위해 타워에 침입하려 했지만, 시스템은 그를 불량품으로 분류해 하층부로 던져버렸다. 그는 자신의 뒷덜미에 꽂혔던 케이블을 스스로 뜯어냈다.
“가짜 행복을 보느니, 내 동생이 내는 비명을 듣는 쪽을 택하겠어.”
그 대가로 카이는 시스템에서 삭제된 유령이 되었다. 시력을 잃었고, 신체는 서서히 망가져 갔지만, 그는 이곳 하층부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엘리스의 진동을 느끼며 버텼다.
그는 동생이 겪는 지옥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카이가 고개를 들어 글록을 보았습니다.
“엘리스는 저 위에 있는 게 아니에요. 저 타워 자체가 엘리스의 확장된 비명이에요. 사람들은 그녀가 행복을 제조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녀는 인류가 싸지른 감정의 배설물을 먹고 소화시키는 거대한 쓰레기통일 뿐이라고요.”
카이의 목소리는 분노를 넘어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다.
“당신은 마리아를 직접 만났죠? 저도 마리아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본 건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이 도시의 기반이 된 원형 데이터 속에 숨겨진 그녀의 의지였어요.”
카이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모든 시대의 비극을 설계한 설계자는 중세의 마리아, 미래의 엘리스를 포함한 각 시대의 희생자들을 시스템의 부품으로 사용했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순수한 희생의 데이터는 결코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시공간의 뒤편에 축적된다는 사실말이다.
“2099년의 시스템 루시퍼를 구축할 때, 설계자들은 과거 루프의 기록들을 가져와 기초 코드로 삼았어요. 그때 중세에서 타 죽었던 마리아의 공감 데이터가 필터링되지 않은 채 엘리스의 시스템 하단에 깔린 거죠.”
카이는 엘리스가 타워에 갇힌 직후, 그녀의 비명을 추적하다가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었다.
엘리스의 비명 사이로 전혀 다른 시대의 언어, 전혀 다른 시대의 슬픔이 섞여 들려오는 것을 말이다.
“엘리스가 절망의 끝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영혼은 시스템 내부에서 고독하게 떠돌던 마리아의 잔상과 접촉했어요. 마리아는 엘리스를 안아주며 말했죠. ‘조금만 버티렴. 내가 만났던 그 푸른 눈의 아저씨가, 이번엔 너를 찾으러 올 거야.’”
마리아는 죽음의 순간, 자신의 영혼을 데이터화하여 루프의 뒤편으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글록이 이 지옥 같은 미래에 도달할 것을 예견하고, 엘리스의 의식 속에 희망의 좌표를 심어두었다. 설계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대의 소녀들이 남기는 그 희망을 말이다.
시스템의 오류를 감시하던 카이는 엘리스의 뇌파에서 송출되는 이 비밀 메시지를 우연히 수신했다.
“마리아는 시스템의 틈새를 통해 저에게 속삭였어요. ‘등 뒤에 은빛 날개를 달고, 가슴에 내 빛을 품은 이방인이 나타날 때, 네 동생은 비로소 침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요.”
카이가 자신의 뒷덜미를 가리켰다.
흉터 자국 주위로 희미한 백색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 예언을 믿기 위해 내 눈을 버리고, 시스템을 거부하며 이곳에서 썩어갔던 거예요. 그리고 오늘, 당신의 가슴속에서 마리아의 심장 소리를 들었죠.”
카이가 글록의 슈트를 꽉 움켜쥐었다.
“지금 저 위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좀비나 다름없어요. 엘리스라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는, 영혼이 거세된 시체들일뿐이라고요.”
글록은 카이의 떨림을 통해 2090년의 그 참혹했던 현장을 전해 들었다.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던 인류가 선택한 것은 진화가 아니라, 한 소녀의 영혼을 제물로 바친 영원한 마약이었다.
글록은 카이의 마른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강철 슈트 너머로 전해지는 소년의 떨림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 홀로 동생의 비명을 견뎌온 자만이 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저항의 진동이었다.
글록은 고개를 들어 구름 위로 오만하게 솟아오른 싱귤래리티 타워를 응시했다.
그동안 거쳐온 수많은 루프, 그 속에서 마주했던 이름 모를 소녀들의 눈망울이 글록의 망막 위로 겹쳐졌다.
지금껏 그는 스스로를 냉정한 조사관이라 믿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 마리아의 데이터가 깃든 곳에서 느껴지는 이 뜨거운 통증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가 소녀들에게 느꼈던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내며 짓이겨지는 엘리스의 운명과, 멸망하는 종족의 슬픔을 기록하며 영원을 떠도는 자신의 고독이 기묘한 주파수로 공명하고 있었다.
“가자, 카이. 네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지옥의 정점으로.”
글록의 음성은 낮았지만, 그 안에는 2090년의 광기를 잠재울 만큼 서늘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오, 드디어 공무원 모드 해제인가요?” 알파-3가 렌즈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글록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방금 분석 완료했습니다. 카이가 알려준 비밀의 문은 타워의 에너지 배출구와 연결된 하수 처리 구역입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걸러진 찌꺼기 감정들이 흐르는 곳이죠. 한마디로, 지옥의 하수구로 직접 다이빙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제 깨끗한 동체에 오물이 묻는 건 질색이지만, 뭐, 전설적인 조사관님의 뒤태를 따르는 수밖에요.”
