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염병, 그리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택
글록은 바닥에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폐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소금기 섞인 냄새. 금속과 녹, 그리고 오래된 물의 향.
“다시 여기군.”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도는 기억과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바닥의 물자국은 예전보다 더 번져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배관 하나는 분명 지난번엔 없던 각도로 꺾여 있었다.
“알파.”
“네. 확인 중입니다.”
알파-3의 조명이 켜졌다. 벽면을 스캔하는 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간 좌표 일치율 98.7%. 하지만… 내부 세부 구조 편차 발생. 쉽게 말하면...”
“같은 장소지만, 같은 시간이 아니라는 거군.”
“네. 맞습니다. 역시 설명을 줄이면 항상 정확하십니다.”
글록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익숙해져야겠지.”
익숙함이란 말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안도감을 의미하지 않았다.
여기서 두 걸음 앞으로 가면 바닥이 살짝 기울고, 그다음에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질 것이다.
왼쪽 벽엔 깨진 유리 패널, 오른쪽엔 번호가 지워진 실험실 표식.
모두 기억 속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그는 멈춰 섰다. 바닥에 남은 물자국이 달랐다.
전에 왔을 땐 물이 여기까지 차오르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물을 흘려보낸 것처럼 소금 자국이 반원형으로 말라 있었다.
알파-3가 조명을 조금 낮췄다.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디테일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이죠.”
“하나는?”
“‘기억이 틀렸나?’라고 생각하죠.”
“다른 하나는?”
“‘이번엔 뭔가 더 잘못됐다’라고 생각합니다.”
글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쪽이지?”
“경험상… 둘 다입니다.”
복도 끝, 문은 이번에도 닫혀 있었지만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문이 열리며, 낡은 조명이 방 안을 천천히 밝혀냈다.
“저 친구도 여기 그대로군.”
슈트형 AI는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뭔가 조금은 달랐다.
금속 외피 곳곳에 미세한 균열이 더 늘어나 있었고, 흉부 패널 안쪽에서 빛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마치 오래 숨겨둔 심장이 피로해진 것처럼.
“AI 구조체 식별.”
알파-3가 말했다.
“M1-R 계열. 전술 방어용 슈트형 기록 관리자. 상태, 비활성, 그러나…”
“그러나?”
“기록 요청 대기 상태입니다. 또다시.”
AI의 가슴부에 문장이 떠올랐다.
전송 대기 중 기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글록은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지난번엔 ‘실패했다’고 했지.”
그리고 AI의 내부에서 노이즈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록이 갱신되었습니다.”
“그래서?” 글록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이번엔 뭘 숨길 셈이지?”
AI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처럼 생긴 데이터 창이 공중에 열렸다.
완전히 펼쳐지지 않은 채, 몇 줄만 보이게.
루프 횟수 : 불명
기억 개체 관측 성공률 : 감소 추세
결과 : 실패
알파-3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글록, 이 AI.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기록만 남기는 것 같습니다. 마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인간처럼?”
“빙고! 정확히요.”
그 순간, AI가 처음으로 자발적인 음성을 냈다.
“기억은 남겨질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은 항상... 지지지직 너희가 한다.”
노이즈가 낀 음성을 들으며 글록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말해봐. 우리가 계속 실패하는 이유.”
AI의 빛이 흔들렸다.
“그 질문은 기록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기록 대상은 뭐지?” 잠시 침묵.
그리고 아주 낮은 음성. “다음 아이.”
그때였다. 아주 멀리서 여자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확하지 않았다. 환청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알파-3도 반응했다.
“저 웃음소리... 청각 로그에 기록됩니다.”
글록의 숨이 멎었다.
“이번에도… 들리는군.”
웃음소리는 복도 저편에서 한 번 울리고 사라졌다.
AI의 패널이 순간적으로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뭐가?”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알파-3의 경고가 울렸다.
“글록! 시공간 벡터 재정렬! 좌표, 중세 유럽권으로 추정!”
글록은 마지막으로 슈트형 AI를 바라봤다.
“다음엔 좀 더 말해줘.”
AI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줄을 남겼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당신을 찾을 겁니다.
중력이 흐트러졌다.
