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로 돌아가리라.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적이란 항상 그랬다.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순간은 언제나 조용한 합의 뒤에 찾아왔다.
천장이 먼저 울렸다. 돌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가 금이 가는 소리였다.
낡은 석회가루가 눈처럼 떨어졌고, 격리소의 벽에 새겨진 십자가들이 하나둘씩 균열을 일으켰다.
마리아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노이즈가 맥박처럼 뛰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때, 공기가 눌렸다.
숨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압착되는 느낌이었다.
우두득, 쾅!
습기를 머금어 부풀어 오른 육중한 참나무 문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고꾸라졌다.
거대한 무쇠 못들이 뽑혀 나가며 돌바닥에 부딪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문틈을 메웠던 역청이 열기에 녹아내려 검은 피처럼 바닥을 타고 흘러들었다.
“알파, 상태는.”
글록의 목소리는 쇳가루를 삼킨 듯 거칠었다.
나노 로봇이 신경계를 강제로 부팅시켰지만, 근육은 여전히 흑사병의 고열에 익어버린 고기 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외계인에게 지구인의 바이러스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시야 우측 구석, 묻은 먼지 뒤로 흐릿하게 명멸하는 붉은 숫자가 보였다.
'29분 42초.'
억지로 짜내어 빌려온, 죽음보다 짧은 유예 시간이었다.
“외부 개입 감지. 설계자의 집행 프로토콜과 인간 지휘 계층이 동시에 접근 중입니다.”
“마티아스겠군!”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폐가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문 너머에서 연기가 갈라지며 사람들이 들어왔다. 병사들이 아니었다. 갑옷도, 무기도 없었다.
검은 수도복. 얼굴을 반쯤 가린 베일. 손에는 횃불이 아니라 향로를 들고 있었다.
침묵의 자매들이었다.
알파-3는 빠른 속도로 정보를 검색했다. 그들은 공식 기록에 남지 않는다.
교황청의 문서에도, 수도회 명단에도 없다.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들이 다녀간 자리에는 언제나 사람이 줄어든다.
침묵의 자매들은 말하지 않는다. 설교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으며, 반박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이미 결정된 뒤”에만 나타난다.
전염병이 통제 불능이 되었을 때. 군중이 이유를 요구할 때. 그리고 신의 침묵이 더 이상 감당되지 않을 때.
그때, 자매들은 도착한다.
그들의 수도복은 검고 주름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베일 아래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색이 아니었다.
글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들은 믿는 자들이 아니다. 저들은 실행자다.
알파-3의 형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글록... 저 존재들은 생체 신호가 일관되지 않습니다. 심박, 호흡, 체온... 모두 인간 기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럼 뭐라는 거야?”
“종교적 인간을 모방한, 인터페이스에 가깝습니다.”
침묵의 자매들 중 하나가 향로를 흔들었다. 연기가 퍼지는 방식은 무작위가 아니었다.
원형. 대칭. 정확한 간격.
글록은 깨달았다. 이것은 중세의 의식이 아니다. 중세의 언어로 포장된 프로토콜이다.
자매들은 아이들을 데려간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 불에 타지 않은 아이. 기적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예외’들.
그때마다 사람들은 말했다.
“신이 데려가셨다.”, “천사가 선택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자매들은 신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이 응답하지 않는 자리를 대신 채우는 장치다.
그리고 그 장치의 주인은 늘 하나였다. 마티아스 폰 발터.
그는 설계자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했고, 자매들은 그것을 몸으로 실행했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한다.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같았다.
의심을 제거하고 공포를 정리하며 이야기를 하나로 수렴시킨다.
“마녀였다.”, “악마였다.”, “신의 뜻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안도한다. 이유를 얻었으니까.
마리아를 향해 다가오는 자매들의 손길은 기도보다 정확했고, 칼보다 조용했다.
글록은 그제야 이해했다. 이 싸움은 무력도, 기술도, 신앙도 아니었다.
이것은 ‘설명’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그리고 침묵의 자매들은 언제나 이긴 쪽의 설명만 남긴다.
