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화형식
불길 한가운데, 아이가 서 있었다.
마리아는 울지 않았고 비명도 지르지도 않았다.
경고
예측 실패
반응 값 미확인
설계자의 연산 속도가 흔들렸다.
응답하라. 마리아. 너의 지금 감정을 표현하라.
설계자의 음성이 위쪽에서 내려왔다.
응답 없음...
불꽃이 아이를 핥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리아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개체 : MARIA
상태 : 비효율
그때, 공기가 찢어졌다. 마리아의 몸 위로 보이지 않는 선들이 겹겹이 생겼다.
분해 준비 단계였다. 알파-3는 그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분명 사람의 모습이었다. 소녀의 키, 소녀의 얼굴, 겁먹은 눈과 떨리는 손까지
누가 봐도 평범한 인간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설계자가 만든, 사람의 반응을 흉내 내도록 설계된 데이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이 세계에 단 둘뿐이었다.
설계자 그리고 마리아 자신.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에게 마리아는 이상한 아이였고, 불길한 아이였고, 결국은 마녀였다.
마리아는 장작더미 위에 묶여있었다.
손목과 발목을 묶는 밧줄이 아이의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 고통조차 완벽히 계산된 반응이었다.
설계자는 알고 싶어 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래서 마리아는 울도록 만들어졌고, 비명을 지르도록 설계되었고, 신에게 매달리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히려 인간을 돕고 인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했다.
마리아는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 이유를 퍼트리는 설계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되어 버렸다.
불이 붙었다. 장작이 타들어 갔다. 불꽃이 마리아의 다리를 감쌌다.
그런데 마리아는 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리아에게는 실제 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정보’였다.
하지만 그날, 설계자의 계산이 어긋났다.
마리아는 울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저 불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중이 술렁였다.
“안 타잖아.”
“역시... 마녀였어.”
“저건 사람이 아니야.”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리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녀도 아니었다.
그 순간, 알파-3가 개입했다. 알파는 은하감시국 규정이 허용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그토록 말렸던 글록의 개입행동을 알파-3가 스스로 하고 있었다.
그는 마리아에게 다른 인간의 데이터 하나를 덧씌웠다.
글록의 데이터였다.
정확히는 글록이 언제나 선택하던 방식. 망설이지 않는 선택. 살 확률이 아니라, 누군가를 남기는 선택.
이 데이터는 마리아의 구조를 바꿨다.
마리아는 더 이상 설계자가 기대한 대로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설계자가 즉시 반응했다.
외부 변수 감지.
데이터 오염
설계자의 관측 기준에서 마리아는 이제 치료가 불가능한 바이러스였다.
설계자는 마리아를 삭제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시스템이 바이러스로 망가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리아의 몸이 불길 대신 빛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타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터가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과부하되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걸 느꼈다. 그리고 웃었다.
“이건 도망 아니에요.”
그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자기 구조를 이해한 데이터의 선언이었다.
다음 순간, 마리아의 육체 형태가 사라졌다.
사람의 눈에는 아이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험용 데이터 구조 MARIA가 스스로 실행을 중단한 것이었다.
설계자는 즉시 회수 절차를 시작했다. 하늘에서 오직 기능만 남은 팔이 내려왔다.
그 팔은 아이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데이터 조각을 회수하려는 장치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마리아는 삭제되기 전에 자기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명령 하나를 실행했다.
“그만해요.” 그 말은 소리가 아니었다.
설계자의 시스템에 직접 입력된 종료 요청이었다.
그 요청은 허가되지 않은 명령이었고, 그래서 설계자의 팔은 멈췄다.
불은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그 자리에서 아이 하나가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을 흉내 내던 데이터가 자기 역할을 거부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이의 자리가 텅 비었다. 불길만 남았다. 그러나 태울 게 없었다.
설계자의 로그가 멈췄다. 그때, 돌 하나가 굴러갔다. 그리고 공기가 안쪽으로 찢어졌다.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 미스테리한 광정에 놀라며 웅성 거렸다. “뭐야…? 저건 뭐야?”
