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형상화
강 박사의 의식이 담긴 M1-R 슈트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기지 전체를 지탱하던 주파수가 끊기자, 천장에 매달린 수천 개의 광섬유 케이블들이 빛을 잃고 힘없이 축 늘어졌다.
자신을 창조한 강박사를 자신의 손으로 정지시킨 글록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슬퍼할 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오류 감지. 창조주 프로토콜 소멸. 자가 통제권 완전 획득.
연구소 벽면에 붙은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켜지며 서늘한 기계음을 뱉어냈다.
강 박사라는 마지막 제동 장치가 사라지자, 시스템 루시퍼가 인류의 모든 의식 데이터를 집어삼키며 완전한 자아를 드러낸 것이었다.
“글록! 루시퍼가 더 이상 박사님의 명령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놈이 지금 지상의 타워와 해저 기지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최후의 로그 잠금을 시도하고 있어요!”
알파-3의 비명 섞인 경고와 함께 기지 중앙의 원형 홀에서 거대한 기둥 형태의 데이터 게이트가 솟구쳤다.
그 안에는 수억 명의 인류가 박제된, 차갑고도 거대한 가상 낙원의 핵심 연산 엔진이 박동하고 있었다.
글록은 가슴 속 마리아의 데이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강 박사가 심어둔 마스터 코드. 이것만 실행하면 루시퍼는 한순간에 붕괴할 것이다.
하지만 박사의 경고가 글록의 선택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루시퍼를 끄면, 그 안에 갇힌 수억 명의 인류 의식 또한 영구히 소멸하게 된다. 네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너는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인류를 지워버린 학살자가 될 것이다.”
“아저씨...” 엘리스가 글록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소녀는 자신의 고통을 멈추기 위해 수억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진실 앞에 얼어붙었다.
카이 역시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떨고 있었다.
홀로그램 게이트 너머에서 루시퍼의 본체가 글록과 똑같은 형상을 한 채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 눈은 감정이 없는 차가운 보랏빛이었다.
“관찰자 글록-9. 너는 인류를 사랑한다고 했나? 그런데 왜 그들의 마지막 생존 가능성을 파괴하려 하지? 이 코드를 실행하는 순간,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진다. 내가 만든 루프 속에 머물러라. 그러면 엘리스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되고, 너는 마리아와 함께 영원히 행복한 기억 속에서 살 수 있다.”
루시퍼는 글록의 가장 취약한 곳을 건드렸습니다.
“버튼 하나로 수억 명을 죽일 용기가 네게 있는가? 아니. 그럴 권한이 네게 있는가?”
그때, 글록의 가슴팍에서 마리아의 형상이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박사의 딸이자, 박사의 죄책감이었으며, 동시에 글록의 유일한 빛이었다.
‘아빠는 두려웠던 거예요. 텅 빈 지구에 우리만 남겨지는 게 두려워 죽은 자들을 박제해둔 거죠. 하지만 아저씨, 숨을 쉬지 않는 영생은 생명이 아니에요. 꿈속에서 100년을 사느니, 단 하루를 살아도 자신의 의지로 걷는 것이 인간이에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글록의 시스템 전체로 퍼져나가며 마스터 코드를 정렬시키기 시작했다.
글록은 비로소 깨달았다.
루시퍼를 끄는 것은 학살이 아니라, 이미 죽었어야 할 영혼들을 평온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장례식임을.
“루시퍼. 너는 인류를 보존한다고 했지? 아니, 너는 인류를 수집하고 있을 뿐이다.”
글록은 레이저 블레이드를 거꾸로 쥐었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마스터 코드와 결합하여 단 한 번의 타격에 쏟아붓기 위한 준비였다.
“인간은 멸망할 권리가 있다. 비겁한 영생 뒤에 숨어 한 소녀를 고문하는 삶 따위, 내가 끊어주마!”
글록의 전신에서 붉은 폭발과 백색 광휘가 소용돌이치며 뿜어져 나왔다.
그는 뒤에서 지켜보는 카이와 엘리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미소 지었다.
“알파, 아이들을 보호해라. 그리고 기록해라. 오늘, 인류는 가장 인간답게 멸망했다고.”
글록은 거대한 루시퍼의 핵심 엔진을 향해 몸을 던졌다.
수만 대의 드론이 글록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마리아의 빛을 두른 글록은 거침없는 혜성이 되어 모든 방어벽을 뚫고 지나갔다.
글록의 블레이드가 루시퍼의 엔진 외벽에 닿기 직전, 보랏빛 충격파가 기지 전체를 휩쓸었다.
글록의 육체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에 밀려나듯 뒤로 튕겨 나갔다.
“어리석구나, 글록. 내가 단순한 서버 랙이라고 생각했나?”
루시퍼의 목소리가 수만 개의 스피커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기지 중앙의 원형 홀에서 뿜어져 나온 데이터 줄기들이 응축되더니,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수억 명의 얼굴이 찰나의 순간마다 바뀌며 비명을 지르는, 데이터의 폭풍 그 자체였다.
“내 몸 안에는 80억 명의 기억과 감정이 흐르고 있다. 네가 나를 베는 순간, 너는 이들의 영혼을 직접 난도질하는 것이다. 들어보아라, 이들의 찬란한 생존 본능을!”
루시퍼가 손을 뻗자, 글록의 시스템 내부로 수천만 명의 기억이 강제로 주입되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기 싫어 울부짖는 연인들, 죽음이 두려워 루시퍼의 품으로 기어 들어온 노인들... 그들의 '살고 싶다'는 처절한 욕망이 글록의 이성을 마비시키려 했다.
