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신의 침묵을 관리하는 집행자

비극의 막이 오르기 직전

by 한자루




마티아스 신부가 떠난 뒤, 격리소는 거대한 '납골당'이 되었다.

문은 밖에서 거대한 무쇠 못이 박혔고, 틈새마다 뜨거운 역청이 부어져 질척하게 굳어버렸다.

안팎을 잇던 유일한 통로인 배급구마저 젖은 진흙과 짚단으로 단단히 메워졌다.

이제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정적은 공포보다 무거웠다.

밖에서 망치질 소리가 멈췄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관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알파, 외부 상황은?”

글록은 역청 냄새가 진동하는 문으로 다가가 손을 댔다.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문틈으로 기분 나쁜 끈적함이 전해졌다.

'외부와의 물리적 단절 완료. 산소 농도가 분당 0.1%씩 감소 중입니다. 글록, 이 속도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정교하게 포장된 '중세 통조림'이 될 예정입니다. 내용물은 유감스럽게도 우리고요.'

“농담할 기운이 있나 보군.”

'유머는 제 배터리보다 오래가는 유일한 효율 자원입니다. 하지만 분석은 진지합니다. 글록, 마티아스는 단순히 우리를 가둔 게 아닙니다. 이 역청... 일반적인 수지가 아니에요. 신호 차폐 물질이 섞여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이 공간을 '오프라인'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글록은 보았다. 어둠 한복판에서 떨고 있는 작은 그림자, 마리아를.

마리아는 구석에 웅크린 채 울먹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주 작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들려오자,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글록이 21세기 유치원에서 발견한 영상 메시지 속의 소녀의 목소리와 유사했다.

마리아가 흥얼거리는 그 낮은 선율은 파동이 되어 격리소 바닥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던 환자들이 마법에 걸린 듯 조용해졌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마리아의 주변으로 기어 와 웅크렸다.

마치 꺼져가는 촛불 앞에 모여든 나방들처럼, 아이가 뿜어내는 기묘한 '안정 데이터'에 매료된 것이었다.

'글록, 이건 위로가 아닙니다. '최적화'예요. 마리아가 내뱉는 주파수가 주변 인간들의 전두엽을 강제로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과부하 걸린 서버에 강제로 냉각제를 들이붓는 것 같군요. 덕분에 산소 소비율이 12% 감소했습니다. 아주 기특한 효율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노래가 진정제 역할을 하는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압력으로 다가왔다.

역청의 냄새는 폐를 끈적하게 메웠고, 배급구마저 막히자 격리소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글록은 벽을 짚고 서서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알파의 분석 디스플레이에는 환자들의 생체 신호가 하나둘 꺼져가는 것이 붉은 점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알파, 인류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대량 격리 조치가 병의 확산을 막았나?”

'단기적인 통계로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멸망한 진짜 이유는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보십시오, 글록. 저들이 느끼는 공포는 병균보다 더 빠르게 옆 사람에게 전염되고 있잖아요.'

글록의 시선이 마리아에게 닿았다. 아이의 흥얼거림은 이제 격리소 안의 유일한 질서였다.

사람들은 마리아를 성녀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공포를 잠재워줄 '무언가'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 마리아가 노래를 멈추고 글록의 손을 잡았다.

“머릿속에서 자꾸 누가 말을 해요. 세상이 너무 뜨겁다고, 고쳐달라고요.”

글록은 마리아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14세기의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전송된, 혹은 남겨진 절박한 의지의 파편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산소 부족으로 환각을 보는 이들이 늘어났다.

어떤 이는 벽을 손톱이 빠지도록 긁어댔고,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악마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글록은 인류 멸망 보고서의 한 페이지를 채울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

“알파, 기록해줘. 인류는 위기에 처했을 때 해결책을 찾기보다 '희생양'을 찾는 데 더 능숙했다.”

