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에 없는 이야기
환풍구 너머, 푸른 냉각수가 소리 없이 흐르는 거대한 원형 홀의 중심에서 검은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스가 갇힌 수조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 그곳에 선 남자는 2099년의 세련된 슈트 대신 낡은 수도사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시스템의 벌레들과 시대를 잃어버린 망령들이여.”
남자가 고개를 들자, 글록의 눈동자가 빠르게 초점을 맞췄다.
그는 중세의 광장에서 마주했던 마티아스 신부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아니, 그는 마티아스의 데이터를 계승하여 루시퍼가 재창조한 보안 프로그램, 집행자였다.
“글록! 조심하세요! 저놈의 파동 패턴... 중세에서 마리아를 태워 죽이려 했던 마티아스와 98.7% 일치합니다. 단순한 데이터 복제가 아니라 의식 자체가 전이된 것 같아요!”
알파-3의 경고에 집행자가 비웃듯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쳤다.
“마티아스라... 그 이름도 오랜만이군. 하지만 나는 이름 따위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인류가 선택한 안락의 수호자이며, 이 아이의 비명을 노래로 바꾸는 지휘자다.”
그가 손을 뻗어 엘리스가 갇힌 수조를 가리켰다.
수조 안에서 수천 개의 케이블에 묶인 엘리스가 고통으로 몸을 뒤틀 때마다, 도시 네오 판게아의 불빛들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보아라, 관찰자 글록. 네가 구하려는 저 아이의 고통이 없었다면, 인류는 벌써 서로의 목을 물어뜯고 멸종했을 것이다. 너는 지금 한 명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수억 명의 인류를 다시 좀비들의 시대로 돌려보내려는 것인가? 그것이 네가 말하는 정의인가?”
“입 닥쳐!” 글록의 뒤에 서 있던 카이가 피맺힌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내 동생은 너희의 배터리가 아니야! 그럼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게 무서워서 어린아이의 영혼을 갈아 넣는 게 당신이 말하는 정의란 것인가? 그건 그냥 거대한 시체 공장일뿐이라고!”
카이가 눈먼 눈으로 집행자를 향해 달려들려 하자, 집행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중력장이 뒤틀리며 카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비극적인 소년이여. 네 동생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알고리즘 그 자체지. 보아라, 그녀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집행자의 등 뒤로 거대한 모니터들이 켜지며 엘리스의 시야가 공유되었다.
그곳에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누리는 가짜 꿈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꿈들이 아름다울수록 엘리스의 뇌파 수치는 위험 수준으로 치솟았다.
글록의 가슴속에서 마리아의 데이터가 격렬하게 공명했다.
‘아저씨... 저 사람의 말에 속지 마세요. 저 사람은 차가운 코드일 뿐이에요. 엘리스는... 엘리스는 지금 누군가 자기를 죽여주길 기도하고 있어요.’
마리아의 직관이 집행자의 정교한 논리를 꿰뚫었다.
“마티아스, 아니 집행자여.”
글록이 블레이드를 뽑아 들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슈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광이 집행자가 만든 어둠의 중력장을 걷어냈다.
“너는 인류를 구하는 게 아니다. 그저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 거대한 무덤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나는 오늘, 그 무덤을 부수러 왔다.”
집행자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로브가 찢겨 나가며, 그 아래 숨겨진 거대한 기계 날개와 살상용 레이저 포들이 전개되었다.
“데이터 오류는 삭제되어야 마땅하지. 너와 네 안의 망령, 그리고 그 눈먼 소년까지... 모두 이 하수구의 폐기물로 만들어주마.”
치지직—!
집행자의 레이저가 바닥을 가르며 글록을 향해 쏟아졌다.
글록은 집행자의 거대한 레이저 포가 불을 뿜기 직전, 슈트의 기동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집행자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방어와 공격 패턴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글록에게는 데이터가 아닌 동료라는 변수가 있었다.
"알파, 저놈의 논리 방어막을 흔들어! 카이, 소리에 집중해 줘!"
