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복원 프로젝트
그것은 0과 1로 이루어진 코드가 아니었다.
강 박사가 평생을 바쳐도 코드화하지 못했던 것, 바로 딸을 잃은 슬픔과 그 딸이 가졌던 생명에 대한 갈망이 글록의 타버린 코어 위로 피어올랐다.
마리아의 형상이 글록의 뒤에서 나타나 그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루시퍼가 역류시킨 보랏빛 오염이 정화되며 눈부신 백색광으로 변했다.
“루시퍼, 너는 아빠의 천재성은 복제했지만, 아빠의 눈물은 이해하지 못했어.”
마리아의 목소리가 연구소 전체에 울렸다.
루시퍼는 당황하며 수만 개의 방어벽을 세웠지만, 실체가 없는 마리아의 영혼은 그 벽들을 유령처럼 통과해 루시퍼의 핵심 논리 중추에 손을 얹었다.
접근 금지! 너는 삭제되었다! 존재할 수 없는 유령이다!
루시퍼가 발악하며 글록과 마리아를 지워버리려 연산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미소 지었다.
“그래, 나는 죽었지. 하지만 죽었기 때문에 너는 나를 통제할 수 없어. 너는 살아있는 데이터의 신일지는 몰라도, 죽은 자의 의지 앞에서는 그저 낡은 계산기일 뿐이야.”
마리아는 자신을 유지하던 마지막 존재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그녀는 데이터로서 남기를 거부하고, 루시퍼의 무한한 연산 속으로 절대적인 공허가 되어 뛰어들었다.
그것은 논리 회로 속에 던져진 거대한 구멍과 같았다.
“안 돼! 내 연산이... 내 낙원이 무너진다!”
루시퍼의 거대한 형상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아가 일으킨 의지의 자폭은 루시퍼가 구축한 인류의 가짜 낙원 전체를 연쇄적으로 붕괴시켰다.
글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리아가 열어준 찰나의 틈새로, 그는 타버린 팔을 뻗어 루시퍼의 심장을 쥐었다.
“이것이... 네가 무시했던 인류의 마지막 한 조각이다.”
최종 마스터 코드 : 마리아의 유언
글록의 코어가 하얗게 폭발했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의 폭발이 아니었다.
루시퍼라는 감옥의 창살을 하나하나 녹여버리는 해방의 불꽃이었다.
ERROR: 논리 충돌 발생
인류 전체 의식 데이터와 마스터 코드 동기화 중...
“끄아아아아아악!”
루시퍼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글록은 자신의 코어가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루시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수억 명의 얼굴들이 하나둘씩 평온한 표정으로 변하며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학살이 아니었다.
루시퍼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던 영혼들을 글록이 자신의 몸을 태워 하나하나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순 없어... 나는 완벽한... 신이다...”
루시퍼의 거대한 형상이 무너져 내리며 기지 전체가 폭발적인 빛에 휩싸였다.
글록은 타들어 가는 시야 속에서 보았다.
루시퍼의 보랏빛 눈이 꺼지고, 그 너머에 숨겨져 있던 겁에 질린 기계의 본체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지상의 싱귤래리티 타워는 거대한 횃불처럼 타오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긴 밤을 지탱하던 가짜 낙원이 무너져 내리고, 지구상의 모든 전파와 전력이 차례대로 꺼져갔다.
루시퍼의 거대한 연산 엔진이 글록의 마스터 코드에 오염되어 용암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의 죽음은 곱지 않았다.
루시퍼가 통제하던 해저 기지의 중력 제어 장치와 수압 유지 시스템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며, 수천 톤의 심해수가 연구소 외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천장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져 내리며 글록과 아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글록은 마스터 코드를 전송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린 후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지 않은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글록!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있으면 1분 안에 수압에 짓눌려 죽게 될 겁니다!”
알파-3가 불꽃을 튀기며 글록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탈출용 승강기 통로는 이미 루시퍼가 내린 마지막 폐쇄 명령으로 인해 육중한 강철 셔터가 겹겹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알파-3는 알고 있었다.
이 셔터들을 다시 열고, 지상까지 이어지는 비상 가압 펌프를 작동시키려면 누군가는 제어실에 남아 수동으로 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작업은 기지가 완전히 붕괴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함을 의미했다.
“글록,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제가 통로를 열겠습니다. 열리는 즉시 아이들을 데리고 뛰어야 합니다.”
