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선택하지 않을 자유

설계자의 개입

by 한자루




글록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마을 사람들의 앞을 가로 막으려했다.

하지만 침묵의 수녀들은 소리 없는 기도문을 읊조리며 글록의 사지를 붙잡았다.

그녀들의 손길은 차가운 금속 같았고, 몸에서는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건조한 전선 타는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안 돼! 마리아!”

글록의 손끝이 마리아의 옷자락을 스쳤으나,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글록은 바닥을 뒹굴며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에게 들려 나가는 마리아의 절규를 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중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인류의 마지막 비명이자, 신이 아닌 시스템에 의해 편집된 비극의 시작이었다.


2분18초

글록의 숨이 갈라졌다. 폐 속에서 공기가 아니라 시간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알파-3의 경고는 이미 숫자가 아닌 노이즈로 변해 있었다.

“글록... 이 상태로 개입하면 당신의 남은 시간이 더 빠르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알아.”
글록이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는 멀어져가는 마리아를 보았다.

아이는 떨고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글록은 결정을 내렸다.


"알파! 보호 프로토콜. 루프 안전장치. 신체 보존 한계 모두 꺼주겠어?"

알파-3가 외쳤다.

“글록! 그건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건 글록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고요!”

“괜찮아.” 글록은 웃었다. “이번엔...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시간이 찢어졌다. 주변이 느려졌다.

아니, 글록만 빨라졌다. 그는 마리아를 끌고 화형장으로 가는 사람들 쪽으로 돌진했다.

침묵의 수녀들의 움직임이 마치 물속처럼 늘어졌다.

수녀들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손과 발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지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쇠사슬과 꼬챙이들을 부러뜨리고,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마리아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설계자의 음성이 직접 개입했다.

[경고. 비허가 개체 개입. 개체 글록, 삭제 우선순위 상향.]

글록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2분02초

글록의 피가 입에서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리아.”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잘 들어.” 아이의 눈이 그를 향했다.

“조금 있으면 아저씨가 여기 없을 수도 있어.”

“싫어요.” 마리아가 말했다. “나를 혼자 두지 마세요.”

글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네가 남아야 해.”

그는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딪쳤다. 아주 짧게.

“기억해. 네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글록에게 달려들다가 갑자기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글록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티아스의 눈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건...” 그가 중얼거렸다. “기록에 없는 변수군.”

50초

글록의 시야 우측 하단의 붉은 숫자가 마지막으로 깜빡였다.

글록은 그 숫자를 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남겨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폐가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흑사병의 독소가 아니라, 루프 보호 장치가 꺼진 몸이 공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알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부터... 나에 대한 기록을 지워.”

알파-3의 형체가 흔들렸다. 계산이 아니라, 망설임에 가까운 지연이었다.

'그럴 경우 글록... 당신의 개체 안정성은...'

“괜찮아.” 글록이 말을 잘랐다. “이미 충분히 남겼어.”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마리아를 바라봤다.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피투성이의 중세 남자도, 미래에서 온 이방인도 아닌, 그저 ‘지켜보는 어른’ 하나일 뿐이었다.

“마리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잘 들어.”

글록의 목소리는 더 이상 명령이 아니었다. 가르침도 아니었다.

“누가 널 신의 이름으로 부르면, 한 번만 더 생각해.” 마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신의 이름이 아닌 너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31초

글록의 오른손이 투명해지다 못해 거의 사라졌다. 피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미가 먼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알파-3의 경고음이 낮게 울렸다.

'글록... 지금 중단하면 귀환 가능성이...'

“아니.” 글록은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이번엔 마리아 대신 내가 남아야 해.”

그는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닿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분명히 느꼈다.

어떤 말보다 먼저 도착한 것.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

10초

글록의 형체가 공기 속에서 풀어지기 시작했다. 빛도, 먼지도 아니었다.

마치 시간이 그를 기억하는 걸 포기하는 것처럼.

“아저씨…?” 마리아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이름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1초

알파-3의 기록 로그에 마지막 문장이 생성되었다.

개체 : GLOCK- 9
상태 : 기록 종료

글록이 사라졌다. 마치 자연 발화라도 된듯이 화염 속에서 비명도, 섬광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공기 속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직 식지 않은 체온만이 남아 있었다.

침묵의 자매들이 동시에 멈췄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훈련된 동작으로 주위를 확인했지만 포획 실패라는 개념이 그들의 프로토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상은?” 자매 중 하나가 낮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마티아스 폰 발터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다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톤이었다.

“루프의 관찰자라... 결국 여기까지군.”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침묵의 자매들이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를 시작하자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저 아이를 데려가라!”고 외쳤다.

알파-3는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저 마리아가 잡혀가는 풍경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글록의 내부 기록이 삭제되던 타이머가 지연되고 있었다.

알파-3는 이해하지 못했다. 글록은 사라졌어야 했다. 그런데 삭제가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광장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나무 기둥은 중앙에 세워져 있었고, 기둥 주위로 마른 장작과 송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연기가 나기 전부터, 공기에는 이미 불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종이 울렸다. 화형식의 진행을 알리는 소리였다.