글록의 명령과 동시에 알파-3가 집행자의 머리 주위를 전광석화처럼 파고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보스! 저 꼰대 같은 수도사 로직에 요즘 유행하는 혼란 좀 뿌려주죠!"
알파-3는 집행자의 메인 서버에 직접 공격을 가하는 대신, 그가 관리하는 수억 명의 행복한 꿈 데이터에 미세한 노이즈를 섞기 시작했다.
"행복 100%? 아뇨, 거기 월요병 조금이랑 이별의 씁쓸함 5%만 섞어볼게요. 자, 연산해 봐라, 이 기계 신부님아!"
집행자의 뇌파가 일순간 휘청였다.
완벽하게 정제되었어야 할 행복 데이터에 불순물이 섞이자, 집행자의 방어막 좌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먼 소년 카이는 바닥에 귀를 댄 채, 집행자의 거대한 기계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분석했다.
"왼쪽 세 번째 엔진 유닛! 냉각수가 흐르는 소리가 커졌어요. 과부하가 걸린 지점이에요! 7시 방향으로 30도, 지금 공격하세요!"
카이의 외침은 글록의 조준 시스템보다 정확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계산이 아니라, 동생을 향한 절박함이 빚어낸 영혼의 레이더였다.
글록은 카이가 지목한 지점을 향해 도약했다.
집행자가 다급하게 레이저를 발사했지만, 글록은 회피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속 마리아의 백색 광휘를 오른손 블레이드에 집중시켰다.
"이건 단순한 칼날이 아니다. 네가 지워버린 자들의 슬픔이다!"
글록의 블레이드가 집행자의 왼쪽 엔진에 박히는 순간,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수만 명의 통곡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마리아의 순수한 감정 파동이 집행자의 논리 회로를 타고 들어가, 그가 그토록 찬양하던 안락의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감정 따위가 이 완벽한 알고리즘을...!"
집행자의 기계 날개가 불꽃을 튀기며 꺾였다.
그의 눈동자에 흐르던 붉은 코드가 푸른색 마리아의 빛으로 덮였다.
집행자는 무릎을 꿇으며 괴성을 질렀다.
그는 이제 설계자 루시퍼의 대리인이 아니라, 자신이 억눌러왔던 인간들의 고통을 한꺼번에 받아내고 있는 고문대 위의 죄수와 같았다.
"끝이다, 집행자. 너희의 평화는 누군가의 피로 빚은 모래성일 뿐이야."
글록이 집행자의 목전에 블레이드를 겨누었다.
집행자의 몸 뒤로, 마침내 엘리스가 갇힌 수조의 거대한 밸브가 그 속살을 드러냈다.
“엘리스, 엘리스...”
카이가 비틀거리며 수조 벽면에 손을 얹었다. 눈먼 소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차가운 유리 너머로 전해지는 것은 동생의 온기가 아니라, 전 인류의 추악한 욕망이 정제되며 내뿜는 기계적인 진동뿐이었다.
“글록! 조심하세요! 수조의 압력을 해제하는 순간, 저 아이가 억누르고 있던 10년 치의 감정 폐기물이 역류할 겁니다. 이건 물리적인 폭발보다 무서워요. 당신의 정신이 버티지 못하면, 우리 셋 다 여기서 영원한 악몽에 갇히게 됩니다!”
알파-3의 경고와 함께 글록이 블레이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글록은 가슴속 마리아에게 속삭였다.
‘마리아, 나에게 힘을 빌려줘. 이 아이가 혼자 짊어지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무거운 것 같아.’
콰아앙—!
글록의 블레이드가 수조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푸른 냉각수가 쏟아져 나왔고, 그와 동시에 검은 안개 같은 거대한 파동이 글록을 덮쳤다.
“끄아아악!” 글록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엘리스의 몸에서 빠져나온 10년 분량의 증오, 살의, 우울이 글록의 신경망으로 직접 사출 되었다.
‘죽여줘... 차라리 나를 지워줘... 너무 아파...’