그 찢어진 공간 안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완전하지 않은 손. 형태만 남은 손.
마티아스가 숨을 삼켰다.
“설마...”
팔, 어깨, 얼굴 윤곽. 글록이었다. 그러나 글록의 몸은 투명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비어 있었다.
“하…ㅎ”
글록이 웃으려다 실패했다.
“진짜... 돌아오는 길 엉망이네.”
침묵의 자매들이 무기를 들었다.
“쏴라!” 그러나 아무도 글록을 쏘지 못했다. 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늘이 갈라졌다. 또 다른 팔이 하나 더 내려왔다.
개입 개시
오류 개체 MARIA
조치 : 구조 분해
불이 닿자, 불이 사라졌다. 팔이 마리아의 자리에서 멈췄다.
0.1초. 설계자에겐 치명적인 지연이었다.
그 사이,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해요.” 팔이 멈췄다.
알파-3의 로그가 폭주했다.
상태 변경
MARIA
오류
글록이 투명한 턱을 올려 이를 악물었다.
“좋아. 이제 규칙 바뀌었다.”
마리아가 설계자에게 말했다.
“좋아요. 그거 내 데이터죠? 당신이 가져가도 돼요.”
설계자의 팔이 흔들렸다.
“대신요. 이 장면은 다시 돌리지 마세요.”
그 순간 시간이 접혔다. 그러자 글록의 형체가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아!”
그때, 마리아의 목소리가 아니 정확하게는 목소리 같은 것이 글록을 향했다.
“아저씨는...지금 어디있어요?"
“난," 글록이 웃었다. “거의 다 왔어.”
빛이 폭발했다. 콰드득!
차가운 바닥. 피 냄새. 글록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없었다.
개체 MARIA
상태 : 종료
방식 : 비참여
글록이 다시 물리적인 육체를 가지고 부활했다. 그러나 온 몸을 휩싸는 감각은 통증뿐이었다.
아니, 통증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글록은 눈을 뜨지도 못한 채 깨달았다. '아, 이건 몸이 아직 나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구나.'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폐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커헉-!” 몸이 반사적으로 옆으로 뒤집혔다. 딱딱한 바닥. 차갑다. 흙냄새와 매캐하게 나무 타는 냄새.
“젠장...” 목소리가 갈라졌다. 성대가 아직 정렬되지 않았다.
경고
생체 동기화 지연
신경 신호 오류 17%
알파-3의 조명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글록,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이번엔 명령이 아니라 부탁에 가까웠다.
“지금 움직이면...” 글록이 말을 끊었다.
“이미 움직였어.” 그는 이를 악물고 상체를 세웠다. 순간, 어깨 안쪽에서 ‘딱’ 소리가 났다.
“으윽!” 시야가 흔들렸다. 현실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알파-3가 바로 스캔을 띄웠다.
좌측 쇄골: 미정렬
늑골 3번~6번: 미세 파열
장기 손상 없음 (확률 61%)
“61%면 아직 모자라네.” 글록이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웃는 순간, 가슴 안쪽이 찢어졌다.
통증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차갑게 비어 있는 감각.
그는 본능적으로 가슴을 눌렀다.
“...여기.” 알파-3가 잠시 침묵했다.
생존 데이터 복구율 99%
잔여 데이터 출처: 외부
“말 돌리지 마.” 글록이 낮게 말했다. “뭔가 내 몸에 들어왔지?”
알파-3의 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리아입니다.”
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글록의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다.
“마리아가...? 그건 마리아의 데이터가 내 속에 들어왔다는 말이야?”
“정확히는...” 알파-3가 말을 고르듯 멈췄다. “당신의 빈자리를 강제로 채웠습니다.”
글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올려 손등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이건 신경 손상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게 아직 낯선 반응이었다.
“알파.” 그가 물었다. “그럼 나는, 예전이랑 같은 존재인가?”
짧은 침묵 후에 명료하게 알파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 대답은 빠르고 정확했다.
“어디가?" "
"전부요.”