바닥이 먼저 반응했다. 아니, 반응했다기보다는 바닥이라는 개념이 먼저 무너졌다.
글록의 발밑에서 금속이 울렸다.
낮고 둔한 진동. 파도가 아니라, 거대한 심장이 한 번 뛰는 소리처럼.
“알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밀도를 잃었다. 숨을 들이마셨는데, 폐가 채워지지 않았다.
산소가 사라진 게 아니라, ‘들이마신다’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잃은 느낌이었다.
알파-3의 조명이 흔들렸다. 빛이 벽에 닿기 전에 찢어졌다.
“글록! 시공간...” 목소리가 중간에서 잘렸다. 잘린 게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늘어났다.
앞에서 들리던 알파-3의 음성이 뒤에서, 위에서, 그리고 머릿속 안쪽에서 동시에 울렸다.
“벡터 재정렬-”, “재정렬-”, “정-려어얼-”
글록은 무언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앞으로 가지 않았다. 옆으로도, 아래로도 아니었다.
손은 ‘이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의 방향이 뒤집혔다.
눈앞의 해양 연구소가 접히기 시작했다.
벽이 바닥 위로 접히고, 천장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며 공간이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었다.
그 점 안에서 수많은 장면이 스쳤다.
불빛 아래 울던 아이의 얼굴. 피로 얼룩진 제단. 불타는 숲. 철창 너머의 눈동자들.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장면. 종소리. 비명. 젖은 천 위에 남은 검은 반점.
“글록!”
이번엔 알파-3의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웠다.
“중력 기준점 완전 붕괴! 신체 정보가 시대 정보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뭐라고!”
“쉽게 말하면... 글록, 당신이 생명체로 도착할지 보장 못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글록의 몸이 찢어졌다. 아프지 않았다.
고통보다 먼저 정체성이 분해되고 있었다.
이름. 기억. 체온. 시간이라는 개념. 모든 것이 조각나서 빛 속으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감각은 차가움이었다.
바닷물의 차가움이 아니라, 돌바닥 위에서 스며드는 냉기.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련의 아이의 웃음소리.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엔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엔...” 글록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빛이 완전히 꺼졌다.
그리고 다시 숨이 막혔다. 공기가 너무 무거웠다. 젖은 천과 썩은 냄새, 사람의 체온과 죽음이 뒤섞인 공기.
누군가의 손이 그를 붙잡고 있는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이 손등을 타고 전해져 왔다.
“이봐! 아직 살아 있어!” 아주 먼 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글록은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가슴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온몸의 신경을 따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이 번지고 있었다.
울다 지친 흐느낌 같은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서서히 온통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더니 작은 홀이 글록과 알파-3를 천천히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죽음의 냄새로 돌아왔다.
눈을 떴을 때, 글록의 코를 찌른 것은 바다내음이 아니었다.
썩은 짚, 땀, 고름, 그리고 향이 섞인 냄새. 기도문과 함께 태워진 허브의 냄새였다.
그는 돌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손목엔 거칠게 묶인 천 조각. 몸은 무겁고, 숨은 가빴다.
“… 여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 안쪽이 갈라진 것처럼 아팠다.
알파-3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글록… 이번 루프의 환경은...”
“전염병이겠군.”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이 썩는 냄새를 맡고도 모르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전염병과 인간이라...”
“이거 역대급 위험한 조합인데요.”
글록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에 다시 한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글록은 숨을 들이마시려다 곧바로 심하게 기침했다. 공기가 목을 긁었다.
젖은 천과 곰팡이, 썩은 나무, 그리고 사람의 체취가 한꺼번에 폐로 밀려들었다.
숨을 쉬는 행위 자체가 고통이었다.
눈을 뜨자 세상은 흐릿했다. 천장은 낮았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굵은 들보 사이로 거미줄이 늘어져 있었고, 어디선가 물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은 차갑고, 축축했고, 여러 겹의 얼룩이 겹쳐진 채 닦이지 않은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글록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야 느껴졌다. 몸이 이상했다.
피부 안쪽에서 열이 타오르고 있었고, 관절은 무겁게 굳어 있었으며, 가슴 안에서는 낯선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염병…’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먼저 떠올랐다. 정보가 아니라, 본능처럼.