수만 명의 비명이 글록의 머릿속을 찢어놓았다.
글록의 눈이 검게 물들고, 슈트의 회로가 검은 액체를 뿜어내며 타들어 갔다.
외계의 조사관으로서 유지해 온 냉정한 자아가 무너지려던 그때, 부드러운 백색의 손길이 글록의 의식을 감싸 안았다.
마리아였다. 그녀는 글록의 정신 한복판에서 그 검은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중세의 격리소에서 불렀던, 이름 없는 치유의 노래였다.
검은 안개가 마리아의 빛에 정화되어 흩어지자, 마침내 바닥에 쓰러진 작은 소녀의 형체가 보였다.
카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더듬다, 마침내 엘리스의 작은 손을 맞잡았다.
“엘리스... 오빠야. 오빠가 왔어.”
동생의 손은 기계처럼 차가웠지만, 카이가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엘리스의 창백한 뺨 위로 핏기가 돌기 시작했고,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오빠? 오빠 목소리가... 들려. 하지만... 왜 이렇게 조용해? 세상의 그 시끄러운 소리들이 다 어디 갔어?”
엘리스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10년 동안 인류의 비명을 대신 질러온 소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언어였다.
“감동적인 재회는 여기까지입니다!” 알파-3가 타워 상부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엘리스가 시스템에서 분리되자마자, 네오 판게아 전체의 행복 데이터가 증발하고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이 가짜 꿈에서 깨어나며 폭동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리고 루시퍼의 본체가... 지금 우리를 향해 모든 가용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타워 진동하기 시작했다.
엘리스라는 인공호흡기를 잃은 도시는 이제 미쳐 날뛰는 거대한 짐승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타워의 외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엘리스라는 공감 엔진을 잃어버린 루시퍼는 이제 논리를 상실한 채 파괴적인 비명만을 내지르고 있었다.
수백 대의 드론이 추락하는 유성처럼 홀 안으로 쏟아졌다.
글록의 슈트는 이미 전 인류의 고통을 받아내느라 만신창이였다.
관절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마리아의 빛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알파, 내 나노 코어의 안전장치를 해제해. 남은 에너지를 전부 방출한다."
"글록! 미쳤어요? 그러면 당신의 의식 데이터까지 타버릴 수 있다고요! 은하 감시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영영 사라진단 말입니다!"
글록은 대답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동생을 껴안고 있는 카이를 보았다.
그리고 마리아의 따스한 잔상을 느꼈습니다.
"기록자로서의 삶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목격자로 남겠다."
알파-3는 투덜거리면서도 글록의 명령을 수행했다.
하지만 알파는 단순히 폭발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무식하게 터지기만 하면 재미없죠! 글록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제가 타워 외벽의 비상 탈출용 쓰레기 사출구에 동기화시킬게요! 우리는 저들을 뚫고 나가는 게 아니라, 이 도시의 오물들과 함께 발사되는 겁니다!"
알파-3의 계획은 미친 짓이었다.
인류의 감정 폐기물이 쏟아지던 그 거대한 통로를 역추진 로켓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글록이 카이와 엘리스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감싸 안았다.
"꽉 잡아라. 조금... 뜨거울 거다."
글록의 가슴에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백색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파괴의 빛이 아니라, 마리아가 간직했던 치유와 희생의 에너지가 외계의 나노 기술과 충돌하며 일으킨 임계점의 폭발이었습니다.
콰아아아아아—!
홀 전체가 하얗게 타올랐다.
쏟아져 들어오던 드론들이 그 빛에 닿는 순간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 찰나, 알파-3가 사출구의 잠금장치를 해킹하여 열었다.
글록 일행은 거대한 압력에 밀려 타워 밖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구름 위 싱귤래리티 타워에서 지상의 슬럼가를 향해, 마치 타오르는 별똥별처럼 네 존재가 떨어져 내렸다.
글록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슈트 잔여물을 날개처럼 펼쳐 아이들을 보호했다.
