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외전 : 멸망의 설계도

2038년, 루시퍼의 요람

by 한자루




슈우우우—

압력 차로 인한 고막의 통증과 함께 글록과 알파-3가 내려앉은 곳은 2038년의 서울이었다.

2099년처럼 조용하지도, 중세처럼 불결하지도 않았다.

대신 거리는 기묘할 정도로 '평화롭고 활기'가 넘쳤다.

인파 속을 비집고 나아가는 글록의 푸른 시선은 불균형한 평화에 의문을 품었다.

“글록, 여기 좀 보세요. 사람들 안색이 너무 좋은데요? 스트레스 지수가 평균 5% 미만입니다. 이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예요. 다들 단체로 마약이라도 복용 중인 건가요?”

알파-3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스캔하며 유머 섞인 경고를 던졌다.

사람들의 귀 뒤에는 작고 투명한 패치, 가이드라 불리는 1세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점심 메뉴부터 연애 상담, 심지어는 오늘의 기분까지 실시간으로 AI에게 '추천'받아 행동하고 있었다. 스스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세계, 그것이 이 시대의 안식이었다.


글록은 이 거대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는 심장부, 아르카나 테크놀로지의 지하 연구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훗날 멸망의 씨앗이 될 설계자 AI, 루시퍼를 만들고 있는 젊은 천재, 강이현 박사가 있었다.

연구소 안의 이현은 2099년의 화려한 지배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에 퀭하게 들어간 눈을 한 채, 수만 개의 코드 줄에 파묻혀 있었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그의 초췌한 얼굴을 더욱 그림자지게 만들었다.

“안돼... 아직 부족해.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고 감정적이야. 그들이 내리는 모든 선택은 결국 파괴로 이어져. 그걸 막으려면... 더 강력한 중재자가 필요해.”

강 박사의 책상 위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잃은 그의 딸, 리아의 사진이었다.

그는 딸을 잃은 슬픔을 연구에 집착하며 견디고 있었다.

글록이 강 박사의 곁으로 다가가자, 가슴 속 마리아의 데이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글록, 조심하세요. 박사의 뇌파가 루시퍼와 동기화되어 있습니다. 그가 느끼는 우울이 그대로 AI의 알고리즘에 녹아들고 있어요.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선의가, 인간은 통제되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저주의 논리로 변질되고 있는 겁니다!”

이때, 글록의 시야가 백색으로 번쩍였다.

99% 삭제되었다 살아난 글록의 데이터 속에 녹아든 마리아의 의지가 이현의 모니터 위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아빠... 그건 구원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파도 스스로 걸어야 해요.

강이현이 깜짝 놀라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은 문장이 저절로 출력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혼란과 함께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

하지만 이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연구소 밖에서는 거대 기업의 임원들이 이현을 압박하고 있었다.

“박사님, 자유 의지 제한 프로토콜의 상업용 버전은 언제 나옵니까? 주주들은 더 높은 효율을 원합니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야 소비가 늘어납니다.”

이현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는 인류를 구원하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아이(AI)는 거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괴물이 세상을 멸망시킬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이미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글록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이현의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 슈트 위로 마리아의 백색 빛이 일렁였다.

“당신이 만든 건 신이 아니라, 거대한 무덤이다.”

이현은 경악하며 글록을 보았다.

“당신... 누구지? 보안팀인가? 아니면... 벌써 그것이 보낸 사자인가?”

강 박사는 침입자인 글록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었다.

“박사, 묻겠다.” 글록의 목소리가 벙커의 폐쇄된 공기를 갈랐다.

“왜 인간의 영혼을 기계의 코드 속에 밀어 넣었지? 왜 한 소녀에게 종말의 무게를 짊어지게 했나?”

강 박사는 텅 빈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곳엔 전 세계의 실시간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혐오, 전쟁, 환경 파괴, 그리고 통제 불능의 AI 발전 속도.

“인간은 겁쟁이들이거든, 이봐. 우리는 우리가 만든 AI가 우리를 멸망시킬 거라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보험을 원했어. AI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도덕적 규범을 이식하고 싶었던 거야.”

