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우리 안에 이데올로기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누가복음 10장 36–37절
강도를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옷이 벗겨졌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냉정함의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바쁜 사람들, 혹은 무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던 것이 아닐까요.
그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옷이 벗겨졌다는 것은 단순히 추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내 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발도 없고, 억양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출신을 알려 줄 어떤 표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 앞에서 잠시 멈췄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속으로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이 우리 편이라면 도와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냥 지나가도 된다.
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나갑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눈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보통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정치적인 입장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넓게 보면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입니다.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고, 그 생각을 기준으로 사람과 현실을 판단하는 방식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한 인간으로 보기보다 어떤 편에 속한 존재로 보게 만드는 생각의 틀, 그것을 우리는 보통 이데올로기라고 부릅니다.
이데올로기는 지금의 현실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더 나은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위해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보면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어느 정도 닮아 보입니다.
신앙 역시 지금의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더 나은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그 세계를 향해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대개 인간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선택하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그 완성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완성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나 이데올로기보다 더 넓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분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분류 위에서 관계의 범위를 정하게 합니다.
누구에게는 마음을 열고, 누구에게는 거리를 두며, 누구에게는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언제나 악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중요한 질문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니라 어느 편에 속한 사람인가를 먼저 묻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길을 지나가던 순간에도 어쩌면 그런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 한 사람이 멈춥니다.
사마리아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결코 가까운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집단은 원래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 멀어졌습니다.
전쟁과 이주를 거치며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른 민족들과 섞여 살게 되었고 신앙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신앙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돕겠다고 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쌓는 일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과 권리, 그리고 공동체의 미래와도 연결된 일이었습니다.
그 공동체를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세운다면 그 권리와 영향력을 나누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선택에는 신앙을 지키려는 마음과 함께 현실적인 계산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과 이데올로기가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집단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성경에도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 여인은 놀라서 묻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말을 거십니까?”
그 질문 속에는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거리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율법학자는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미 어떤 경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이웃이고 어디서부터는 이웃이 아닌지를 정하려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 경계는 꽤 분명했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경계 밖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데올로기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공동체 안에는 형제와 자매가 있고, 그 바깥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그어집니다.
그래서 율법학자의 질문은 결국 이런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던 질문이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묻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유대인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내 편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어쩌면 신앙이란 바로 그 충분함을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분류하려는 습관에서 조금 물러나, 먼저 한 인간을 바라보는 눈을 다시 배우는 일 말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자유라는 말의 오래된 어원을 설명하면서 수메르어 아마르기라는 단어를 소개했습니다.
그 말의 뿌리는 ‘엄마’라는 뜻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빚에서 풀려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자유의 원래 모습이라는 설명입니다.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수를 해도 괜찮고,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그 관계는 어떤 조건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그런 관계 안에 머무르는 것과 비슷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어도 괜찮다는 것을 아는 자리입니다.
신앙이 이데올로기와 뒤섞일 때 내가 옳다는 확신이 커지고, 저 사람이 틀렸다는 확신이 커집니다.
역사 속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일어난 많은 폭력은 바로 그 확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한다고 믿었고,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제거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역사의 완성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동시에 겸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사람에게 인간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순절의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전통 가운데는 금식과 절제가 있습니다.
어떤 것을 덜 먹고, 어떤 습관을 내려놓고, 평소보다 조금 더 조용히 살아보는 시간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고통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평소에 너무 많은 것들에 붙잡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어떤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내가 속한 집단의 옷, 내가 믿는 생각의 옷, 내가 옳다고 믿는 확신의 옷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좁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어쩌면 그 옷을 내려놓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판단들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너무 쉽게 나누어 왔던 경계선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너무 빨리 판단하고 너무 쉽게 사람을 구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잠시 멈추어 서 있을 때,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 인간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편에 속한 존재로 보고 있는가.
강도를 만난 사람은 여전히 길 위에 쓰러져 있습니다.
옷이 벗겨져 있어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사순절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사순절은 누가 옳은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지를 묻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