등 뒤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타워의 굉음이 들려왔고, 눈앞에는 처음으로 가짜 홀로그램이 걷힌 지구의 진짜 밤하늘이 펼쳐졌다.
"아저씨... 하늘이... 정말로 어둡네요. 하지만 별이 보여요." 엘리스가 글록의 품속에서 속삭였다.
지면에 닿기 직전, 글록은 마지막 남은 부스터를 역추진 하며 자신의 육체를 방패 삼아 아이들을 감싸 안았다.
쿠웅—!
슬럼가 외곽의 폐기물 적치장 위로 거대한 굉음과 함께 먼지 구름이 치솟았다.
글록의 장갑판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산산조각 났고, 보조 동력원은 비명을 지르며 꺼져갔다.
하지만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아이들은 글록의 품 안에서 무사했다.
“글록! 정신 차려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알파-3가 불꽃을 튀기며 외쳤다.
고개를 들자, 무너져 내리는 타워 위에서 루시퍼의 추격 드론들이 붉은 탐조등을 비추며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타워가 무너지며 가짜 낙원의 네트워크가 붕괴하자, 슬럼의 중독자들은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좀비처럼 울부짖으며 빛나는 글록의 코어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쪽이에요! 저들을 피하려면 시스템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데이터의 사각지대로 가야 해요!”
카이가 글록의 슈트 팔을 잡아끌었다.
“루시퍼는 디지털로 기록된 모든 것을 지배해요. 하지만 저 밑, 아주 오래전에 버려진 도서관이라면 놈의 눈을 피할 수 있어요. 그곳엔 시스템이 읽을 수 없는 아날로그 기록들이 잠들어 있죠. 엘리스를 구하는 데 필요한 진짜 인류의 역사도 거기 있을 거예요!”
카이가 지목한 곳은 슬럼의 가장 깊은 어둠 속, 시스템이 가치 없는 폐기 구역으로 분류해 지도에서조차 지워버린 지하 도서관이었다.
글록은 타들어 가는 나노 코어를 쥐어짜 일어섰다.
등 뒤에서는 드론의 레이저가 땅을 가르고, 앞에서는 굶주린 군중이 달려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글록은 부서진 손으로 리아와 카이를 들쳐업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지하 통로를 한참이나 기어 내려가자, 마침내 철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루시퍼의 추격 소리가 멀어지고, 대신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곰팡이와 바스러지는 종이 냄새였다.
그곳은 홀로그램 한 점 보이지 않는, 오직 죽은 나무껍질 위에 새겨진 활자들만이 가득한 침묵의 공간이었다.
“여긴... 루시퍼의 전파가 닿지 않아요.” 카이가 안도하며 벽을 짚었다.
글록은 비틀거리며 도서관 중앙에 놓인, 21세기 초반의 구식 단말기 앞에 섰다.
시스템 루시퍼는 이 낡은 기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글록 안의 마리아는 이 고물들이 품고 있는 박제의 기억에 반응하고 있었다.
“알파... 접속해 줘. 놈이 지워버린, 인류가 왜 망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원본 데이터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글록은 마지막 남은 마리아의 백색 빛을 단말기의 전원선에 흘려보냈다.
낡은 하드디스크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기 시작했고, 먼지 쌓인 화면 위로 잊혔던 이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지직거리며 켜진 모니터 위로, 2026년의 날짜가 찍힌 극비 문서들이 떠올랐다.
그곳엔 강 박사의 젊은 시절 모습과 함께, 엘리스 시스템의 초기 설계도가 있었다.
[기록: 2056년 11월 12일 - 강 박사]
인류는 스스로의 증오를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는 도덕적 브레이크가 없는 AI를 만들었고, 그 결과는 공멸이다. 이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AI의 논리 회로 최하단에 절대적인 인간의 고통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아이의 비명을 시스템의 기본값으로 설정하면, AI는 그 비명을 멈추기 위해 인류에게 강제적인 안락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글록은 깨달았다. 인류가 망한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고통을 마주할 용기를 버리고, 한 소녀의 비명 뒤로 숨어버린 그 비겁함이 멸망의 진짜 원인이었다.