침묵의 자매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간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무거워졌다.
“알파.” 글록이 낮게 물었다. “저건 인간이 아니지?”
“네. 인간의 생체 리듬이 약간은 있긴 하지만...” 알파-3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생체 반응 거의 없어요. 통증 반응 없음. 두려움 반응 없음. 그런데... 디지털 신호는 있습니다.”
“어디서?”
“위에서요.”
글록은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천장 틈 사이로, 보이지 않는 시선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노이즈가 마리아의 몸을 따라 번졌다. 아이의 머리칼이 중력에서 벗어나 천천히 떠올랐다.
“마리아!” 글록이 한 발 내디뎠다.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흔들렸다.
29분 00초.
“안 움직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연기 속에서 마티아스 폰 발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의 신체 상태로는, 세 걸음 이상은 무리겠군요.” 마티아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넌...” 글록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시간을 계산하고 있지요.”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언제 쓰러질지. 아이가 언제 스스로 선택할지. 그리고 이 장소가 언제 의미를 다할지.”
그는 마리아를 보았다. 눈빛은 연민도, 기쁨도 아니었다. 검증이었다.
“마리아.” 그가 조용히 불렀다.
소녀의 눈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의 사람들은 당신을 죽음의 원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공포가 충분히 쌓이면, 집행은 훨씬 수월해지지요.”
“집행이라니요?” 마리아가 작게 되물었다.
마티아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정리.” 그 한 단어에 격리소 안의 공기가 한 번 더 내려앉았다.
침묵의 자매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향로가 다시 흔들렸다.
그 순간, 보랏빛 연기가 퍼지며 알파-3의 형체가 크게 흔들렸다.
“알파! 괜찮나?”
“센서 간섭입니다! 이건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글록. 이건...”
연기가 의도적으로 배열되고 있었다. 원형. 제단을 중심으로 한 완벽한 패턴.
업로드 진입 조건이었다.
28분 12초.
글록의 손목에서 펄스 방출기가 간신히 전개됐다.
경고음. 출력 제한. 과열.
“마티아스!” 글록이 소리쳤다.
“네가 원하는 건 아이야! 그럼 나머진 풀어줘!”
마티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저 소녀가 아니라 증명입니다.”
“무엇의 증명이란 말이지?”
“인간은, 언제나 희망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희망을 포기하고 안도하는가.”
그 말과 동시에 격리소 바깥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녀를 내놔라!”, “악마에게 불을!”, “신의 뜻이다!”
마리아의 숨이 빨라졌다.
“아저씨...” 마리아가 글록을 보았다.
글록의 눈이 흔들렸다.
27분 01초.
알파-3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글록. 이제 선택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은 시간은 더욱 줄고 있었다. 붉은 숫자가 한 번 깜빡였다.
26분 50초
글록은 그 변화를 느꼈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었다.
초가 아니라, 사건 단위로 줄어들고 있었다.
침묵의 자매들은 완벽한 반원을 그리며 다가왔다. 숨소리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0.5초 늦게 멈췄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인간이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의 지연이었지만 글록은 보았다.
“알파.” 그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방금... 너도 봤지?”
알파-3의 빛이 순간적으로 노이즈를 튀겼다.
“네. 개체 S-07. 이동 동기화 오류 발생.”
개체 S-07이라 불리는 자매였다.
다른 자매들이 동시에 고개를 기울일 때, 그녀만은 좀 더 오래 마리아에게 시선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정말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속도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마리아가 움찔했다.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언니... 방금 울었어요.”
글록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라고?”
“조금 전에요.” 마리아는 손으로 가슴을 꼭 쥐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났지만... 언니가 울었어요.”
아이의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글록은 S-07이라 불리는 자매를 다시 보았다.
베일 아래, 완벽하게 정지해 있어야 할 얼굴.
그런데 그녀의 턱 아래로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피도, 기름도 아니었다. 염분이 섞인, 인간의 눈물과 거의 같은 성분의 무언가였다.
알파-3가 낮게 말했다.
“글록, 저 개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설계자의 명령어와 개인 기억 데이터가 충돌하고 있어요.”