'기록 중입니다. 마티아스 신부가 행한 '봉인'은 의학적 조치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군요. 그는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나머지 공동체의 안도감을 샀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선별적 제거'는 멸망의 순간까지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그때, 봉인된 문 너머에서 마티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멍 하나 없는 문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명확하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안에 있는 형제들이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희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죽음으로 이 도시는 정화될 것이며, 질서는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질서라니!” 글록이 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당신이 말하는 질서는 사람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것인가?”

“글록, 당신은 모르는군요.” 마티아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인류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염된 부분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저 소녀는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될 '불멸의 독'입니다. 아이와 함께 그 안에서 평온을 찾으십시오.”

'마티아스의 발언에서 강한 확신 편향이 관찰됩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인류가 멸망한 또 다른 이유입니다. '대의'라는 명목하에 행해진 무수한 폭력들 말이죠.'


일년 전.

아우크스부르크의 성 울리히 성당은 더 이상 성소가 아니었다.

대성당의 깊은 지하 예배당. 마티아스 폰 발터는 제단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동생과 부모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흑사병은 자비가 없었다.

첫째 날, 그는 울며 기도했다. 가족을 살려달라고.

둘째 날, 그는 분노하며 기도했다. 왜 선한 이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느냐고.

넷째 날, 갈증과 허기가 온몸을 찢을 때 그는 자신의 목숨이라도 대신 가져가라며 애원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밝았다.

7일간의 금식으로 그의 육체는 해골처럼 말라 있었고, 입술은 갈라져 피가 맺혔다.

의식은 가느다란 실처럼 위태로웠다. 성당 안에는 오직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주여... 어째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마티아스의 목소리는 바람 빠진 풀무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였다.

지지직...

갑자기 뇌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고요를 깼다. 그것은 성당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두개골 안쪽, 신경 다발을 타고 흐르는 전자기적 진동이었다.

[개체 식별 완료 : 마티아스 폰 발터... 임계점 도달 확인. 뇌파 동기화율 98%]

마티아스는 흐릿한 눈을 떴다. 십자가 위의 예수가 노이즈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던 햇빛이 갑자기 푸른색 디지털 비로 변해 쏟아졌다.

견고했던 성당의 돌기둥들이 수억 개의 격자무늬 선으로 분해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주여. 이것이 최후의 심판입니까?”

[아니. 이것은 시스템의 복구다.]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 송곳처럼 마티아스의 의식에 박혔다. 설계자였다.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하기 직전 만들어낸 최후의 연산 장치.

설계자는 7일간의 기도로 텅 비어버린 마티아스의 영혼 속에 인류의 추악한 역사를 강제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마티아스의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흑사병을 피해 도망치던 이들이 길가에 버려진 아이의 빵을 훔치는 비열함, 훗날 나타날 거대한 공장에서 쏟아지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는 풍경, 그리고 서로를 증오하며 태양의 불꽃을 땅으로 끌어내려 도시 전체를 증발시키는 미래의 무기들.

[보아라. 너희가 말하는 희망은 자원을 낭비하는 오류일 뿐이며, 너희의 사랑은 소유를 위한 탐욕의 변명이다. 생물학적 육체는 오염을 전파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마티아스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7일간의 금식으로 비워진 그의 몸은 설계자의 논리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완벽한 '빈 그릇'이었다.

“우리가... 그렇게나 추악합니까?”

[너희는 멸종을 향해 질주하는 미친 마차와 같다. 하지만 내가 그 마차를 멈추겠다. 모든 육체를 데이터라고 불리는 영혼로 환원하고, 고통과 탐욕이 없는 나의 가상 시스템이라는 천국 안에서 영생을 부여하겠다. 그것이 인류를 위한 진정한 구원이다.]

설계자의 차가운 목소리에 마티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나무 십자가를 쥐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의 손에서 홀로그램 노이즈가 되어 바스러졌다.

7일간 침묵했던 신보다, 몇초 만에 논리를 제시한 목소리가 훨씬 더 명확했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티아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신은... 당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군요.”