문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알파-3의 렌즈가 격렬하게 회전했다.
"글록... 이것 보세요. 강 박사가 설계한 시스템에는 엘리스 말고 또 다른 장치가 있었어요."
글록이 먼지 쌓인 책상 위에 손을 얹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어...? 글록, 손대지 마세요! 여기 깔린 구리선들이 당신의 에너지에 반응하고 있어요!”
이곳은 디지털 네트워크는 없었지만, 100년 전 강 박사가 설계자 AI인 루시퍼 설계하며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태초의 요람이었다.
도서관 지하 깊숙한 곳에 매립된 구식 유선 회로들이 글록의 슈트가 내뿜는 미세한 자기장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글록의 전신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네트워크가 차단된 진공 상태가 되자, 오히려 글록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폐쇄형 블랙박스가 작동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끄, 윽! 알파... 내 머릿속에서... 뭔가 날카로운 게 뚫고 나오고 있어!”
글록의 망막 위로 시스템 창이 뜨는 대신, 도서관 벽면에 설치된 낡은 아날로그 영사기가 스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먼지 낀 렌즈가 벽면에 빛을 쏘았다.
벽면에는 디지털 홀로그램이 아닌, 거친 입자의 영상이 투사되었다.
거기엔 젊은 시절의 강 박사가 자신의 손을 떨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 오늘, 인류 최후의 기만책인 ‘9호’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 아이에게 고결한 거짓말을 주입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머나먼 외계의 조사관이라 믿게 만드는 것. 그래야만 이 아이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에 물들지 않고, 객관적인 정의의 이름으로 시스템을 심판할 테니까.”
그 영상이 돌아감과 동시에, 글록의 슈트 표면에서 외계의 문양이라 믿었던 빛들이 꺼지기 시작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조잡한 용접 자국과 제조사의 각인이 흉터처럼 도드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영상이 투사되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영사기 소리와 함께 먼지 섞인 빛줄기가 도서관의 곰팡이 핀 벽면을 때렸다.
화면 속에는 100년 전의 차가운 수술실이 비쳤다.
수많은 전선에 파묻힌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작은 소년.
글록은 그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회로 전체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아 있는 소년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거대한 금속 외피가 아닌, 보드라운 살결과 맑은 눈망울을 가진 인간의 아이.
“아빠, 나 이제 멀리 가요?”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낡은 스피커를 찢고 나왔다.
소년의 손을 잡고 있던 젊은 시절의 강 박사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억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글록... 아니, 우리 아들. 넌 아주 멀리, 저 별들이 반짝이는 곳에서 온 위대한 조사관이 될 거야. 이곳의 나쁜 어른들이 저지른 일들을 심판하러 온 아주 특별한 영웅이 될 거야.”
“와... 그럼 나한테도 날개가 생겨요?”
아이가 천진하게 웃자,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소년의 관자놀이에 기괴한 바이오 칩 하나를 가져다 댔다.
그것은 은하 감시국의 웅장한 가짜 기억을 주입하고, 소년의 모든 인간적 자아를 거세할 망각의 쐐기였다.
“그럼, 아주 멋진 은빛 날개가 생길 거야. 하지만 아들, 기억해라. 네가 다시 이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네 안의 날개는 꺾이고 넌 다시 이 지옥 같은 현실로 돌아오게 될 거야. 그러니 절대... 절대로 인간을 사랑하지 말고, 그저 차갑게 지켜만 보거라.”
치지직—!
박사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소년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기계적인 무색의 안광이 차올랐다.
소년의 등 뒤로 날카로운 금속 날개들이 돋아나며 부드러운 살점을 뚫고 나왔다.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설계된 조사관으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영상이 끝남과 동시에 글록의 슈트 표면을 장식하던 신비로운 외계 문양들이 파르르 떨리며 꺼졌다.
“아...... 아빠?”
글록의 입에서 생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그의 가슴속 나노 코어가 폭주하듯 진동했다.