마리아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광장 중앙에 있는 기둥에 묶여졌다.

군중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누군가는 소녀를 보며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끝까지 쳐다봤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쥐었고, 누군가는 돌을 들었다.

그 모든 행동은 제각각이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다.”


마티아스 폰 발터는 화형장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마리아에게 고정돼 있었다. 연민도, 분노도 없었다.
그 눈에는 오직 확인해야 할 값만이 있었다.

'이 아이는 선택받지 않았다.' 그가 낮게 말했다. '그저... 남겨졌을 뿐이다. 나처럼.'

마리아는 기둥에 묶인 채 주변을 바라보았다.

불타오를 장작보다 사람들의 눈총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그 순간, 마리아는 깨달았다. 이곳에는 구해줄 사람도 도망칠 길도 기적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선택은 아직 남아 있었다.


드디어 불씨가 던져졌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두 번째 불씨가 닿았을 때 장작 사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그때였다. 마리아의 숨이 멎었다. 아니, 멎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췄다.

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길 너머에서 마티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불은 타고 있었다. 분명히.

장작은 갈라지며 소리를 냈고, 송진은 끓어오르며 검은 연기를 토했다.

그러나 화형대의 중심은 마치 다른 법칙에 속한 것처럼 비어 있었다.

마리아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몸을 둘러싼 공기가 흔들렸다. 불꽃이 휘청였다.

연기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보았다.


연기가 그녀의 얼굴을 스쳤지만, 기침도 하지 않았다.

불꽃이 허리까지 번졌지만, 피부는 그을리지 않았다. 군중이 동시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지? 왜 안 타?”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질문은 기도도, 고발도 아닌 불안의 문장이었다.

“신부님!” 앞줄에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불이... 저 아이...타지 않습니다!”

마티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불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확신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곧 여기 저기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신경질적인 웃음.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마주한 자들의 헛웃음이었다.

“하하... 역시 마녀였군.”

“그래서 불에 안타는거지.”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누군가 돌을 던졌다.

그러나 돌은 마리아에 닿지 않았다. 불길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장면이 결정적이었다. 군중의 질서가 무너졌다.

“저 아이는 진짜 마녀다.”

“저 아이가 저주를 퍼뜨리고 있어!”

“신이 시험하는 거야! 장작을 더 집어 넣어!”

하나 둘씩 돌이 날아들었고 횃불이 추가로 던져졌다. 누군가는 장작을 더 끌어다 쌓았다.

이제 화형은 처형이 아니었다. 공포를 누르기 위한 폭동이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불길은 그녀의 옷자락을 핥고 지나갈 뿐, 피부 한 점 태우지 못했다.

그녀는 불꽃 너머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인간들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공포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길이 일렁이는 소리 사이로 소녀의 목소리가 얼음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아저씨, 아주머니...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건가요?”

그 한 마디에 광기 어린 함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내가 타 죽어야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구원을 얻는 건가요?”

소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귓가에 정교하게 박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던진 돌과 횃불의 무게에 짓눌린 듯, 군중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 여러분이 보신 그대로 입니다. 저 아이는 신의 오류 조각입니다. 이제 신은 저 오류를 직접 심판하실 것입니다. 잠잠히 기다리세요.”

그러나 마티아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기억했다. 기도하던 자신을.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던 그 날을.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던 그 밤을.

그 결론이 지금 이 아이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비명도 없이.

그 눈은 기적을 기대하는 눈이 아니었다. 신의 심판을 기다리는 눈도 아니었다.

“신부님,” 마리아가 말했다. "왜... 왜 스스로를 포기하시는거죠?"

마티아스는 대답해야 했다. 관리자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침묵의 자매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다 멈췄다.

프로토콜에 없는 행동이었다. 마티아스는 마리아를 보며 말했다.

“아니다. 나는 한번도 나 스스로를 포기한 적이 없다.”

군중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소녀의 질문에 분노했고 누군가는 마티아스 신부의 대답에 안도했다.

마티아스는 눈을 감았다. 아주 짧게. 그리고 다시 떴다.

그의 시선은 차가워져 있었다.


그때,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도 없이 목소리가 내려왔다.

신의 음성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분노도, 자비도 없었다.

그저 결론을 읽는 시스템의 음성이었다.

[개체 마리아. 당신의 상태는 지속 가능한 오류입니다.]

군중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저 불이 기적처럼 변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인류는 고통을 반복 생산하는 구조적 실패입니다. 당신의 존재는 그 실패를 연장할 뿐입니다.]

마리아의 발밑에서 화형대의 나무가 타지 않았다.

대신 나무의 의미가 먼저 사라졌다. 결박하던 밧줄이 섬유가 아니라 개념처럼 풀어졌다.

마리아의 몸이 불 속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마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연기 때문에가 아니라 무언가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서버로 들어오십시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통도, 죽음도, 두려움도 계산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이 그녀를 태우는 대신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마티아스 폰 발터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 순간 불꽃이 한 번 더 맥동했다.

그리고 마리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반응이 일어났다.

마리아의 눈에서 부터 각성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화형은 인간만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