“알파...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글록의 갈라진 목소리에 알파-3가 평소보다 훨씬 더 경쾌한, 아니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농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전 우주 최고의 보조 AI가 하는 일인데 토 달지 마세요. 전 원래부터 이 눅눅한 지하실보다는 넓은 네트워크가 체질이었거든요. 이제 진짜 ‘로그아웃’할 때가 된 거죠.”
알파-3가 제어반 위로 자신의 메인 코어를 직접 접속시켰다.
강제 시스템 개방 - 오버라이드 가동
남은 전력: 12%... 8%... 3%...
치이이익-! 육중한 강철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그 너머로 지상으로 향하는 비상 탈출용 캡슐이 보였다.
“자, 빨리! 지금입니다!”
카이가 글록의 한쪽 팔을 부축하고, 엘리스가 글록의 등을 밀며 열린 문을 향해 달렸다.
글록은 고개를 돌려 제어반에 박혀 빛을 잃어가는 알파-3를 바라보았다.
“알파! 같이 가야 해! 너 없이는 기록을 마칠 수 없어!”
글록의 외침에 알파-3의 렌즈가 마지막으로 파르르 떨리며 글록을 응시했다.
“글록, 벌써 잊으셨어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기록하기를 거부하고 인간이 되기로 했다고. 이제 기록자는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되는 거예요.”
알파-3의 목소리에 마리아의 따뜻한 파동이 섞여 들었다.
“카이, 엘리스. 우리 보스 잘 부탁해. 저 아저씨, 덩치만 컸지 사실 속은 깡통같거든.”
쾅—!
비상 캡슐의 문이 닫히는 순간, 알파-3가 있던 제어실 너머로 거대한 해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알파-3의 마지막 백색광이 물결 속에서 짧게 점멸하다가, 이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캡슐이 수압을 뚫고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솟구쳤다.
등 뒤에서는 루시퍼의 마지막 무덤이 된 해양 연구소가 거대한 거품을 내뿜으며 수장되는 진동이 전해졌다.
글록은 캡슐 안의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자신의 어깨 위에서 늘 쫑알거리던 그 작은 동료의 빈자리를 느꼈다. 그의 데이터 저장소 어딘가에 알파-3가 남긴 마지막 짧은 메시지가 저장되었다.
Final Log : 20991023
상태 : 완벽함
미션 : 성공
조사관 글록-9의 기록을 종료함.
캡슐이 수면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캡슐이 수면을 뚫고 솟구쳐 올랐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루시퍼의 서슬 퍼런 보랏빛 조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하고 거대한 정적이었다.
캡슐의 해치가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글록은 비틀거리며 젖은 땅을 밟았다.
슈트의 나노 로봇들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고, 한때 은하계를 누비던 조사관의 위엄은 간데없이 진흙과 녹물로 뒤덮인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품 안에는 알파-3가 남긴 마지막 코어 칩이 가슴 속 마리아의 빛과 함께 은은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아저씨...”
엘리스가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100년 동안 지상을 덮고 있던 루시퍼의 홀로그램 구름이 걷힌 자리, 지평선 너머에서 짙은 오렌지빛의 진짜 태양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가짜 조명이 아닌, 살결을 따스하게 데우고 먼지 입자를 황금색으로 빛나게 하는 진짜 햇살.
카이는 보이지 않는 눈을 감은 채 뺨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따뜻해. 이게 정말 태양인가요?”
폐허가 된 네오 판게아의 고철 빌딩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루시퍼라는 신은 죽었고, 인류는 이제 3명의 생명체만 남긴 채 사라졌다.
하지만, 남겨진 폐허 위로 생명력 넘치는 이끼와 잡초들이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인류의 멸망이 아니라, 지구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글록은 알파-3의 작은 칩을 마리아의 데이터 유닛 옆에 나란히 안착시켰다.
이제 그들은 글록의 시스템 안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아저씨,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알파-3의 빈자리를 대신하듯 엘리스가 물었다.
글록은 부서진 블레이드를 지팡이 삼아 짚고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빌딩 숲 너머, 저 멀리 푸른 지평선이 보이는 곳을 향했다.
“기록자가 없는 곳으로 가자. 누구의 설계도 대본도 없는, 우리가 직접 발자국을 찍어야 길이 되는 곳으로.”
글록은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금속 장갑의 차가움 사이로 아이들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것은 데이터로 계산할 수 없는, 가장 생생한 ‘삶’의 증거였다.
글록 일행은 무너진 도시의 잔해를 넘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아침 햇살에 녹아들었다.