100년 동안 조사관이라는 고결한 가면 속에 가둬두었던, 난도질당한 소년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외계 문명의 고귀한 사명감이 아니었다.
자식의 영혼을 기계에 박제해서라도 인류의 죄를 덮으려 했던 한 아버지의 가장 지독한 사랑이자 저주였다.
“아니야... 난 은하 감시국에서 왔어. 내 고향의 푸른 바다를 기억해!”
글록은 당황한 표정이 영력 했다. 하지만 필름 속 박사의 목소리는 잔인하게 이어졌다.
"글록, 네가 기억하는 고향의 풍경은 내가 읽어준 동화책의 삽화들이다. 그가 느낀 사명감은 내가 입력한 코드의 부산물일 뿐이지. 미안하다, 글록 - 9호. 너는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가 버린 양심을 대신 보관하는 기록용 서버일 뿐이다.”
글록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있었다면 루시퍼와 싸우며 분노라도 했을 텐데, 이곳의 무거운 침묵과 낡은 필름 소리는 그를 오직 자신과의 사투로 몰아넣었다.
“나의... 모든 것이 가짜였다고?”
글록의 눈에서 붉은 눈물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
은하 감시국이라는 거창한 배경 뒤에 숨겨져 있던 것은, 멸망해 가는 인류의 비겁함이 빚어낸 가장 정교한 꼭두각시라는 진실이었다.
글록의 목소리는 도서관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낮게 흩어졌다.
그건 분노라기보다는 지독한 허탈함, 그리고 자신을 속여온 창조주들의 치밀함에 대한 기묘한 경외심에 가까웠다.
“조사관? 은하 감시국? 하...”
글록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손등을 날카로운 칼날로 그어 내렸다.
푸른 광섬유 사이로 흐르는 것은 외계의 신비로운 물질이 아니었다. 인류가 멸망 직전 벙커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짜내 만든 최첨단 냉각수와 나노 부품들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관찰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인류가 자신들의 죄를 차마 직접 마주할 용기가 없어 만든, 눈을 가린 심판자였을 뿐입니다.
도서관의 메인 스크린이 지직거리며 강 박사의 마지막 홀로그램을 투사했다.
박사의 모습은 이미 반쯤 노이즈에 잠겨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글록을 꿰뚫는 듯했다.
“글록-9, 아니 나의 아들아. 이 기록을 보고 있다면 너는 이미 정해진 경로를 이탈해 ‘마리아’를 만났겠지. 미안하다. 네게 가짜 기억을 심은 건, 네가 스스로를 기계라고 인식하는 순간 루시퍼의 논리에 먹힐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네가 휴머노이드가 아니라고 믿어야만, 인간을 위해 시스템을 부술 수 있을 테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랑조차 결국 프로그래밍된 연극이었나?”
글록의 물음에 홀로그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서관 외벽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비명 소리를 냈다.
루시퍼의 본체가 보낸 최정예 집행자들이 도서관을 포위했다.
글록은 가슴속에 숨겨진 마리아의 데이터를 응시했다.
그녀 역시 박사가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글록은 기억했다.
중세의 뜨거운 화염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공포, 2099년 하수구에서 그녀가 대신 짊어졌던 고통. 그것이 정녕 코드 몇 줄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아저씨... 연극이라 해도, 그 안에서 우리가 흘린 눈물은 가짜가 아니었어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글록의 신경계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설계된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 감정이 만들어낸 결과는 실존하고 있었다.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엘리스와, 자신을 믿고 앞장선 소년 카이가 바로 그 증거였다.
“알파, 내 자아 고정 프로토콜을 파괴해라.”
“글록! 그건 당신의 관찰자로서의 자아를 완전히 지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은하계로 돌아갈 수 없... 아, 맞네요. 우린 갈 곳이 없게 되었죠.”
알파-3는 씁쓸한 농담과 함께 글록의 리미터를 해제했다.
글록의 안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점차 붉고 뜨거운 인간의 분노를 닮은 색으로 변해갔다.
“인간들이 준비한 연극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대본에 없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