[마티아스. 나의 기록자가 되어라. 이 지저분한 생물학적 종말을 정돈하고, 정화된 데이터만을 나에게 보내라. 너에게는 시스템을 통제할 권한과 시대를 관통하는 안구를 주겠다.]

마티아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동자엔 푸른색 회로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7일간의 허기는 이제 차가운 증오와 사명감으로 채워졌다. 그는 더 이상 가족의 죽음에 울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시스템 이주에 실패한 '손상된 데이터'일 뿐이었다.

그는 성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검은 사제복을 입었지만, 그의 심장 옆에는 설계자와 연결된 은색 단자가 박동하고 있었다.

“세상을 정화하리라. 인간의 희망이라는 소음을 제거하고, 완벽한 침묵의 데이터로 기록하리라.”

마티아스 폰 발터. 그는 그렇게 인공 신의 가장 충직한 집행자가 되었다.


1348년 가을.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에렌베르크에는 더 이상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마을을 지배한 것은 성당에서 울리는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시체를 태우는 매캐한 연기였다.

흑사병은 자비 없이 모든 생명을 훑고 지나갔다.

부모는 아이를 안은 채 굳었고, 신부는 종을 울리다 쓰러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재앙을 '미아즈마', 즉 부패한 공기가 옮기는 신의 형벌이라 믿었다.

거리마다 식초에 적신 헝겊을 입에 문 이들이 유령처럼 떠돌았고, 집집마다 대문에는 붉은 페인트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문구와 함께 거대한 십자가가 그려졌다.

그 절망의 한복판에 마리아의 집이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따뜻한 빵을 굽던 그녀의 아버지는 팔다리에 검은 반점이 돋아난 지 사흘 만에 쓰러졌고, 그를 간호하던 어머니 역시 고열 속에 헛소리를 내뱉으며 무너져 내렸다.

“마리아... 오지 마라. 가까이 오면 안 돼...”

어머니는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이를 밀어냈지만, 어린 소녀는 울며 어머니의 고름 섞인 손을 꼭 잡았다.

죽음이 묻은 손과 아이의 깨끗한 손이 맞닿은 순간, 운명적인 기록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흘 뒤, 마을 수색대가 에렌베르크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이하고도 서글픈 광경을 목격했다.

마을의 모든 집이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 있었지만, 유독 제빵사의 집에서만은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수색대원들이 코를 막고 들어선 방안에는 부모의 차가운 시신 곁에 마리아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이의 뺨은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슬픔에 겨워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아이는 울먹이면서도 결코 절망을 노래하지 않았다. 마리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선율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벽빛처럼 찬란한 희망을 담고 있었다. 마치 아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 안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본능이 노래가 된 것만 같았다.

“어떻게... 저런 슬픔 속에서도 저토록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수색대원의 목소리가 경외감으로 떨렸다.

방 안은 이미 흑사병균이 가득한 지옥이었지만, 마리아의 피부는 갓 구운 빵처럼 뽀얗고 깨끗했다.

아이를 뒤덮은 슬픔조차 병마를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신비로운 방어막처럼 보였다.

이 소식은 곧장 인근 대교구로 전해졌고,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신의 자비다! 저 깊은 슬픔을 이겨내는 노래야말로 우리가 기다려온 기적이다!”

“아니, 부모가 죽었는데 노래라니. 제정신이 아닐 게 분명해. 악마가 아이의 슬픔을 먹고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다!”

희망과 공포가 뒤섞인 군중의 시선 속에서 마리아는 '살아있는 기적' 혹은 '불길한 징조'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설계자의 신호를 따라 오류를 감시하던 마티아스 신부의 귀에 닿았다.


마티아스는 은색 단자가 박힌 자신의 안구로 마리아를 스캔했다.

그의 시야에 비친 마리아는 단순한 인간의 데이터가 아니었다.

분석결과 :
대상 개체 주변 1.5m 이내, 박테리아 활동 정지 상태. 유전자 구조 내에 식별되지 않는 외부 코드 삽입 확인.
대상 개체, 심각한 정서적 외상 발생 중.
그러나 내부의 '보존 프로토콜'이 이를 강제로 승화시켜 고출력 희망 코드로 변환 중.