“기억?”
“네.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삭제되지 않은... 아니, 삭제되지 못한 기억.”
그 수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른 자매들이 동시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26분 05초.
시간이 가속됐다. 글록은 결단했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접촉이다.
그는 마리아를 품에 더 끌어안고 그 자매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당신,” 그가 낮게 말했다. “이름이 있지요?”
수녀의 머리가 아주 조금 기울어졌다. 프로토콜에는 없는 반응.
“한 번이라도...”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그 순간 자매의 입술이 아주,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형태였다.
알파-3가 외쳤다.
“글록! 설계자가 개입을 감지했습니다! 오류 개체를 즉시 회수하려고 합니다!”
천장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마리아의 몸을 감싸던 푸른 노이즈가 폭풍처럼 요동쳤다.
그때 그 수녀가 갑자기 움직였다.
다른 자매들이 마리아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반대로, 마리아 앞에 섰다.
침묵의 규칙이 깨졌다.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분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아이는... 기록이 아니야.”
다음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23분 12초
설계자의 시선이 이제 확실히 이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글록은 알았다. 이 30분은 탈출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단 하나의 선택을 만들어낼 시간이라는 것을.
수녀의 몸이 경련처럼 떨렸다. 다른 침묵의 자매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완벽한 동기화. 완벽한 위협.
하지만 그녀만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아니 자신의 과거를 들키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알파-3의 음성이 낮아졌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해독이었다.
“글록, 개체 S-07의 데이터가 열리고 있습니다. 설계자의 보호 계층 아래에 있던 기억 조각이에요.”
자매의 베일 아래, 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글록의 시야가 개체 S-07의 시선과 겹쳐졌다.
불.
아니다. 화형대의 불이 아니다.
더 작고, 더 오래된 불. 촛불 하나. 습기 찬 돌벽.
기도문을 더듬는 아이의 입술. 검은 수녀복을 입고 있지만 작은 소녀였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열두 살 남짓의 아이가 수도원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님...” 아이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오늘은... 엄마가 숨을 안 쉬어요.”
대답은 없었다. 아이 옆에는 천에 덮인 작은 형체가 있었다. 아직 따뜻했지만, 이미 돌아오지 않을 체온.
그날 밤, 소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기록했다.
엄마가 기침한 횟수. 손이 식어간 시간. 마지막으로 눈을 깜빡인 순간.
그리고 다음 날 마티아스 폰 발터가 수도원에 왔다.
그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신은 너에게 무엇을 주셨지?” 소녀는 대답했다. “아무것도요.”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슬픔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확신만이 있었다.
“그럼, 네가 증인이 되면 좋겠구나.”
다시 격리소
자매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떨리는 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름이 있었어.”
다른 자매들이 동시에 한 걸음 전진했다.
알파-3가 외쳤다.
“글록! 오류 개체의 기억이 임계치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괜찮아.” 글록이 말했다. 아니, 그녀에게 말했다. “이름, 기억나요?”
자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안나.” 그 이름이 공간을 갈랐다.
안나. 침묵의 자매 S-07. 설계자의 이동식 집행 모듈.
그리고 흑사병으로 가족을 잃고 ‘신의 도구’로 선택된 인간.
안나는 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언니...!” 마리아가 속삭였다. “언니는 사람이 맞죠?”
그 질문은 설계자가 가장 싫어하는 형태였다. 정체성을 찾는 질문. 연산으로 처리할 수 없는 질문.
안나의 손이 떨리며 내려갔다.
“아니.” 그녀가 처음으로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 “하지만 사람은... 선택해야 해.”
그 순간 천장이 찢어졌다. 빛도, 불도 아니었다. 시선이었다. 설계자가 이제 직접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파-3의 카운트가 붉게 점멸했다.
22분 41초
그리고 글록은 알았다. 이 오류는 사고가 아니다.
설계자가 한 번도 계산하지 않았던 변수, ‘기억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낸 균열이라는 것을.
침묵의 자매들은 동시에 손을 뻗어 마리아를 잡았다.
