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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지구가 땀 흘리는 이유

에어컨의 역설

by 한자루




내가 사는 이곳은 일년 내내 더운 곳이다. 선풍기로는 어림없고 에어컨이 없다면 숨쉬기 조차 힘든 날이 많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살았던 어릴 적 여름은 지금보다 훨씬 견딜 만했던 것 같다.

해가 지면 바람이 불었고,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선선한 밤공기가 피부를 식혀줬다.

선풍기 한 대로도 여름을 충분히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에어컨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든 세상이 됐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고, 밤에도 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폭염이 이어지는 날이면 누구나 같은 말을 한다.

"에어컨 없으면 진짜 못 살아!"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40도에 육박하는 기온 속에서 에어컨 없이 지내는 건 고문에 가깝다.

실제로 폭염은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더위로 인해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그러니 에어컨을 틀 수밖에. 이건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에어컨을 계속 틀어도 괜찮을까?"

누군가는 "괜찮을 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실 에어컨은 우리가 더위를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솔직히 말해, 예전엔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 그냥 에어컨을 틀면 시원해지고, 전기세만 조금 더 나올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에어컨이 작동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전기다. 에어컨을 가동하려면 전기가 필요하고, 우리가 쓰는 전기의 상당 부분이 화석 연료를 태워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그게 대기 중에 쌓이면서 지구를 더 뜨겁게 만든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더워서 에어컨을 켠다. 전력 사용이 늘어난다. 화석 연료 발전소가 더 많이 가동된다.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배출된다. 지구가 더 뜨거워진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에어컨을 켠다

끝없는 악순환이다.


두 번째 문제는 냉매 가스다.

에어컨에는 실내의 열을 밖으로 빼내는 냉매가 들어 있다.

과거에는 '프레온가스'라는 것이 쓰였는데, 이게 오존층을 파괴하는 주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금지됐다. 지금은 ‘HFCs(수소불화탄소)’라는 냉매가 주로 사용되는데, 문제는 이 가스가 이산화탄소보다 1,000배에서 9,000배까지 더 강력한 온실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냉매는 원래 외부로 새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에어컨이 오래되거나 폐기될 때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대기 중으로 유출된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낡은 에어컨이 무분별하게 버려지면서, 엄청난 양의 냉매 가스가 공기 중으로 퍼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심코 틀어 온 에어컨이 사실상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연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고민이 시작된다.

에어컨이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당장 끄고 버텨야 할까?

현실적으로 그건 너무 가혹한 선택이다.

더운 여름에 에어컨 없이 살라는 건, 겨울에 난방 없이 살라는 것만큼이나 무리한 요구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다행히도, 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극단적인 인내가 아니라, 덜 해로운 방식으로 더위를 이겨내는 법을 찾는 것이다.


에어컨을 끄지 못한다면, 덜 쓰면서도 같은 효과를 얻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단순히 "온도를 26도로 맞추세요" 같은 뻔한 조언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정말 실천 가능한 변화들 말이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연중 내내 더운 나라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쇼핑몰이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기온 차이에 놀라지 않는다.

대부분 실내 온도를 25~27도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한여름에도 실내에서 얇은 카디건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에어컨을 20도 가까이 낮춰놓고 외투를 걸치고 일하는 경우가 흔한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온도를 1~2도만 올려도 전력 소비는 큰 폭으로 줄어든다. 더위를 피하려면 무조건 차가운 공기를 뿜어내는 것보다, 공기의 흐름을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일본의 ‘쿨 비즈’ 캠페인은 이런 개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여름철에는 정장을 벗고 가벼운 옷차림을 장려하면서, 실내 냉방 온도를 높이는 정책이다.

우리도 여름철에는 실내에서 가벼운 옷을 입고, 선풍기와 에어컨을 함께 사용하면 체감 온도를 훨씬 낮출 수 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에어컨을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전력 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터 청소는 물론이고, 실외기의 위치와 상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실외기가 직사광선을 받으면 에어컨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그늘에 두거나 차광막을 씌우는 것만으로도 전력 사용량이 감소한다. 일본에서는 아예 ‘녹색 커튼’을 활용해 건물 외벽에 덩굴식물을 심고, 실내 온도를 자연스럽게 낮추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변화들만 모여도, 우리가 쓰는 전기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에어컨이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은 바로 냉매다.

그렇다면, 냉매 없이도 시원해지는 기술이 있다면 어떨까?

이미 그런 연구가 진행 중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는 태양광 반사 패널을 이용해 전력 없이도 표면 온도를 낮추는 ‘방사 냉각’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기술은 대기 중으로 열을 방출해 주변 온도를 낮추는 원리인데, 미래에는 냉매 없이도 작동하는 에어컨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물을 이용한 냉각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막의 전통적인 냉방 방식인 ‘발열 냉각’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기술이 등장했다.

미국의 한 스타트업은 물을 사용해 공기를 냉각시키는 장치를 개발했는데, 기존 에어컨보다 전력 소비가 80%나 적다. 이런 혁신적인 기술들이 점점 상용화된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에어컨의 냉매 문제를 걱정할 필요도 줄어들 것이다.


사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도시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한여름이 되면 ‘열섬 현상’이 극심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스팔트, 콘크리트 건물, 유리벽 천지다.

이런 구조물들은 낮 동안 엄청난 열을 흡수하고, 밤에도 식지 않는다. 도시 자체가 거대한 ‘열 저장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도시를 더 ‘녹색’으로 만드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대표적인 ‘녹색 도시’로 꼽힌다. 건물마다 정원과 수직 숲을 조성해, 도심 속 온도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 도로에 가로수를 심는 것만으로도 체감 온도를 몇 도나 낮출 수 있고, 옥상 정원을 만들면 실내 냉방 효과까지 높일 수 있다. 한편, 일본 도쿄에서는 건물 옥상에 빗물을 모아 온도를 낮추는 ‘쿨 루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런 시도는 가능하다. 서울의 몇몇 학교에서는 교실 옥상에 ‘녹색 지붕’을 설치했는데, 이곳의 교실 온도는 일반 학교보다 3~5도 정도 낮게 유지된다고 한다.

이런 방식이 확대된다면, 도시 전체가 덜 뜨거워지고, 결국 에어컨 사용량도 줄어들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에어컨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에어컨이 필수라고 해서, 무조건 전력을 낭비하고 냉매를 배출하는 방식으로 써야 하는 건 아니다.

같은 에어컨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력 소비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면, 냉매가 필요 없는 에어컨도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도시 자체를 더 시원하게 만들면, 에어컨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사실 기후 변화는 개인이 해결하기엔 너무 거대한 문제다.

하지만 그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할수록,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우리는 에어컨 없이 살 수는 없지만, 에어컨을 덜 필요로 하는 환경을 만들 수는 있다.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에어컨을 켤 때마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이 시원함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무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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