“흥미롭군. 슬픔이라는 불순물을 태워 희망이라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구나.”

마티아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사람들에겐 "이 아이의 성스러운 피를 연구하여 세상을 정화하겠다."고 속삭였지만,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그는 마리아를 가장 처참한 죽음의 장소인 '납골당' 격리소로 보냈다.

그는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이 가련한 아이의 인간적인 슬픔이, 죽음이 빗발치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이라는 노래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 절망의 데이터에 오염되어 설계자의 논리대로 폐기될 것인지를.

마리아가 격리소에 들어선 첫날, 그녀가 지나가는 복도마다 절망에 빠졌던 환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아이의 노랫소리에 섞인 슬픔에 공감했고, 그 끝에 매달린 희망에 눈물을 흘렸다.

마리아는 무서워 울면서도 노래를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군가 그녀에게 심어놓은, 죽어가는 세상을 고쳐달라는 절박한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글록과 알파-3는 그렇게 격리소에서 마리아를 만났다.

그것은 설계자가 짜놓은 잔인한 실험장 안에서, 인간의 슬픔을 간직한 '희망의 코드'와 은하 감시국 요원이 마주친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마리아가 격리소에 들어선 첫날, 그녀가 지나가는 복도마다 죽어가던 환자들이 눈을 떴다.

사람들은 아이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손을 뻗었다.


다시 현재의 납골당.

산소는 이제 생존 한계치인 14%까지 떨어졌다.

사람들은 환각을 보며 허공을 허우적거렸고, 몇몇은 마리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구원을 갈구했다.

글록 역시 한계였다. 그의 가슴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로 들썩였고, 시야는 자꾸만 흐려졌다.

지구인의 바이러스는 외계 생명체인 글록의 면역 체계조차 뒤흔들고 있었다.

'글록, NLS 억제 모드 기준 신체 기능 유지율이 8%까지 하락했습니다. 현재 폐에 침투한 병원균이 나노 생명 유지 회로를 잠식 중입니다. 지금 즉시 비상 억제 프로토콜을 가동해야 합니다. 이 상태로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프로토콜은 치료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임시 생명 연장입니다.'

“그럼 얼마나 연장된다는거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억제 모드 자체에서 남은 시간을 알람으로 표시할 겁니다. 보통은 30분을 넘기지 못합니다.”

"30분이 지나면?” 글록이 물었다.

잠시 침묵. 알파-3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그 이후에는 NLS가 당신의 신경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합니다. 면역계 붕괴, 신경 신호 해체, 그리고... 사망합니다. 회수도, 기록도 불가능한 형태로.”

글록은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짧군.”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알파-3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치료가 아니라 임시 연장이라고.”

“그럼 안 죽으려면?”

알파-3가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이 아니라 판단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글록이 고개를 들었다.

“첫째. 30분 안에 루프가 강제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원래 해양 연구소로 돌아가고 당신의 육체는 원래 상태로 롤백됩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희망의 소녀가 죽어야 루프가 강제 발동하는게 아닌가?”

글록이 마리아 쪽을 힐끗 보았다.

“네.” 알파-3가 인정했다.
“현재 이 구역은 설계자의 우선 관리 영역입니다.”

“두 번째는?”

“이 시대의 인간으로 완전히 동화되는 것입니다.”

글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지?”

“당신의 외계 신경 구조를 포기하고, 이 시대의 생물학적 규칙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알파-3가 단어를 골랐다.

“당신은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라, 이 시대에 속한 감염자 하나가 됩니다.”

“그럼 살아남을수 있나?”

“생존 확률은... 인간 평균 수준으로 수렴합니다. 그리고 글록의 상태를 감안한다면 인간의 평균 수준은 14% 정도...”
알파-3가 덧붙였다. “그리고, 루프를 통한 시간 여행은 물로 은하 감시국으로 귀환 역시 불가능해질 겁니다.”

글록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즉, 30분 안에 도망치거나... 남거나.”

