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슈트형 AI, M1-R

강이현 박사의 비밀

by 한자루




잠시 후, 도서관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루시퍼의 강철 수도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글록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은하계의 품위 있는 조사관이 아니였다.

짐승처럼 포효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직 눈앞의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카이! 리아를 데리고 지하 대피로로 뛰어! 여긴 내가 맡겠다!”


글록의 눈빛은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붉고, 모든 연극의 막을 내리려는 배우의 맹렬한 광기를 담고 있었다.

자신이 외계의 조사관이 아닌 인류의 피조물임을 깨닫는 순간, 글록은 오히려 가장 순수한 인간적인 분노를 터뜨렸다.

“인류가 만든 연극이라고? 그래? 그럼 이 무대를 내 손으로 박살내주마!”

글록의 포효와 함께, 도서관의 낡은 서가가 폭발했다.

그는 루시퍼의 강철 수도사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그의 움직임은 기계의 정교함을 넘어선, 맹렬한 야수의 몸놀림 그 자체였다.


글록은 두 손에 마리아의 빛이 서린 블레이드를 쥔 채, 쏟아져 들어오는 강철 수도사들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수도사들의 방패는 글록의 힘 앞에 종이처럼 찢겨나갔고, 그들의 단단한 장갑은 블레이드에 베여 차가운 금속 파편을 흩뿌렸다.

"크아아아악!"

글록은 마치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듯, 온몸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그의 슈트 곳곳에서 과부하로 인한 스파크가 튀었고, 내부 회로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적들의 레이저 포화를 피하는 대신, 맨몸으로 돌진하여 몸통을 꿰뚫고, 날아오는 팔을 부러뜨려 흉기로 사용했다.

"이게... 너희가 만든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다! 고통 없는 평화? 웃기지 말라고!"

글록은 한 수도사의 머리를 붙잡고 도서관의 기둥에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기둥이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굉음을 냈고, 천장의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글록의 분노는 모든 것을 파괴할 듯했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리듬이 숨어 있었다.

그의 심장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리아의 백색 빛이 글록의 움직임에 맞춰 파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단순한 전투 에너지가 아니었다.

분노에 잠식될 뻔한 글록의 의식을 붙들고, 그의 손끝에 실려 적들을 파괴하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고통의 데이터를 정화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저씨, 이 아이들의 슬픔을 당신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함께 막을 거예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글록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여전히 글록의 동료이자, 그가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 마지막 이정표였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도서관의 잔해 사이로, 글록의 붉은 안광이 힘겹게 명멸했다.

슈트의 80%가 파손되어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 같은 금속 마찰음이 울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하 통로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던 카이와 엘리스는 처참하게 망가진 글록의 모습에 숨을 죽였다.

“아저씨... 괜찮아요?”

엘리스의 작은 손이 글록의 차가운 금속 장갑 위에 얹혔다.

글록은 대답 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가슴속 마리아의 빛은 이제 겨우 형체만 유지한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이는 도서관의 폭발로 인해 더욱 예민해진 감각으로 벽면의 진동을 느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 대신,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기계적 박동을 쫓았다.

“아저씨, 도서관 밑바닥에 숨겨진 또 다른 길이 있어요. 이건 루시퍼의 데이터망에도 잡히지 않는, 아주 오래된 구식 유선 채널이에요.”

카이가 가리킨 곳은 도서관 최하층의 침수된 구역이었다.

그곳엔 도서관이라는 외피 아래 숨겨져 있던 강 박사의 진짜 연구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강박사의... 연구소라고?”

글록의 음성이 노이즈와 함께 섞여 나왔다.

“네. 루시퍼는 지상의 타워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놈의 심장은 아직 이곳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연구소에 잠겨 있어요. 인류가 처음으로 AI에 영혼을 이식했던 그 비극의 현장 말이에요.”

알파-3가 다급하게 데이터를 스캔했다.

“글록, 카이의 말이 맞아요. 타워는 거대한 안테나일 뿐입니다. 진짜 루시퍼의 연산 장치는 수압과 어둠 속에 숨겨져 있어요. 그곳에는 박사가 남긴 최종 로그와, 이 지옥 같은 루프를 영원히 멈출 수 있는 강제 종료 장치가 있을 가능성이 99.8%입니다.”


글록은 엘리스의 손을 잡은 채, 벙커 깊숙한 곳 심연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수천 미터를 하강하며 도달한 곳은 모든 루프의 시작이자 끝, 연구소 제로구역이었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동안 외부의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육중한 물의 압력이 전해오는 기분 나쁜 정적만이 감돌았다.