카이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글록의 백색 광휘를 나침반 삼아 앞장섰다.
소년의 발걸음은 위태로웠으나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
“타워의 심장부로 갈수록 엘리스의 비명은 커질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천상의 음악이라 부르며 취해 있겠지만, 우리는 그 소음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해요.”
셋은 슬럼의 짙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글록의 등 뒤로 흐르는 백색의 에너지는 이제 단순한 동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의 마리아가 보낸 약속이었고, 카이가 지켜온 기다림이었으며, 글록이 비로소 받아들인 공감이라는 이름의 인간적 무기였다.
하수구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타워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괴한 전자음과 비릿한 데이터의 악취가 쏟아져 나왔다.
“들리나요?” 카이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엘리스가... 아저씨를 부르고 있어요.”
글록은 대답 대신 가슴 위의 장갑판을 툭툭 쳤다.
마리아의 빛이 더욱 밝게 일렁이며, 지옥의 심장부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를 눈부시게 비추기 시작했다.
하수구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순간, 외부의 소음은 차단되었고 대신 기괴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들을 덮쳤다. 이곳은 물리적인 하수구가 아니었다. 인류의 뇌에서 뽑아낸 뒤 정제되고 남은, 끈적하고 오염된 감정의 폐수가 흐르는 데이터의 통로였다.
“윽…!”
글록이 무릎을 꿇었다. 슈트의 외부 센서들이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댔다.
통로 벽면을 따라 흐르는 검은 액체에서는 수만 명의 자살 직전의 우울,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탄, 그리고 이유 없는 증오가 악취처럼 뿜어져 나왔다.
“글록! 조심하세요! 여기 흐르는 건 데이터가 아니라 독 그 자체입니다! 슈트의 멘털 방어막이 40%까지 떨어졌어요. 자칫하면 당신의 자아가 이 쓰레기 기억들에 동화되어 자아 붕괴를 일으킬 겁니다!”
알파-3가 다급하게 글록의 머리 주위를 돌며 백색 항정신 파동을 쏘았지만, 오염된 데이터의 양은 압도적이었다.
“내 손을 잡아요.”
어둠 속에서 카이가 글록의 손을 꽉 잡았다. 소년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이상하리만큼 떨리지 않았다.
“눈으로 보려 하지 마세요. 그건 루시퍼가 만든 가짜 정보예요. 엘리스의 비명 중에서도 가장 아픈 쪽... 그게 우리가 가야 할 진짜 길이에요.”
눈이 보이지 않는 카이에게 이곳은 지옥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었다.
소년은 10여 년간 이 비명을 이정표 삼아 살아왔다.
카이는 쏟아지는 감정의 폐수 사이에서 소리만으로 보안 레이저의 사각지대를 찾아냈다.
하지만 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통로 상부에서 거대한 보안 유닛 드 ‘센티널’ 세 기가 소리 없이 내려온 것이다.
녀석들은 침입자의 물리적 신체보다 ‘정신적 파동’을 추적했다.
“감지 완료. 미등록 파동 확인. 즉시 기억 소거 모드 가동.”
센티널의 붉은 렌즈가 번쩍이자, 글록의 머릿속으로 수천 개의 날카로운 바늘이 박히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글록의 푸른 눈이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뇌가 시스템의 강제 포맷 명령에 굴복하려던 찰나였다.
‘아저씨, 잊지 마세요.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글록의 심장부에서 마리아의 목소리가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그녀의 데이터가 글록의 신경망 전체를 눈부신 백색광으로 덮었다.
“마… 리아…!”
글록이 포효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마리아의 빛이 실린 주먹은 센티널의 외장 장갑이 아니라, 녀석들의 메인 프로세서를 직접 타격했다.
살상 프로그램으로 가득 찼던 기계의 회로에 마리아가 간직했던 중세의 맑은 햇살과 아이의 웃음소리 데이터가 강제로 주입되었습니다.
치직- 콰앙!
논리적 오류를 견디지 못한 센티널들이 공중에서 폭발하며 불꽃을 튀겼다.
“방금 건 정말 대단했는데요? 하지만 글록, 방심하지 마세요. 방금 그 폭발 때문에 타워 전체의 보안 등급이 최고치로 올라갔습니다.”
알파-3의 말대로, 통로 끝에서 거대한 압력 밸브가 열리며 더 거대하고 시커먼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엘리스가 견디다 못해 쏟아낸 순수한 고통의 역류였다.
“이제 시작이에요.”
카이가 앞을 가리켰다. 하수구의 끝, 거대한 환풍구 너머로 엘리스가 갇힌 싱귤래리티의 핵이 푸르스름한 안갯속에서 그 기괴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아저씨는 엘리스가 지난 10년 동안 겪었던 모든 지옥을 0.1초 만에 체험하게 될 거예요. 그래도... 가실 건가요?”
글록은 대답 마리아의 온기가 가득한 가슴팍을 툭툭 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가는 것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