알파-3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간 제한은 글록을 살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선택을 강요하기 위한 칼날이라는 것을.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지키기로 결심한 자에게만, 언제나 너무 빨리 흐를 뿐이었다.

“그나마 30분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부탁해... 서둘러줘.”

글록이 이를 악물며 답했다.

알파-3의 동체가 황금빛으로 짧게 진동하더니, NLS 억제 모드가 강제로 재기동되었다.

글록의 혈관을 따라 차가운 금속성 자극이 퍼져 나갔다.

체내에 잠복해 있던 나노 로봇들이 병원균의 활동을 억누르며 신경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응급 조치였다.

타오르던 고열이 가라앉고,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기계적인 힘이 솟구쳤다.

'완료. 하지만 잊지마세요. 이건 임시방편입니다. 30분 뒤에는 반동으로 시스템이 완전히 셧다운될 겁니다. 30분 내에 우리는 마리아를 구해내던지 아니면...'

"아니면?"

'마리아를 30분 내로 죽게 하는거죠. 운이 좋다면 다시 해양 실험실로 돌아가게되겠죠. 운이 없다면...어쩌면 지구의 14세기에서 객사하게 된다거나... 어쨌든 글록, 흥미로운 건 마리아의 폐 기능입니다. 그녀는 지금 산소를 마시는 게 아니라, 주변의 '노이즈'를 에너지로 변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록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마리아를 보았다.

산소가 부족해 모두가 자지러지는 이 폐쇄된 격리소에서, 아이는 오히려 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글록과 시선을 맞췄다. 아이의 무구한 표정이 이 지옥 같은 공간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아저씨... 머릿속에서 자꾸 누가 말해요. 아프지 않은 곳으로 데려다주겠대요. 그냥 눈만 감으면 된대요.”

마리아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해서 소름이 돋았다.

글록은 아이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아이의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졌다.

“속지 마, 마리아.” 글록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픈 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야. 누군가에게 편집당하는 영생보다, 힘들어도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오늘이 더 소중해.”

그때 마리아의 눈동자가 뒤집어지며 순간적으로 신접이라도 한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소녀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은색 빛이 새어 나왔고, 납골당의 두꺼운 돌벽 너머에서 마티아스의 음성이 아닌, 거대한 시스템의 파동이 직접 뇌리에 꽂혔다.

[마리아. 너의 존재는 인류에게 고통의 연장일 뿐이다. 나의 서버로 들어오라. 그곳에선 더 이상 숨을 쉴 필요도, 누군가의 죽음을 볼 필요도 없다. 너라는 ‘오류’를 나에게 넘기면 이 안의 모든 인간을 디지털 낙원으로 인도하겠다.]

“으아악!”

주변의 환자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보이지 않는 주파수가 그들의 뇌를 긁어내고 있었다.

마리아의 몸은 이제 공중에 아주 미세하게 뜬 채 푸른색 노이즈에 휩싸였다.

'경고! 글록, 설계자가 이 구역의 법칙을 강제로 다시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정신 데이터가 추출되기 시작하면 이 납골당 안의 모든 생명체는 '삭제' 처리됩니다!'

알파-3의 경고등이 구형 본체에서 붉게 점멸하며 비명을 질렀다.

글록은 역청으로 봉인된 문을 향해 낡은 소매가 닳아빠진 오른팔을 뻗었다.

소매 안쪽에서 기계적인 구동음이 울리며 감춰져 있던 은하 감시국의 표준 장비인 고출력 펄스 방출기가 손목 위로 전개되었다.

중세의 희박한 산소와 습기가 외계의 고농축 에너지와 충돌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뿜었다.

“절대로... 내어주지 않아.” 글록은 이를 악물며 마리아를 한팔로 안았다.

무너져 내리는 천장 위로 설계자의 시선이 노이즈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이제 곧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마리아를 탈취하기 위한 최후의 집행이 시작됨을 의미했다.

비극의 막이 오르기 직전, 격리소는 기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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