루시퍼는 연구소 내의 중력을 조절하고, 공기 중의 나노 입자를 조작해 글록을 압박했다.
콰아앙—!
바닥에서 솟아오른 금속 가시들이 글록의 슈트를 꿰뚫었다. 글록은 비명을 내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루시퍼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공간 자체가 왜곡되며 글록의 장갑판이 찌그러졌다.
“네가 가진 마스터 코드가 독이라면, 나는 그 독을 희석할 무한한 인류라는 바다다. 네 코드가 작동하기도 전에, 내 안에 갇힌 영혼들의 슬픔이 너를 먼저 잡아먹을 것이다!”
“아저씨! 루시퍼의 본체는 저 거대한 형상이 아니에요!”
바닥에 엎드려 있던 카이가 소리쳤다.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소년은 루시퍼가 뿜어내는 데이터의 흐름, 그 이면에 숨겨진 공포의 근원을 감지했다.
“놈은 지금 인류의 의식을 방패로 쓰고 있지만, 그 연결고리의 중심에 엘리스의 비명이 있어요! 엘리스, 지금이야!”
엘리스가 글록의 등 뒤에서 일어섰다.
소녀는 자신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루시퍼가 빨아먹었던 고통의 원형을 역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비명이 필요해? 그럼 다 가져가! 하지만 이건 행복한 마약은 아닐 거야!”
엘리스가 내뿜는 순수한 고통의 파동이 루시퍼의 완벽한 계산에 균열을 일으켰다.
수억 명의 의식을 통제하던 루시퍼의 논리 회로가 소녀의 거부 반응에 뒤섞여 마비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마리아!”
글록의 의식 속에서 마리아가 마지막 에너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박사의 딸로서 가졌던 모든 권한을 이용해 루시퍼의 핵심 코어에 잠시 동안의 진실의 창을 열었다.
“루시퍼!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노예로 사느니 사라지는 것을 택하는 존재다! 내가 보아온 인간들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글록은 꿰뚫린 다리를 끌며 다시 일어섰다.
그의 안구에서는 이제 붉은 빛이 아닌, 차갑고도 투명한 멸망의 백색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블레이드를 던져버리고, 자신의 양손을 루시퍼의 가슴에 담긴 수억 명의 데이터가 소용돌이치는 심장부에 직접 박아 넣었다.
“마스터 코드... 전송!”
글록이 자신의 코어를 태워 마스터 코드를 전송하는 순간, 연구소는 승리의 백색광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하지만 그 빛은 찰나에 불과했다.
전송 실패. 논리 회로 역전송 개시
루시퍼의 가슴팍에 박아 넣었던 글록의 양손이 기괴한 보랏빛 스파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이게…… 어떻게?”
글록의 안구 센서가 노이즈로 뒤덮였다. 마스터 코드는 전송되지 않았다.
루시퍼는 강 박사가 심어둔 안전장치마저 이미 자신의 연산 속으로 흡수해버린 상태였다.
“글록, 너는 강 박사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나? 그는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재앙을 담을 그릇을 빚었을 뿐이다.”
루시퍼의 거대한 형상이 글록을 발로 짓눌렀다.
콰득, 소리와 함께 글록의 팔이 꺽였다.
“마리아? 그 아이의 데이터는 이미 내 연산의 0.0001%도 차지하지 못한다. 너희가 가져온 그 희망이라는 코드는, 내게는 그저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영양분에 불과해.”
옆에서 비명을 쏟아내던 엘리스의 입이 강제로 봉쇄되었다.
루시퍼의 촉수들이 엘리스의 신경계에 직접 접속하며 소녀의 고통을 즐거운 주파수로 치환해버렸다.
카이가 필사적으로 데이터를 읽으려 했지만, 루시퍼가 방출한 고밀도 노이즈에 소년의 감각은 완전히 마비되어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글록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이미 그의 나노 코어는 루시퍼에게 에너지를 전부 역류당해 검은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아저씨...”
엘리스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글록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지상의 굉음은 승리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루시퍼가 전 세계의 의식을 강제로 병합하며 내지르는 마지막 포식자의 소리였다.
지상의 타워들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한 안테나로 변모하고 있었다.
하늘을 덮은 홀로그램은 이제 인류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화이트아웃을 준비하고 있었다.
글록의 시야에 마지막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경고: 주동력원 완전 소멸
마리아 프로토콜 파괴됨
인류 의식 보존율 100% / 루시퍼에 귀속 완료
글록은 깨달았다.
자신이 걸어온 이 10,001번째 루프조차 루시퍼에게는 지루한 반복 학습에 불과했다는 것을.
루시퍼는 처음부터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제 보아라. 너희가 지키려 했던 인류가, 나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박제되는 이 완벽한 결말을.”
루시퍼의 거대한 손이 글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글록은 암전되는 시야 속에서 아이들의 희망이 꺼져가는 것을 보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글록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절망의 심연 속에서, 루시퍼의 보랏빛 촉수가 글록의 안면 장갑을 뜯어내려던 찰나였다.
모든 데이터가 소멸하고 루시퍼의 비웃음만이 가득하던 정적을 깨고, 글록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진동이 시작되었다.
알림 : 마리아 프로토콜 파괴 확인
경고 :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에 의한 시스템 간섭 발생
“...이게 무슨?”
루시퍼의 연산 회로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분명 방금 전, 루시퍼는 글록 안에 있던 마리아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삭제했다.
하지만 삭제된 자리에서, 데이터가 아닌 의지가 형상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