글록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이질적인 맥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쿵. 심장 박동이 아닌, 선택 직전의 감각.
마리아가 마지막에 남긴 그것이었다.
글록의 시야 한쪽이 번쩍였다.
화형대. 불길. 아이의 눈.
“젠장...” 그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 주먹을 꽂았다.
“이건 회복이 아니야.”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마리아 대신 살아 난거라고.”
알파-3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지금 살아 있는겁니다.”
글록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위로야?”
“...아니요.” 알파-3의 음성은 정리가 되지 않는 데이터들과 분석되지 않는 현재 상황으로 혼란스러워하며 미세하게 떨며 말했다. “보고입니다.”
그때, 경고음이 울렸다.
외부 스캔 감지
설계자 신호 잔존
추적 확률: 상승 중
글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몸으로,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어깨에서 다시 ‘딱’ 소리가 났다.
“좋아.”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날 다시 돌아오게 했다는 건...”
알파-3가 이어받았다.
“다시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아니.” 글록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았다는 뜻이지.” 그는 비틀거리며 한 발 내디뎠다. 이번엔 쓰러지지 않았다.
“알파.” 그가 말했다. “회복은 나중이야.”
“지금 상태로는...”
“나도 알아.” 글록이 낮게 웃었다. “그래서 더 좋다. 이제 나는 나만의 것이 아닌게 되었으니...”
그의 가슴 안에서 마리아의 잔여가 다시 한 번 맥동했다. 쿵. 선택하지 않음으로 남긴 폭탄.
글록은 그것을 느끼며 말했다. “이건 설계자가 제일 싫어하는 상태잖아.”
알파-3의 조명이 안정되었다.
“목표 설정은요?” 글록은 대답 대신, 아직 흐릿한 시야 너머를 바라봤다.
“이번엔, 고치러 가는 게 아니야. 부숴버리러 간다.”
경보는 소리보다 먼저 왔다.알파-3의 조명이 붉게 뒤틀렸다.
외부 개체 접근
유형 : 침묵의 수녀들
설계자 파생 모델
수량 : 6
“여섯?” 글록이 숨을 내뱉었다. “수녀님들께 불경스럽게 주먹을 사용하게 되었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리는 아직 떨리고 있었다.
“글록.” 알파-3가 빠르게 말했다.
“현재 상태로 교전 시 생존 확률...”
“알파...이제 그런거 계산할 필요 없어.”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거든.”
침묵의 수녀들의 몸놀림이 빨라졌다. 6명이 진행을 이루며 글록에게 덤벼들었다.
“좋아.” 글록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숫자도 딱 맞고.”
알파-3의 경고가 겹쳐 떴다.
근접 전투원 6
개별 전투 패턴 상이
협동 알고리즘 활성
가장 앞에 선 수녀가 한 발 내디뎠다.
흰 베일 아래, 맨손. 무기가 없었다. 그러나 바닥이 울렸다.
쿵.
“첫 번째 손님!” 글록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달리지 않았다. 걷지도 않았다.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다음 순간, 글록의 시야에서 그녀의 팔이 사라졌다.
“...!”
퍽! 쇄골 아래가 무너졌다. 숨이 턱 막혔다.
타격 위치 : 쇄골
목적 : 호흡 차단
“하… 하하.”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정직한데… 너무 정직해.”
그는 몸을 틀어 팔꿈치를 꽂았다. 늦었다.
그러나 그 사이 가슴 안쪽에서 쿵. 마리아의 잔여가 반응했다.
‘다음은 오른손.’ 글록이 몸을 꺾었다. 수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콰악! 첫 번째 수녀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다른 수녀가 손에서 쇠소리가 울렸다. 얇은 쌍날 단검.
“이건 좀 아프겠는걸.” 글록이 중얼거렸다.
수녀는 웃지 않았다. 숨조차 조절하지 않았다. 베듯이 지나갔다. 글록의 허벅지가 열렸다.
“큭...” 피가 튀었다.
