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교회 안에서 성소수자 이야기를 꺼내면 공기가 달라집니다.
말은 조심스러워지고, 눈빛은 경계로 굳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기준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어떤 이는 오래된 상처를 떠올립니다.
사실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는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오랜 세월의 침묵과 두려움이 쌓여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동성 간 관계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되었습니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또 다른 언어가 등장했습니다. 범죄 대신 “질병”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동성애는 정신질환 목록에 포함되었고, 교정 치료라는 이름으로 전기 충격이나 강제 치료가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2차 세계대전의 암호 해독에 결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동성애 혐의로 기소되어 화학적 거세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가를 구한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기준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존엄을 잃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이 그 뒤에 이어집니다.
직장을 잃고, 가족과 단절되고, 공동체에서 침묵 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 역사는 단지 종교의 엄격함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종교가 강하지 않은 세대에도 소수자는 반복적으로 억압되었습니다.
때로는 도덕의 이름으로, 때로는 과학의 이름으로, 때로는 국가 질서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렇다연 우리는 왜 우리와 다른 존재를 억압해 왔을까요?
인간은 익숙한 질서 안에서 안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사회는 남성과 여성의 결혼과 출산이라는 구조 위에 세워져 왔습니다.
그 틀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장치였습니다.
그 질서 밖에 있는 모습은 이해되기 전에 먼저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낯섦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통제가 되고, 통제는 배제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이 뿌리 깊은 배제의 역사와 혼란스러운 담론의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리에 서야 할까요?
단순히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이 거대한 파도를 어떻게 해석하고 응답해야 할까요?
오늘날 교회는 두 개의 날카로운 절벽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정당한 신학적 비판조차 '혐오'로 규정해버리는 세속 문화의 압력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의 고통에 귀를 닫은 채 '정죄'의 문구만을 반복하는 종교적 타성입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갈 길을 잃는다면 교회의 언어는 한낱 소음이 될 뿐입니다.
기독교적 비판은 이 둘 모두와 질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혀 다른 제안을 담은 언어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원칙에 따라 욕망을 죄의 가능성으로 진단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귀한 자리에서 끌어내릴 권리는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가능할지언정, 존재에 대한 인격적 모욕은 결코 복음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존재를 짓밟아 진리를 증명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내가 느끼는 것이 곧 나"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감정과 욕망은 단순히 내면의 현상이 아니라, 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에게 끌리는지가 곧 나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욕망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며, 타인이 나의 욕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이 현대판 실존의 문법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지점에서 조용히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인간은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욕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완성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욕망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의합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부여된 거룩한 의미 속에 태어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선언 역시 단순한 생물학적 구분을 넘어, 우리가 창조주가 설계한 질서 안에 놓여 있을 때 비로소 가장 '나다워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 하나를 마주해야 합니다.
성경은 현대의 통념을 깨는 반전의 진단을 내놓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아름다운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결코 온전히 신뢰할 만한 것은 못 된다.'는 사실입니다.
타락 이후 인간의 내면은 왜곡되었고,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중심에 두도록 기울어져 있습니다.
즉,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믿고 따랐던 그 간절한 욕망이, 사실은 나를 온전한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고장 난 나침반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진단은 특정 집단을 향한 공격의 화살이 아닙니다. 이성애자든 성소수자든, 우리 모두가 각자의 왜곡된 욕망과 싸우며 살아가는 '부서진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질서 안에 놓인 존재지만, 동시에 우리는 왜곡된 욕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타락 이후 인간의 내면은 왜곡되었고, 욕망은 언제나 스스로를 중심으로 기울기 쉽다는 말은 누구를 향한 화살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전체를 향한 진단입니다.
이성애자도 탐욕, 교만, 비교, 음란, 인정받고 싶은 갈망과 같은 욕망 앞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려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선을 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상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희는 모두 은혜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행위를 판단할 수는 있어도, 존재를 지워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는 이성애자도, 성소수자도, 종교인도, 비종교인도 모두가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욕망이 나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현대 사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라.”고 말합니다.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기준이냐, 하나님이 기준이냐의 차이입니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논리는 매우 엄격해지지만, 동시에 지극히 겸손해집니다.
'욕망은 신뢰할 만한 기준이 아니다.'라는 진단은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특정 성적 지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자기 욕망을 중심에 두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따라서 "나는 성소수자가 아니니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진단을 오해한 오만입니다.