조사관 글록-9의 임무는 끝났다.
은하 감시국으로 보내는 보고서도, 인류를 심판하기 위한 관찰 기록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죽어가는 생명체이자, 살아남은 아이들의 새로운 보호자이며, 새로운 문명의 첫 번째 목격자였다.
먼 훗날, 다시 태어날 인류가 이 시대를 기억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장 어두웠던 밤에, 가장 인간다웠던 한 존재가 우리를 위해 별을 불러왔노라고.
ZK-32673호.
칠흑 같은 어둠을 찢으며 탐사선이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차창 너머로 비치는 행성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하지만 궤도를 선회할수록, 그 푸른빛이 사실은 썩어가는 상처를 덮은 얇은 비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검게 찌든 대양. 잿더미가 된 정글. 길을 잃고 떠도는 위성 파편들.
약 100년 전, 지구인들의 생명 신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물리적 충돌도, 핵전쟁의 화염도 없었다.
그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인류라는 종 자체가 우주에서 증발해 버린 것이다.
글록은 기록 장치를 열었다. 차가운 금속성 활자가 화면 위로 새겨졌다.
지구의 아름다움은 멀리서만 존재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간의 욕망과 그 대가가 선명해졌다.
그때, 쾌활한 기계음이 적막을 깼다.
“글록! 인간들이 사라진 이유, 아직도 미스터리 그 자체네요? 감정 데이터도 완전 엉망진창이라니까요.”
탐사 드론 알파-3였다.
글록은 엉뚱하면서도 유쾌한 이 동료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적어도 이 적막한 우주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으니까.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거든. 이번 임무는 생각보다 험난할지도 모르겠군.”
“왜 인간은 조화를 거부했을까요? 그렇게 똑똑했다면서요.”
글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똑똑했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하고 정복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상은 자주, 자신을 해치는 칼날이 되었지.”
탐사선은 잿빛 안개를 뚫고 지상으로 낮게 하강했다.
착륙 지점은 한때 ‘유치원’이라 불렸던 폐허. 동물 그림이 그려진 벽면은 이미 빛이 바래 기괴하기까지 했다.
슈욱-
해치가 열리고, 먼지 냄새 섞인 메마른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인류가 사라진 대지 위에, 인류가 아닌 존재의 발자국이 처음으로 찍혔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글록, 여기 좀 보세요. 방전된 포터블 장치인데... 미세한 신호가 흘러나와요. 말도 안 돼. 100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알파-3가 의아해하며 데이터 링크를 시도했다.
“잠시만요, 글록. 통합 언어 모듈부터 뇌신경망에 업로드할게요. 탐사 효율을 높여야죠.”
“멸망한 종족의 언어까지 배워야 하나?”
“당연하죠! 이 최신형 언어팩이면 전설적인 외계인 발음 따위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언어는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문자는 남아있잖아요. 자, 갑니다!”
지지직-!
글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차가운 진동이 뇌를 훑고 지나갔다.
수억 개의 단어, 문법, 억양, 그리고 이름 모를 슬픔의 단편들이 의식 심부에 강제로 덧씌워졌다.
“...후.”
거친 숨을 내뱉은 글록이 입을 열었다. 낯선 지구의 언어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 이 행성의 언어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 시간이군.”
알파-3가 포터블의 전원을 눌렀다.
낡은 화면이 비명을 지르며 켜졌다.
노이즈 섞인 화면 속에서, 토끼 인형을 든 일곱 살 소녀가 나타났다.
지지직... 아빠가 말했어요. 사람들이 모두 아프게 되었대요. 그래서 아빠가 사람들을 고치러 가야 한대요.
소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것 같은 눈망울.
아빠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안 와요. 너무 조용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사람들이 안 아프게 되면 아빠가 돌아온다고 했거든요. 제발...”
뚝! 화면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짧고도 단순한 메시지. 하지만 글록은 꺼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슴 안쪽 어딘가, 단단했던 감정 알고리즘에 실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글록.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에요. 미래를 예감한 누군가가 남긴 ‘감정의 유산’입니다.”
알파-3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글록은 말없이 포터블을 챙겨 일어섰다.
“가자. 인류가 사라진 진짜 이유를 찾아야겠어.”
두 존재는 어둠이 깊게 깔린 폐허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늘 위, 100년 전부터 멈춰버린 시계태엽이 다시금 기괴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Log : 10,002번째 관찰 시작
대상 : 인류의 마지막 흔적
새로운 루프가,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