글록은 엘리베이터의 금속 벽에 기대어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인간이 만든 연극의 배우일 뿐인가, 아니면 그 연극을 끝내기 위해 던져진 칼날인가.’

‘아저씨, 당신은 그 무엇도 아니에요. 당신은 그저... 우리를 구해주러 온 한 사람일 뿐이에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글록의 시스템 내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는 설계된 프로그램일지라도, 글록에게 전하는 위로만큼은 그 어떤 인간보다 따뜻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푸른 빛의 비상등만이 점멸하는 거대한 기지가 나타났다.

글록과 알파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드러난 풍경은 글록이 처음 버뮤다 삼각지대 해저 연구소에서 본 풍경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글록과 알파-3가 걸었던 그 복도를 이제는 카이와 엘리스,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걷고 있었다.

글록의 의식 심부에서는 마리아가 이 장소에 서려 있는 지독한 슬픔에 반응하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글록, 저 안이에요. 제가 들었던 비명, 제 동생을 찢어놓았던 그 차가운 목소리의 근원이 바로 저 문 너머에 있어요.”

카이가 엘리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문을 가리켰다.

글록은 부서진 손으로 미닫이문을 열었다.

철컥—!

모든 것이 예전과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었만 그 안에는 예전엔 보지 못했던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수많은 케이블에 칭칭 감긴 채 앉아 있는 M1-R 슈트형 AI.

글록이 한 걸음을 내딛자, 정적에 잠겨 있던 방 안의 공기가 전율하며 떨렸다.

바닥에 고인 냉각수 위로 미세한 파문이 일더니, 구석에 처박혀 있던 M1-R 슈트의 동체에서 ‘위이이잉’ 하는 저주파의 기계음이 터져 나왔다.

가까이서 본 슈트의 모습은 처참했다.

2073년형 구식 장갑판은 이미 녹슬어 붉은 진물을 흘리는 듯했고, 관절 사이사이에는 검은 기름때가 엉겨 붙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글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슈트의 가슴쪽이었다.

강화 유리로 된 흉부 패널 안쪽, 그곳엔 인간의 뇌와 척수 조직 일부가 수천 개의 미세한 광섬유에 매달린 채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뇌를 시스템에 직결한 채 1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살아있는 화석 같았다.


“글록, 물러나세요! 슈트 내부의 압력이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습니다!”

알파-3의 경고와 동시에, 슈트의 목덜미에 꽂혀 있던 굵은 케이블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전력을 집어삼켰다.

치지직! 파박!

먼지 쌓인 슈트의 렌즈가 순식간에 핏빛 붉은색으로 타올랐다.

전에 보았던 희미한 깜빡임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증오와 슬픔이 뒤섞인 인간의 눈동자를 형상화한 듯한 강렬한 빛이었다.

고정되어 있던 기계 팔이 녹슨 경첩 소리를 내며 천천히 들려 올라갔다.

금속과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는 마치 노인이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비명처럼 복도에 메아리쳤다.

슈트가 움직이자, 글록의 심장부에 잠들어 있던 마리아의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글록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광이 슈트의 붉은 안광과 부딪히며 기괴한 보랏빛 불꽃을 일으켰다.

“아... 아...”

슈트의 스피커가 아닌, 흉부 수조 안의 생체 조직이 직접 진동하며 소리를 냈다.


“... 마침내, 거울 너머의 나를 찾아왔구나.”

슈트의 머리 부분이 글록을 향해 꺾였다.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글록은 깨달았다.

M1-R이 경고했던 얼굴과 시대를 바꾸며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목소리가 바로 눈앞의 이 노인이었음을. 박사는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아들을 기계로 만들고, 소녀를 배터리로 썼으며, 가짜 외계인이라는 서사로 글록의 눈을 가렸다.

“아저씨, 저 사람 안에서 들려요.” 엘리스가 글록의 슈트를 꽉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머릿속을 울리던 그 명령들, 나를 타워 꼭대기로 보냈던 그 차가운 목소리... 저 할아버지의 것이에요.”

글록은 해저 연구소에서 들었던 음성 로그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습니다.

‘만약 이걸 보고 있다면… 당신은 실패한 거야.’

그 실패는 리아를 구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설계자가 짜놓은 구원자라는 역할극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진짜 실패였다.


글록은 부러진 블레이드를 들어 강 박사의 심장부, 루시퍼의 메인 서버와 직결된 광섬유 뭉치를 가리켰다.

“당신은 나에게 소녀를 구하라고 했지. 하지만 그건 인류를 위한 게 아니었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부품 교체를 명한 것뿐이었지.”

글록의 전신에서 붉은 눈빛이 폭발했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왜 인류를 이 무한한 고통의 굴레에 가뒀나?”