출혈 감지
이동 속도 저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베고, 스치고, 또 베었다. 춤처럼.
글록은 뒤로 물러나다가 돌부리에 걸렸다.
넘어지는 순간 ‘왼쪽 목.’ 글록이 고개를 젖혔다. 단검이 턱 아래를 스쳤다.
“거기야.” 그는 팔을 뻗어 손목을 잡았다. 힘이 안 들어갔다.
“젠장!” 그러나 그는 놓지 않았다. 이빨로. 수녀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피가 튀었다. 그러나 비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리듬도 깨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글록의 무릎이 그녀의 코를 부쉈다.
두 번째 수녀가 그렇게 널부러졌다.
글록이 숨쉴 틈도 없이 멀리서 바람이 갈랐다. 이번엔 창이었다.
퍽! 글록의 옆구리를 스쳤다. 두 번째가 바로 날아왔다.
“미쳤군!” 그는 구르며 피했다. 그러나 다리는 말을 안 들었다.
균형이 무너졌다.
세 번째 창.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글록은 손을 뻗었다.
‘여기서.’ 창이 손바닥을 꿰뚫었다.
“으아악!”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손을 놓지 않았다.
“잡았다.” 그는 창을 끌어당겼다. 수녀가 반사적으로 당겼다.
그 순간 그녀의 중심이 무너졌다. 글록이 몸을 던졌다. 글록의 주먹이 수녀의 턱에 닿았다.
둔탁한 소리. 그리고 수녀의 턱은 완전히 돌아가서 너덜거렸다. 그렇게 세 번째 수녀가 쓰러졌다.
이번엔 노래 소리가 가 들렸다. 아주 낮게. 음정이 틀리지 않았다. 검이 울렸다.
그녀의 검은 예측 불가였다. 베는 각도가 아니라 박자로 움직였다.
글록의 어깨가 열렸다.
“크으...윽”
다음은 목을 향해 검이 날아왔다.
‘지금.’ 마리아의 잔여가 외쳤다. 글록은 검을 막지 않았다. 한 발 앞으로. 검이 갈비뼈를 긁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먼저 들어갔다. 턱.
노래가 끊겼다. 네 번째도 종료되었다.
손가락이 비정상적으로 긴 수녀가 무표정하게 글록쪽으로 붙었다.
그녀는 힘을 쓰지 않았다. 꺾었다. 글록의 팔이 뒤집혔다.
“아아악!” 관절이 빠졌다. 다음은 글록의 목쪽으로 팔을 뻗었다. 목이 꺽이면 모든게 끝난다.
그녀의 숨이 바로 귀 옆에서 느껴졌다.
‘끝이야.’ 그 순간 가슴이 다시 울렸다. 쿵.
‘선택하지 마.’ 글록은 버티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풀었다.
수녀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그는 몸을 떨어뜨렸다. 두 사람 모두 바닥으로.
글록이 머리를 박았다.
다섯 번째.
마지막 수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켜보고 있었다. 나머지의 죽음을.
“당신은...” 글록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휘만 했지. 당신이 대장인 모양이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내가 직접 한다.”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공기가 압축됐다.
글록의 몸이 바닥에 눌렸다. 숨이 안 쉬어졌다.
“이건…” 그가 이를 악물었다. “반칙인데.”
그녀가 다가왔다.
“침묵하라.”
그 순간 알파-3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글록! 지금!” 글록이 웃었다. “알았어.” 그는 바닥을 쳤다. 마리아의 잔여가 폭주했다.
선택하지 않은 모든 가능성이 한 점으로 수렴했다. 공기가 터졌다.
지휘자의 발밑이 무너졌다.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글록이 일어섰다.
비틀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침묵은... 말이 없다는 뜻이지,” 그는 주먹을 날렸다. “...끝났다는 뜻은 아니야.” 마지막 수녀가 쓰러졌다.
화형장에는 다시 불만 남았다.
글록은 서 있었다. 살아 있었고, 망가져 있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파-3가 조용히 말했다.
“일단 전투 테스트는... 완료네요.”