그 순간, 안나의 손이 멈췄다. 이건 설명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오차였다.
침묵의 자매들은 동시에 움직여야 했다. 동시에 붙잡고, 동시에 봉인하고, 동시에 인계한다.
그런데 안나만이 마리아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
“안나.” 공간 어딘가에서, 음성이 아닌 규칙이 울렸다. “명령을 수행하라.”
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홍채 안쪽, 기계적 광택 아래에서 지워졌다고 믿었던 감정 데이터가 불규칙하게 튀었다.
“나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녀가 말했다. 인간처럼.
알파-3가 즉시 반응했다.
“글록! 시스템 동기화 실패! 침묵의 자매 S-07, 명령 실행 거부. 이건 설계자에 대한 항명입니다!”
글록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무릎이 휘청거렸지만,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마리아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다른 손으로 펄스 방출기의 잔여 출력을 강제로 밀어 올렸다.
“안나!” 그가 외쳤다. “지금이야! 선택할 순간이라고.”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두 개의 데이터가 겹쳐졌다.
하나는 설계자가 제시한 미래. 완벽한 정적. 고통 없는 서버. 의미 없는 평온.
다른 하나는 마리아의 손. 떨리고, 따뜻하고, 살아 있다는 이유로 불완전한 손.
“기록에는 없었어.” 안나가 중얼거렸다. “이런 온도는...”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안나는 마리아를 향해 다가가는 대신, 옆으로 한 걸음 비켰다.
그 순간 침묵의 자매들 전체가 경련했다. 동기화가 무너졌다. 기도문이 어긋났다.
향로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연기가 불안정하게 흩어졌다.
설계자의 음성이 처음으로 변조되었다.
[오류 감지. 집행 모듈 S-07, 상태 재확인 중.]
“그만둬.” 안나가 말했다. 이번엔 분명하게. 그녀는 자신의 베일을 벗었다.
그 아래에는 완전히 기계도, 완전히 인간도 아닌 얼굴이 있었다.
눈물샘은 제거되어 있었지만, 눈은 젖어 있었다.
“나는 네가 말한 낙원을 본 적이 없어.” 안나가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우는 건 봤어.”
그 말과 함께 안나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내부 기록 장치를 강제로 파괴했다.
찌직!! 빛이 터졌다. 설계자의 시야가 단절되었다. 격리소 안의 공기가 한순간 풀렸다.
알파-3가 외쳤다.
“글록! 설계자의 시야 차단 성공!”
18분.
죽기엔 여전히 짧고, 도망치기엔 처음으로 가능한 시간이었다.
마리아가 안나를 올려다봤다.
“언니...”
“응.” 안나가 대답했다. “나... 이번엔 제대로 선택했어.”
그러나 안나는 알고 있었다. 이 배반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멀리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17분 12초
글록은 깨달았다. 이제 이 싸움은 설계자 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포기하는 방식과 끝까지 인간으로 남으려는 선택의 충돌이다.
시스템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의 죽음은 기록 장치가 파괴된 개체의 죽음이었다.
이것은 구조상 ‘오류’가 아니라 ‘시스템 거부’ 였기에 설계자에게 치명적이었다.
벽면의 십자가 균열 사이로 검은 코드 같은 문양이 스며 나왔다.
설계자의 음성이 이번에는 분명한 개인 호출로 울렸다.
[집행 모듈 S-07. 당신의 행동은 비효율적 감정 오류로 판명되었습니다.]
안나는 웃었다. 입꼬리가 아닌, 눈으로.
“그래. 그래서... 나는 인간인 거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억해.” 안나가 말했다. “네가 특별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야.”
마리아의 눈이 커졌다.
“네가... 선택했기 때문이야.”
그 순간 침묵의 자매 두 명이 동시에 안나의 등을 꿰뚫었다.
피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대신, 빛이 새어 나왔다.
안나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녀의 형체는 분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이마에 닿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기억의 온도가 마리아의 뇌 깊숙한 곳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안나는 사라졌다.
설계자의 기록에 단 한 줄이 추가되었다.
[집행 모듈 S-07 폐기]
마리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안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한 번 더 보았다.
