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십자가에 예수는 당신에게 낯선 이가 아니다.

도망치고 싶은 우리를 붙드는 불편한 질문들

by 한자루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해마다 사순절이 찾아오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심 곳곳에 세워진 붉은 십자가를 향해 시선을 던집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 투박한 나무 형틀을 마주할 때,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는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교회 문을 나서면 곧바로 마주하는 화려한 빌딩 숲과 스마트폰 속의 반짝이는 세상 속에서, 2,000년 전 유대 땅 한 청년의 비극은 우리에게 너무나 멀고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런 솔직하고도 노골적인 질문들이 비밀스럽게 우리 마음을 채우기도 합니다.


"2,000년 전, 로마의 변방에서 처형당한 한 청년의 비명이 지금 내 통장 잔고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정말 자기 아들의 피를 봐야만 화가 풀리는 분이신가? 왜 굳이 '피 값'이라는 잔인한 법을 써가며 보상을 요구하시는 걸까?"
"예수를 죽인 건 빌라도와 유대인들, 그리고 그 시대의 광기 어린 군중이지, 나처럼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 왜 '공범'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써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신앙이 없어서 생기는 의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와버린 십자가가 정작 우리의 영혼과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고백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예쁜 목걸이의 펜던트나 성경책 표지의 금박 장식처럼 늘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나무 위에 흘렀던 비릿한 피 냄새와 숨이 가빠지도록 이어졌을 고통의 순간만큼은 자연스럽게 마음 밖으로 밀어냅니다.

사실 의식적으로 밀어내려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 화려하고 매끄러운 장식들에 눈이 익어버린 나머지, 그 뒤에 숨은 처절한 실체를 감각하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소유'하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그 십자가에 '참여'하는 법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감각이 마비된 우리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실존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시간적으로는 2,000년 전의 전설로, 공간적으로는 낯선 땅의 역사로 격리해 버립니다.

그것을 '과거의 사건'으로 묶어두어야만, 오늘 나의 삶을 흔들어놓는 불편한 요구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내 통장 잔고나 인간관계와 상관없다고 믿고 싶은 것은, 어쩌면 내 삶의 주도권을 신에게 조금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우리 자아의 교묘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의 비평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의 목적이 "사물을 아는(knowing) 것이 아니라 느끼는(feeling)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기법이 바로 '낯설게 하기'입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그 매끈한 십자가를 머릿속에서 지워봅시다.

대신 그 자리에 '단두대'나 '전기의자'를 놓아보십시오.

주일 아침, 교회 강단 정중앙에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단두대가 놓여 있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찬양을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기괴하지 않습니까?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1세기 사람들이 목도했던 십자가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장식품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살인 기구였습니다.

'낯설게 하기'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파리 떼가 들끓는 골고다 언덕.

구경꾼들의 조롱 섞인 침 뱉음과 로마 병사들의 무심한 주사위 던지기 소리.

그 소음 속에서 들리는 한 남자의 거친 숨소리.

완벽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신이, 법적으로 가장 추악한 죄인이 되어 죽습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인지 부조화'의 극치입니다.


사순절 기간,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며 도달해야 할 지점은 "예수님이 고생하셨네."라는 동정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 자리에 매달려 침 뱉음을 당해야 할 존재가 사실은 나였구나."라는 처절한 자각입니다.

낯설게 보이던 그 형틀이, 실은 나를 위해 맞춤 제작된 의복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2,000년의 간극'은 단숨에 소멸합니다.

나의 의로움, 나의 체면, 나의 종교적 자부심이 십자가 위에서 함께 찢겨나갈 때, 비로소 새로운 내가 숨 쉴 공간이 생깁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어둠 (시기, 질투, 혐오)을 마주할 때, 그것을 외부의 대상에게 뒤집어씌우는 '투사'를 선택합니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은 인류의 그 거대한 투사가 집단적으로 폭발한 현장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를 죽인 이들을 '그들'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둡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조금만 더 가까이, 가장 낯선 눈으로 보면 장면은 달라집니다.

그 안에는 지금도 우리 사회와 내면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논리들이 가득합니다.

누군가를 깎아내려야만 내가 높아지는 비루한 경쟁심, 나의 안위를 위해 정의를 외면하는 비겁함,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치며 군중 속에 숨는 무책임함.


사실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그가 참 '재수 없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만 죄 없는 척, 다 아는 척하며 나의 이기적인 생존 논리를 흔들어놓는 그가 불편한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위해 정교하게 쌓아 올린 우리의 가짜 인격은, 참된 진실을 말하는 예수의 존재를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를 '낯선 이'로 규정하고 밀어냈던 것은, 실은 그 거울에 비친 나의 추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비겁한 뒷걸음질을 멈추고 우리의 이런 모습을 가감 없이 마주 봐야 합니다.


예수를 못 박는 경험이 없으면, 예수와 함께 못 박힐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분을 시기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그를 제거하고 싶어 했던 그 '살해의 충동'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한, 십자가는 영영 나와 상관없는 구경거리에 불과합니다.

내가 휘두른 망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에게, 십자가의 용서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칼뱅의 '형벌 대속설'등과 같은 전통적인 신학은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예수의 피가 필요했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 관점을 다르게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가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용서받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누군가 나를 용서하려 들면 "네가 뭔데 나를 동정해?"라며 날을 세우는 고약한 자존심을 가졌습니다.

나조차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데, 신이 나를 용서한다는 말을 믿기 어려운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이 꼬인 마음을 녹이기 위해 인간의 가장 깊은 심리 법칙을 따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최악을 받아주는 존재만이 나의 진심을 얻는다.”는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밑바닥을 보여주십니다.

"보아라, 너희는 죄 없는 이를 죽이는 존재들이다."라고 우리의 악함을 까발리십니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내가 나조차 혐오하며 버렸던 그 어두운 구석까지 신이 기꺼이 껴안으시는 사건을 목격하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피는 신의 화풀이를 위한 제물이 아니라, 가장 추악한 순간의 나조차 수용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사랑의 인장'입니다.

"네가 나를 죽였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이 압도적인 수용 앞에서만, 인간의 굳게 닫힌 마음 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기묘한 인생의 반전을 경험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예수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 '못 박는 자'로 서 있습니다.

내 앞길을 막는 자, 내 위선을 들추는 자를 제거하려는 서슬 퍼런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쏟아내는 생명의 피가 우리의 증오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방어기제는 무너집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통렬한 애통함이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자'로 변화됩니다.


예수를 찌른 그 창끝에서 흐르는 것은 보복의 독이 아니라 용서의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 바로 너다.”

비참하게 깨어지고 찢겨 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神性) 안에서 온전히 사랑받고 있는 그 존재가 바로 당신의 참모습이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며 밀어냈던 '낯선 예수'가 실은 내가 되고 싶었던 '참된 나'였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짓누르던 죄책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이 깃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주는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는 '정체성의 전당'입니다.

십자가 위의 그 남자는 더 이상 낯선 타인이 아닙니다.

그는 당신이 되고 싶었던 가장 고귀한 모습이며, 당신이 버리고 싶었던 가장 비참한 모습까지 한 몸에 담아낸 당신 자신의 거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부활의 아침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