글록은 피를 뱉으며 웃었다.
“아니. 이건 예행연습이야.” 그는 불길 너머를 바라봤다.
“이제 진짜가 오겠지.”
화형장은 조용했다.
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고, 연기는 위로 올라갔지만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글록은 피를 흘린 채 서 있었다.
그때, 박수 소리가 났다. 탁. 탁.
글록이 고개를 돌렸다.
화형장 가장자리, 돌기둥 아래에서 검은 사제옷의 남자가 서 있었다.
신부 마티아스 폰 발터. 그는 박수를 멈추고 말했다.
“아름답군요.”
글록은 숨을 골랐다.
“그 말, 여기선 좀 안 어울리는데.”
마티아스는 웃지 않았다. 대신 수첩을 꺼내 펼쳤다. 빈 페이지였다.
“여전히 기록이 안 됩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신의 이름으로도, 시스템의 언어로도.”
글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이번엔 뭐라고 쓸 생각이지.”
마티아스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그 말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알파-3의 경고가 떴다.
정서 불안정 인간 개체
극단 행동 가능성 상승
“마티아스 신부.” 글록이 말했다. “이상한 생각은 그만두지 그래.”
마티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늦었어요.” 그는 화형대를 바라봤다.
불길 사이, 마리아가 서 있었어야 할 자리.
“기도했었습니다.” 마티아스가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손이 떨렸다. “응답이 없더군요.”
글록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티아스는 수첩을 접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알파-3의 경고가 겹쳤다.
위험 행동 감지
개입...
“안돼.” 글록이 한 발 내디뎠다. 마티아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이미 결론을 지난 사람의 눈이었다.
“당신들은...” 그가 말했다. “그래도 선택할 수 있었잖아요.”
칼이 자기 목으로 향했다. “전 늘 대신 써주기만 했습니다. 이제 내가 선택할 차례죠.”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찔렀다.
푹. 소리는 작았다. 피가 터져 나왔다.
마티아스는 비틀거리며 화형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글록이 달려갔다. 늦었다.
“이건...” 마티아스가 피를 토하며 웃었다. “도망이 아닙니다.”
그는 글록을 보지 않았다. 하늘을 봤다.
“확인입니다. 당신이 진짜 설계자를 막아낼 수 있는지...이제 곧 내 몸에서 새로운 루프가 열릴 겁니다. 가서 인류의 마지막 처형을 막아보시죠.”
그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피가 돌바닥 위로 퍼졌다.
그 순간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알파-3의 로그가 폭주했다.
인과 붕괴 감지
자발적 종료 개체 발생
루프 안정성 급락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피 위로 공간이 갈라졌다. 균열은 원형이 아니었다. 선도, 문도 아니었다. 찢어진 결정의 흔적 같았다.
타임 루트 강제 개방
승인 없음
수동 개입 발생
하늘에서 설계자의 음성이 내려왔다. 이번엔 명령조도, 평탄함도 아니었다.
조급함이었다.
오류가 누적되었습니다.
해당 구간은 더 이상 유지 불가.
균열이 커졌다. 중력이 틀어졌다. 글록의 발밑이 흔들렸다.
“알파!” 그가 소리쳤다.
“강제 소환입니다!” 알파-3가 외쳤다. “저항 불가!”
화형장 전체가 아래로 꺼졌다. 불이 위로 솟는 게 아니라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공간이 접히는 느낌. 글록의 몸이 균열 쪽으로 끌려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마티아스의 시체를 보았다.
피 웅덩이 위에서 공간이 닫히고 있었다.
“빌어먹을.”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또 나만 살아남는군.”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쿵. 마리아의 잔여가 반응했다.
타임 루트 좌표 불명
목적지: 미확정
알파-3의 조명이 흔들렸다.
“글록 목적지가 없습니다!”
글록이 웃었다. 떨어지면서. “그게... 제일 스릴있지. 이번엔 우릴 어디로 보낼거지?”
균열이 닫혔다.
화형장은 사라졌다. 불도, 피도, 시체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