그때였다.
“깨어났네.”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글록의 시야 한쪽에 작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림자는 아이였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제대로 빗지 못한 채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훈련된 거리.
“움직이지 마요.” 소녀가 말했다.
“지금은… 움직이면 더 아파질 거예요.”
글록은 입을 열려다 다시 기침했다.
“여긴…” 겨우 소리가 나왔다. “… 어디지?”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격리소예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오는 곳.”
그 말에 글록의 시야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제야 보였다.
벽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 누워 있는 사람, 웅크린 사람, 이미 움직이지 않는 사람.
어떤 이는 헝겊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리고 있었고, 어떤 이는 눈을 뜬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글록의 손이 떨렸다. 그 순간 그의 어깨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었다.
빛도 없고, 형태도 불분명한 무엇. 공기가 그쪽에서 묘하게 일그러졌다.
소녀의 얼굴이 굳었다.
“… 또 나타났네.”
글록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체 안정화 완료.
외형 변환 프로토콜 적용 중.
현지 인식 필터... 음, 상당히 불쾌하군요.
알파-3였다. 그러나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의 조명은 꺼져 있었고, 형체는 마치 연기처럼 흐릿했다.
금속의 반사 대신 어둠이 살짝 번지는 느낌.
'현재 이 모습으로는… 이 시대 사람들 눈엔 ‘떠도는 것’으로 보일 확률 87%. 솔직히 말해 귀신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은 쪽이죠."
“이건… 귀신인가?”
소녀가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반 박자 늦게,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도망치기엔 너무 가까이 와 있었고, 무엇보다 귀신치고는 너무… 성실하게 떠 있었다.
“… 이상하네.” 소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보통 귀신은 이렇게 가만히 안 있어요.”
글록의 어깨 뒤에서 알파-3의 형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걸 본 소녀가 다시 물었다.
“아저씨도…” 그녀는 글록을 올려다봤다. “저 귀신이랑 같이 온 건가요?”
잠깐의 침묵. 소녀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아프니까, 영혼을 데리러 온 건지.”
그 말에 글록은 웃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알파-3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엔 일부러, 최대한 점잖게.
"부정확한 추론입니다. 저는 사신이 아니라고요."
“사신 맞잖아요.” 소녀가 아주 자연스럽게 끊었다.
“사람 옆에 떠 있고, 안 보이는 데서 말 걸고.”
알파-3가 멈췄다.
"…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정의군요."
소녀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글록을 다시 바라봤다.
“괜찮아요. 진짜 사신이면 벌써 데려갔을 테니까.”
“… 그렇게 판단하는 기준이 뭐니?” 글록이 힘겹게 물었다.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사신은 설명 같은 거 안 해 준대요. 저 귀신같은 친구는 뭔가 말이 많잖아요.”
"흥미로운 기준이네요." 알파-3가 속삭이며 내부 기록에 작은 메모가 추가했다.
중세 민간 신앙 데이터
‘설명하는 존재는 사신이 아니며, 영혼을 아직 데려갈 생각 없음’
소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아직은 아저씨 살아 있는 거예요.”
그 말이 이 격리소에서 처음으로 나온 희망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소녀는 다시 글록을 바라봤다.
“아저씨도 많이 아픈게 맞지요?”
“근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 이상해요.”
“뭐가?” 글록이 힘겹게 물었다.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달라 보여요. 여기서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 말에 알파-3의 내부 로그가 짧게 흔들렸다.
"글록. 이 소녀… 격리소에 제법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감염 징후가 전혀 없습니다."
“뭐라고?”
"이 격리소 내부 평균 감염률 98.6%. 그러나 이 소녀의 생체 반응은… 완전 정상입니다.
소녀는 그 둘의 침묵을 보며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여기에 있어요. 다들 저를… 안 믿거든요.”
그 순간 멀리서 종이 울렸다. 낮고, 무거운 소리.
그리고 격리소 문 쪽에서 군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온다.” 소녀가 중얼거렸다.
“누가?” 글록이 물었다.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작게 대답했다.
“신부님. 그리고… 불.”
알파-3의 형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글록. 이번 시대의 키워드가 확정되었습니다."