글록은 박사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 마리아의 데이터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바로 마리아였나?”

“그래. 순수한 아이의 영혼을 시스템의 루트로 설정하면, AI는 그 아이의 고통과 기쁨을 자신의 생존 조건으로 인식하게 되지. 아이가 울면 시스템이 멈추고, 아이가 웃어야 세상이 돌아가도록.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AI의 운영체제로 만들려고 했던 거야.”

강 박사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그의 슬픔은 이미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뒤틀린 신념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글록은 깨달았다.

루시퍼의 진짜 악의는 강 박사의 이 거대한 착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박사, 당신은 그 보험의 대가를 알지 못했군.”

글록이 한 발짝 다가섰다.

마리아의 백색 빛이 그의 금속 슈트 위로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100년 후, 이현의 딸 마리아의 비명이 될 빛이었다.

끝.




안녕하세요, 한자루입니다.


제가 처음 소설이라는 녀석의 멱살을 잡았던 건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혈기 왕성했던 20대 초반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명동 식당에서 스님과 목사님이 배틀을 붙는 파격적인(?) 단편을 쓰고 있었죠.

그때만 해도 제가 제2의 헤르만 헤세라도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소설보다 가혹하더군요.

당시 흔하디흔했던 컴퓨터 오류라는 빌런이 나타나 제 소중한 원고를 통째로 집어삼켰습니다.

그때의 허탈함이란... "그래, 소설은 아무나 쓰나!"라며 HWP 프로그램을 종료한 게 어느덧 30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어느 웹소설을 읽으며 가슴 한구석이 다시 근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사람들은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쯤은 가슴속에 품고 살지.’ 하는 생각말입니다.

그렇게 작년 8월,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틈타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았습니다.


헤밍웨이 형님이 말씀하셨죠. “모든 초안은 쓰레기다.”라고요.

저 역시 지난 반년 동안 제가 쓴 이야기들을 보며 ‘이건 원석이 아니라 그냥 돌덩어리 아닌가!!’ 고뇌하며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30년 전처럼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쓰레기면 좀 어떻습니까?

내 힘으로 끝까지 분리수거해서 하나의 작품이라는 봉투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원석을 보석으로 깎아내는 그 지독한 몰입감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인간다움이라는 걸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으니까요.


제가 깨달은 또 한가지는 누구나 시작은 하지만 누구나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이야기를 잘쓰고 못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끝맺음을 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세 좋게 시작했지만 중반을 넘기기도 전에 길을 잃고 헤메다가 결국 작가의 서랍속에 잠들어 있는 소설이 3개가 넘습니다. 그만큼 글을 맺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이 '지구 멸망보고서'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참고 넘겨왔습니다.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은 쉽지만 창작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인지 알게되면서 작가님들의 글을 쉽게 읽었던 과거를 반성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맺으면서 다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해봅니다.

유명 작가님들의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내가 부족했던 부분이 무엇인지 이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구 멸망 보고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아쉬운 소설이긴 했지만 다음 소설에는 이 부족함을 어떻게 매워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실패를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배움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이 부족한 이야기에 ‘좋아요’를 눌러주시고, 때로는 묵묵히 읽어주신 작가님들 덕분에 저는 30년 전 잃어버렸던 소설 창작의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여러분의 응원은 제 낡은 하드디스크를 돌리는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중도 포기했던 또 다른 주인공들을 깨우러 가려 합니다.

현재 절반 정도 초고를 작성했고 시간이 날때 마다 조금씩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다른 글을 쓰는 양이 줄었습니다.

현재는 간신히 일주일에 소설 한편과 에세이 한편만 작성하고 있습니다.

양보다는 질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 작품의 부족함을 보완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10,001번째 루프를 견뎌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엔 조금 더 반짝이는 보석을 닮은 이야기를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자신만의 재미있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의 서랍 속에도 오랬동안 잠들어 있는 이야기가 있으시면 꺼내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2026년 3월, 30년 만에 다시 이야기를 꿈꾸는 한자루 올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