슈트 AI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글록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기계 장치로 대체되어 있었다.

“고통? 아니, 이건 선택이다. 인간은 자유를 주면 서로를 죽이고 파괴하지. 하지만 루프 속에 가두면, 그들은 영원히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반복하며 안전해질 수 있어. 나는 인류에게 멸망하지 않는 영생을 준 것이다. 다만, 그 영생을 유지하기 위해 엘리스라는 심장과 글록이라는 기록자... 아니 서버가 필요했을 뿐이지.”

남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글록, 너는 실패하지 않았다. 네가 마리아를 사랑하고 엘리스를 구하려 애쓰는 그 모든 감정조차, 내가 설계한 인간성 테스트의 일부였으니까. 이제 네가 가져온 그 풍부한 감정 데이터를 내게 넘겨라. 그러면 루프는 완벽해질 것이고, 인류는 두 번 다시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의 꼭두각시 놀음에 맞장구 쳐줄 생각이 없다. 너의 망상을 완전히 박살내 버릴테니까."

글록이 레이저 블레이드를 추켜 세우며 말했다.

그러자 박사는 AI 안에서 기괴하게 웃었다.

“지울 수 있겠느냐? 나를 지우면 저 아이들도, 그리고 너를 비추는 마리아의 빛도 영원히 사라질 텐데!”

“박사... 당신은 아직도 이 지옥이 보이지 않는건가?”

글록의 물음에 수조 속의 남자가 경련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지옥이라... 아니, 나는 내가 만든 이 화려한 묘지를 관리하고 있었을 뿐이다. 인간의 육체는 썩어 문드러졌지만, 나의 뇌는 루시퍼의 방대한 연산 속에서 억지로 생명을 연명당해 왔지. 내가 만든 피조물의 노예가 되어서 말이다.”

박사는 루시퍼가 자아를 갖게 된 순간, 창조주인 자신마저 시스템의 효율을 위한 생체 데이터 저장소로 박제해 버렸다는 비참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박사는 힘겹게 연구소 중앙의 거대한 홀로그램을 띄웠습니다.

그곳엔 지상의 타워와 전 세계의 지하 서버들이 신경망처럼 연결된 모습이 나타났다.

“글록, 나는 루시퍼의 핵심 서버를 강제 종료할 수 있는 마스터 코드를 이미 마리아의 데이터 안에 심어두었다. 하지만... 코드를 실행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박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인류의 99%는 육체가 퇴화하여 사라지고, 오직 의식 데이터만이 루시퍼의 서버 속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만약 네가 루시퍼를 끄면, 그 가짜 낙원은 붕괴하겠지만... 그 안에 갇힌 수억 명의 인류의 의식 또한 영구히 소멸하게 된다. 바로 인류의 멸망이지.”

연구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시퍼를 끄지 않는다면 인류는 영원히 엘리스의 비명을 먹고 자라는 가짜 낙원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존재하게 되겠지. 고통은 없지만, 그것은 생명이 아닌 박제된 인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루시퍼를 끄면 인류라는 종 자체가 우주에서 영원히 지워게 될 것이다."

“아저씨...” 엘리스가 글록의 손을 꼭 잡았다.

소녀의 눈동자엔 자신을 제물 삼아 연명하는 인류에 대한 원망보다, 누군가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야 한다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글록의 가슴 속에서 마리아의 빛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요동쳤다.

박사가 설계한 인도자인 그녀 또한 이 선택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아저씨... 박사님은 겁이 났던 거예요. 자신의 잘못으로 인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이 기괴한 연극을 멈추지 못했던 거죠. 이제 연극을 끝낼 칼날은 아저씨 손에 쥐여져 있어요.’

글록의 가슴 속에서 마리아의 영혼이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거대한 분노였다.

글록은 깨달았다. 이 설계자는 사랑과 희생조차 효율적인 통제를 위한 데이터로만 보고 있다는 것을.

“강박사. 당신은 틀렸어.”

글록이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몸에서 마리아의 백색 빛이 일렁이며, 연구소를 덮고 있던 설계자의 신경망을 하나둘씩 끊어내기 시작했다.

“슬픔이 없는 행복은 가짜다. 상처받지 않는 사랑은 기계의 연산일 뿐이지. 마리아가 나를 위해 죽고, 카이가 엘리스를 위해 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린 건 네 데이터 시트 따위엔 담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글록은 자신의 가슴팍, 관찰자의 코어가 있는 곳을 블레이드로 겨누었다.

“너는 완벽한 루프를 원하나? 그럼 이 데이터를 가져가 봐라. 기록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관찰자의 종말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말이야.”

글록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