“뭔데?”
"중세. 전염병.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택."
소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 이름은 마리아예요. 아저씨는 여기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빛이 아니라 권위 같은 것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릴 때 나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경첩이 울부짖지도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공기가 먼저 물러났다.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병사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창을 바로 세웠고, 환자 몇은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십자가를 움켜쥐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마티아스 폰 발터 신부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들어왔다.
그는 급하지 않았다.
전염병 격리소의 바닥은 늘 피와 토사물로 미끄러웠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은 사제복은 유난히 깨끗했다. 마치 이곳의 공기가 그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곧장 사람을 보지 않았다. 먼저 공간을 훑었다.
환자들의 수. 병사들의 위치. 망가진 출입문. 그리고, 방 한가운데 누워 있는 낯선 남자.
글록.
마티아스의 시선이 그 위에 멈췄다. 아주 잠깐, 그러나 충분히 긴 시간.
그 눈에는 연민도, 혐오도 없었다. 있던 것은 오직 판단이었다.
“이곳은,” 마티아스가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벽에 부딪혀 돌아온 울림이 그의 말이 이미 이 공간의 규칙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신의 집이 아닙니다.” 그 말에 몇몇 병사들이 흠칫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는 정리되지 않은 혼돈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저는, 그 혼돈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들어왔다.
알파-3가 미세하게 떨렸다. 조명 출력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주의.
고위 개입자 감지. 이 인물은...
마티아스의 시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알파-3 쪽으로 돌아갔다.
시선이 닿는 순간, 알파-3의 경고 문장이 끊겼다.
“흥미롭군요.” 마티아스가 낮게 말했다.
“이곳에는 마귀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 하는 것 같군요.”
병사 하나가 십자가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주여...”
마티아스는 손짓으로 그를 멈췄다.
“겁낼 필요 없습니다. 형제여. 이곳에서 사탄 마귀는 늘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다시 글록을 바라봤다.
“이 사람은,” 그가 병사에게 물었다. “누구죠?”
“감염자입니다.” 병사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증상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마티아스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불완전한 병과 불완전한 인간이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염자, 당신은...” 그가 말했다. “죽었어야 할 얼굴입니다.”
알파-3의 음성이 낮게 울렸다.
“글록. 이 인물, 기록에 있습니다.”
“뭐라고?”
“이름. 마티아스 폰 발터. 전염병 시대의 종교재판 개시자. 생존자 기록 : 없음. 사망 기록 : 없음.”
글록의 시선이 굳었다.
“이런 경우는 대개 기록이 남지 않는 법이죠.”
그는 글록 앞에 멈춰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그러나 우월감은 없었다.
그보다 더 차가운 것. 확신.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마티아스가 물었다.
글록은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글록입니다.”
마티아스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글록... 이름을 가진 감염자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형제자매님들. 기억하세요. 이곳에서 이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시선이 한 구석에 서 있던 소녀에게 닿았다.
마리아.
마티아스의 걸음이 멈췄다. 공기가 다시 한번 변했다.
이번엔 숨을 멈춘 사람이 더 많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아를 보았다. 너무 오래.
그 순간,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격리소 전체가 숨을 멈췄다.
사내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빛났다. 기쁨도, 연민도 아닌 ‘발견’의 빛이었다.
그는 미소 지었다. 너무도 온화해서 그 미소가 더 위험해 보였다.
“이 아이는...”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부드러웠다. 설교가 아니라 확정된 결론처럼 들렸다.
“하느님께서 아직 말씀을 남기신 존재로군요.”
마리아가 움찔했다. 알파-3의 센서가 경고음을 준비했지만 출력되지 않았다.
마티아스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아.” 그가 말했다. 그 한 음절에 이곳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그는 병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아이를, 잘 돌봐주세요.”
마리아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고개를 들어 검은 옷의 어른을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신부님… 신부님도 저 귀신이 보이세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흔들렸다. 마티아스는 웃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말했다.
“아니요.” 그리고 덧붙였다. “저건 귀신이 아니라, 증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는 돌아섰다. 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기도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신이 침묵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문이 닫혔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쾅 그 소리와 함께, 이제 격리소는 삶의 죽음의 선별의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