이성애자든 성소수자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왜곡된 욕망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동일한 결핍의 존재'들입니다.
결국, 우리가 성소수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정죄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질서라는 기준 앞에 서 있고, 똑같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은 타인을 향해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그 돌이 향해야 할 곳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교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단호할 수 있으나, 그 대화의 태도는 눈물겹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누가 더 의로운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 더 은혜를 갈망하는가?"를 묻습니다.
십자가 아래서는 그 누구도 우월하지 않으며, 바로 그 지독한 평등의 자리에서만 진정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경계선 하나를 직시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정의하는 일과, 내 곁의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전통적 신학이 동성 간의 행위를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해 왔다는 사실이,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이나 억압의 정당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자는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는 '해석의 문제'이지만, 후자는 인간의 오만이 빚어낸 '권력 남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혼동되어 '진리'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휘둘러질 때, 복음의 자리는 사라지고 깊은 상처만 남게 됩니다.
이 지독한 혼돈을 잠재우는 것은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사람의 손에서 돌을 뺏어 바닥에 내려놓게 만드는 권위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나는 성소수자가 아니니 하나님의 심판 앞에 괜찮다.”라고 믿는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심연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특정 성적 지향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서 밀어내고 자기 욕망을 왕좌에 앉힌 모든 상태, 즉 우리 모두의 일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우리를 '정죄하는 자리'나 '면제받는 자리'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곳은 오직 '모두가 은혜 없이는 단 일 초도 버틸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성애자라고 해서 의로운 자격을 갖는 것도, 성소수자라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에서 지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십자가 아래 나란히 무릎 꿇은, 같은 무게의 은혜를 갈망하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성소수자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 입장을 정하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인간인가?'를 증명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질서를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타인을 향한 흉기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겸손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슈'를 말하기 전에 '사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논쟁보다 먼저, 그늘진 곳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성소수자'라는 차가운 단어 뒤에는 우리가 불러주어야 할 이름이 있고, 고단하게 버텨온 삶이 있으며, 밤마다 쏟아낸 눈물이 있습니다. 그 상처의 역사를 외면한 채 교리의 돌덩이를 던지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진리의 모양을 한 폭력일 뿐입니다.
상처 입은 자에게 준비되지 않은 진리는 구원이 아니라 칼날로 다가갑니다.
이제 교회는 서둘러 답하기를 멈추고, 오래 듣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벽'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를 잇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몸으로 만드신 '다리'였기 때문입니다.
우월감 섞인 비판은 사람을 쫓아내지만, 십자가 아래서 흐르는 눈물 섞인 대화는 사람을 초대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창조 질서를 믿는다면, 그 질서를 깨뜨리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일상을 먼저 애통해해야 합니다.
그 애통함이 있을 때만 우리의 말은 비로소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는 온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누구도 우월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정죄의 돌을 내려놓고, 서로의 부서진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만 진리는 벽이 아닌 다리가 되고, 비판은 비로소 서로를 살리는 간절한 초대가 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정죄의 광장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조건 없는 은혜가 흐르는 십자가의 곁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창조의 질서를 믿기에 그 기준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타인을 밀어내는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엎드려야 할 '회개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라고 선언할 수 있으나, "그러니 당신은 여기 설 수 없다."라고 문을 닫아걸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문은 판단의 벽이 아니라, 은혜가 흐르는 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크게 외치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진리는 고함 속에서 왜곡되고, 겸손 속에서 더 멀리 번져갑니다.
세상은 우리의 정교한 논리를 듣기 전에, 우리의 태도를 먼저 읽습니다.
사랑 없는 기준은 폭력이 되고, 기준 없는 사랑은 방종이 됩니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는 것, 그것이 복음이 가르치는 '좁은 길'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먼저 품으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상대의 모든 행위를 무조건 긍정하는 방관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인내입니다.
우리가 사랑 없이 기준만 앞세운다면 세상은 우리의 '독선'만을 기억할 것이고, 기준 없이 사랑만 말한다면 세상은 우리의 '무능'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 할 곳은 명확합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운 구호를 따라 외치는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는 자리입니다.
강한 어조가 믿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곁을 지켜주는 그 따뜻한 침묵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됩니다.
결국 기독교가 전해야 할 마지막 문장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두 문장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교회의 말은 정죄가 아니라 초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초대는 이렇게 끝나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