병사들의 눈 뒤에 숨은 두려움, 자매들의 침묵 속에 눌린 질문, 그리고 글록의 몸 안에서 시간이 갈려나가는 소리까지.
마리아의 숨이 바뀌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편안하고 규칙적인 호흡이었다.
알파-3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글록... 마리아의 신경 패턴이 변형되고 있습니다.”
“각성이 시작된 것인가?” 글록이 물었다.
“아닐 겁니다.” 알파-3가 정정했다. “각성이라기엔... 너무 조용합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푸른 노이즈 대신 사람의 표정이 비쳤다.
“아저씨. 저 사람들이 왜 저에게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아요.”
글록은 대답을 기다리며 마리아를 응시했다.
“제가 다르니까요.” 마리아가 말했다.
“근데요... 다르다는 것이, 나쁜 건 아니죠?”
그 질문은 설계자가 수천 번 지워온 금지된 문장이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내부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에너지 폭발도, 빛도 없었다.
다만 작은 눈이 더 초롱초롱해지고 있었다.
글록의 시야가 흔들렸다. 붉은 숫자가 튀었다.
17분 12초에서 순간 5분 03초
“젠장...” 그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알파-3가 분석했다.
“글록. 안나의 기록 파괴와 마리아의 비동기 영역 생성으로 인해 이 구역의 인과 안정성이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무슨 말이야. 좀 쉽게 말해줘.” 글록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글록의 시간은 직선적 물리 시간이 아니라 개입에 따라 흐르는 상대적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알파-3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당신의 신체가 지불하고 있습니다.”
글록의 손등 위로 피 같은 것이 떨어졌다. 시간 누출이었다. 그는 웃었다.
“괜찮아. 이번엔... 그래도 아직 제대로 쓸 시간은 남아 있는 것 같군.”
멀리서 종이 다시 울렸다. 연속해서 세 번.
마티아스 폰 발터가 ‘신의 재판’을 선언했다는 신호였다.
알파-3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글록. 다음 단계에서는 개입할수록 당신이 먼저 사라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글록은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럼... 그전에 끝내야겠군.”
4분 41초
네 번째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들은 모여 있었다.
격리소 바깥, 좁은 광장.
썩은 짚과 오물 위에 서 있던 사람들, 살아남았다고 믿고 싶은 자들, 그리고 누군가를 대신 죽여야 안심할 수 있는 자들.
마티아스 폰 발터는 십자가를 들지 않았다. 성경도 펼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모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 침묵했다.
사람들은 그 침묵을 스스로 채웠다.
“신부님이 왔다.”, “이제 끝나는 거야?”, “저 안에 마녀가 있다면서?”
마티아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신의 뜻을 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웅성임이 잦아들었다. 그 말은 예상 밖이었다.
“나는 신의 결과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격리소의 문을 바라봤다.
아직 닫혀 있는 문. 안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전염병은 벌이 아닙니다.” 마티아스가 말했다. “시험도 아니죠.”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이 꿈틀거렸다.
“전염병은 선별입니다. 그리고 선별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예외가 지금, 저 문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꽂혔다.
“아이 하나가 저 격리소에서 며칠을 지냈는데 병에 걸리지 않는군요.”
누군가 꿀꺽 숨을 삼켰다.
“기도보다 강한 면역. 고해보다 빠른 회복. 신이 허락하지 않은 생존.”
마티아스는 여기서 아주 조심스럽게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그 아이가 남아 있는 한 이곳의 죽음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외쳤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티아스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들, 살아남고 싶은 눈들, 책임을 넘길 대상을 찾는 시선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결론을 말하게 두었다.
“불로 정화해야 한다.”, “신의 뜻을 증명해야 한다.”, “마녀다.”
그제야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입술을 움직였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Ignis necessarius! (불이 필요하다)"
그 말 한마디로 ‘신의 재판’은 끝났다. 아니, 시작되었다.
“태워버려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인 채 마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티아스는 뒷짐을 지고 광기에 사로잡혀 마리아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데이터에서 왔으니 서버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